잘못 들어선 길에서 (구) 문지 스펙트럼 17
귄터 쿠네르트 지음, 권세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SF소설 덕후였다. 김용의 대하역사 소설을 다 읽고 시쿤둥해질 즈음 발견한 아시모프의 소설 시리즈. <강철도시><로봇>은 내 20대의 동반자였다. 이후 걸출한 SF소설들을 거쳤고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읽을 즈음 내게서 멀어졌다. 아마도 에코의 소설에 심취하면서 나의 문학 편력은 시작됐을 거다.

 

그런데 SF소설은 장르적 기대감과 함께 한계가 분명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가치나 사회비판적 의식의 부재였다. 그래서 가볍게 읽는 장르 소설이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비록 출중한 SF 작가와 작품들이 간간히 발견되긴 했지만(예컨대 레이 브래드베리의 <화씨 451> 그 수가 너무 적었다. 물론 SF소설의 장르적 특색은 여전했다.

 

요 몇 년 간 에스에프 소설과는 거의 담 쌓고 지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귄터 쿠네르트라는 작가의 <잘못 들어선 길에서>(문학과지성사, 2000)을 읽었는데 정말 놀라운 소설이었다. ‘SF소설을 이렇게도 쓸수있구나!’라는 감탄을 내뱉게 했으니까. 쿠네르트라는 작가는 처음 접했다. 단편 소설집임에도 한 작품 마다 임팩트는 상당했다.

 

보통 독일 작가들은 별로 재미가 없었는데, 쿠네르트는 동독 작가임에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SF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보였다고 개인적으로 촌평하고 싶은 심정이다. 작가는 상황과 소재만 SF적 장르를 가져왔을 뿐 그 서사의 핵심은 동독 사회 구조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다.

 

동독 시절이면 냉전시대이다. 냉전 시대에 작가가 써내려간 짧은 서사는 시대를 초월하여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한 비판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더군다나 재밌기까지 하다. 읽다 보면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특히 <병 통신><가정 배달>이 그렇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시정하기 위한 제도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올림피아2>, <러브스토리-메이드 인 DDR>,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져야 한다> 등은 사랑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돋보인다. 짝사랑과 불륜이 미래 기술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부조리하게 보여주는 단편들이다. 특히 <대리인>의 경우 사랑을 진화론적으로 풍자하는 시도가 돋보였다.

 

12편의 단편을 싣고 있는 선별집이지만 주제와 소재의 스펙트럼이 넓어 읽는 맛이 배가 된다. 그래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꼭 보고 싶다. <잘못 들어선 길 및 또 다른 방황들>이라는 1988년 원판본이 꼭 재번역 되길 강력히 희망한다.

 

주제를 서사로 구현해 내는 작가의 역량이 매우 빼어나서 단편 12편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당분간은 입맛만 다셔야겠지. 슬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3-10-20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여간해서 별 다섯 개 안 주시는 줄 아는데 꽤 만족스러우셨나 봅니다.
좀 오래된 책이긴한데 책값도 싸네요.
전 아직 에스에프 익숙치 않지만 함 관심 가져 보도록 합죠.ㅋ

yamoo 2023-10-23 09:12   좋아요 1 | URL
네, 아주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를 이어서 읽었는데, 좋은 소설을 읽는 시간이 왜 가치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즘 느끼는 거지만 문지스펙트럼의 세계문학은 정말 선견지명이 있었던듯해요. 여기 리스트에 목록 올리고 있는 작품들은 모두가 걸출한 작품들입니다. 대산이나 을유에서 펴내는 세계문학 작품집에 들어 있는 듣보잡 작가라는 사람들 일부가 문지스펙트럼에 있는 걸 보고 놀랐죠. 쿠네르트는 어느 출판사에서도 그의 작품들이 완연된 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이상하죠. 이렇게 걸출한 작가의 작품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문지스펙트럼의 소설들이 다시 간행하고 있으니 기다려보면 다시 재간될 듯합니다...ㅎㅎ 2003년인가...그때 이미 무질의 단편집이 여기서 나왔다는 사실은 놀라울만합니다..ㅎㅎ

그레이스 2023-10-23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화씨451>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르귄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 책도 찾아봐야겠네요!^^

yamoo 2023-10-24 09:17   좋아요 1 | URL
르귄도 괜찮지요..ㅎㅎ 브레드버리의 화씨451은 브레드버리 작품 중 가장 발군이더군요..^^

그레이스 님, 에프에프 좋아하신다면 이 책 강추합니다! 정말 의미있는 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