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 일빛 / 2003년 4월
구판절판


그런데, society의 의미는 어떤가? 1933년에 출간된 <옥스퍼드 영어 사전 (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society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1) 동료인 사람들과의 결합, 특히 벗끼리의 친밀함이 담긴 결합, 동료끼리의 모임
2) 같은 종류의 것끼리의 결합, 모임, 교제에서의 생활 태도, 또는 생활 조건. 조화를 이룬 공존이나 상호 이익, 방위 등을 위해 개인의 집합체가 이용하는 생활 조직, 방식
지금까지 보아온 일본 사전의 번역어는 모두 다 1)의 뜻에 상당히 가깝고 2)의 뜻은 거의 취하고 있지 않다. 그에 대응하는 비슷한 현실 및 그것을 표현하는 말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후자처럼 넓은 범위의 인간 관계의 경우에는 그에 대응하는 현실 그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 뜻을 표현할 말도 없었다.
당시 쿠니(國)라든가 한(藩)과 같은 말은 있었다. 그러나 society는 2)에서도 서술하고 있듯이 궁극적으로는 개인(individual)을 단위로 하는 인간 관계이다. 좁은 의미로도 넓은 의미로도 그렇다. '쿠니'나 '한'에서는 사람들은 신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래에 계속)-17쪽

(위에서 계속) society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이 2)의 넓은 범위의 인간 관계를 일본어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있었을 것이다. -18쪽

그런데 society의 번역어로서 어째서 '사회'만이 남은 것일까? 일단은 예로부터 써온 일본어인 '교제'나 '세상' 등은 society와는 의미가 어긋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뜻이 공통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사회'는 거의 society를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나 다름없다. '사회'라는 말은 오래된 한어이긴 한데, 일본에서의 용례는 지극히 드물었다. 번역어 '사회'는 '사'와 '회'에서 새삼스레 조합되어 나온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에는 원래의 '사'의 어감도 '회'의 어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는 society와 그 뜻이 어긋나는 부분도 거의 없지만, 그러나 공통 부분도 또한 거의 없다.
이 무렵 만들어진 번역어에는 한자 두 자로 이루어진 신조어가 많다. 특히 학문과 사상의 기본적인 용어에 많다.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의미의 말에 대해서 이 쪽의 전래돼오는 말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그 뜻이 어긋나는 것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뜻이 결핍된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래에 계속)-33-34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말은 일단 만들어지면 뜻이 결핍된 말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뜻은 당연히 거기 있을 것으로 취급된다. 사용하는 당사자는 잘 몰라도 말 자체가 심원한 뜻을 본래 갖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도리어 남용되어 다른 말과 구체적으로 맥락이 이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용되는 것이다. -34쪽

'네모난 문자(인용자주 -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번역하겠다는 것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번역의 대원칙인 것이다.
이리하여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번역할 때 완성되는 번역문은 어색하지 않은 진짜 일본어문이 된다. 그런데 이 때 번역되는 원서가 일본인에게 낯선 새로운 이질적인 사상을 얘기하고 있다면, 같은 일본어를 사용한다 해도 종래 사용되지 않았던 방식의 서술을 하게 된다. 즉 번역자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사용하면서도 말의 조립을 궁리하여 문맥상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사용하게 되면, '자연스러운 일본어'의 의미도 변질된다. '사람'은 '하늘' 앞에 있는 독립된 혼자의 존재가 되고, '교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범위의 다수의 사람들과의 평등한 인간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후쿠자와 유키치 이외의 당시 다수의 지식인들은 어째서 이 방법을 취하지 않았던 걸까? 왜 네모난 문자만 사용했을까? (아래에 계속)-46쪽

(위에서 계속)
그것은 매우 뿌리 깊은 문제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기에는 상대(上代) 이래 천수백 년 동안 중국 등 선진 문화를 한자라는 언어를 통해 받아들여왔다고 하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일본은 일관되게 번역 도입국이었다. 번역되어야 할 선진 문명의 말에는 반드시 '자연스러운 일본어'만 가지고는 표현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중요한 말일수록 그러하다. '자연스러운 일본어' 속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한 완전히 '흠잡을 데 없는 역자(譯字)는 사실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어긋나는 의미를 '네모난 문자' 자체에 맡기는 것이다. '인민 각개'도 '일신의 몸가짐'도 결국 그러한 예이다. (아래에 계속)
-46-47쪽

(위에서 계속)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네모난 문자'의 의미가 원어의 individual과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말을 아무리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individual의 의미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이러한 새로운 문자의 건너편에 individual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약속이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번역자가 멋대로 한 약속이므로, 다수의 독자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워 보이는 한자에는 잘은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독자 측에서도 또한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일본어에서 한자가 지니는 이러한 효과를 나는 '카세트 효과'라고 부른다. 카세트(cassette)란 작은 보석함을 이르는 말로,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애태우게 하는 물건이다. '사회'와 '개인'은 예전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이 '카세트 효과'를 갖는 말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계속)-47쪽

(위에서 계속)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일본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이질적인 사상을 얘기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일상 속에 살아 있는 말의 뜻을 바꾸고, 또 그것을 통하여 우리들의 현실 그 자체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방법이었다. 다루는 말이 하나하나 현실의 무게를 이끌고 있을 뿐 아니라, 네모난 말의 조립이 갖고 있는 '카세트 효과'를 빌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개인'이란 문자가 포함된 말을 아주 이른 시기부터 individual 또는 그것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했던 것은 역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society에 대해 초기에는 '교제'라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사용하다가 결국에는 '사회'라는 한자 조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들 '네모난 문자'와 함께 '카세트 효과'의 연역 논리도 등장했다. 그것은 이 시점에서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고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선각자가 일본어에 의한 독창적인 사고를 한계까지 추구하다가 결국은 현실과의 격투 끝에 좌절한 것이다.-47-51쪽

'근대'라는 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몇 번인가 이상할 정도로 그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다. 그 최초의 유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1910년 전후 메이지가 끝나갈 무렵으로, 특히 문예 분야의 사람들 사이에서였다. 문학사를 보면 이 즈음 혹은 그에 이어지는 한 시기에 '근대'라는 이름을 내건 논문이 만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최초의 유행을 계기로 '근대'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보급되었고, 드디어 사전에도 기왕의 modern의 번역어였던 '근세'와 나란히 기술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다음 번의 유행은 이 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근대의 초극' 좌담회 무렵이었다. 태평양 전쟁 ㅇ중인 1942년이다. 앞의 유행에서는 '근대'는 플러스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동경의 대상이었던 데 반해 이 시기의 '근대'는 '초극'되어야만 할, 부정적 가치를 지닌 대상이다. 앞서 게재한 나카무라 미츠오의 발언에는 그러한 시류에 대항하여 고의로 반대의 가치를 강조할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아래에 계속)-70쪽

(위에서 계속)
나아가 다음 유행은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앞 시대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 시대의 '근대'는 일종의 긍정적 가치의 상징 자체였다. '근대 문학', '근대 시민 사회의 통과'론 등등의 무렵이다. 그 다음에는 결국 그 반동으로서 '근대주의' 비판이 온다. <중략>
말의 의미가 이 정도로 다의적인 것은 본래 그 말에는 의미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의미가 결핍돼 있기에 유행하고 남용되고, 그리고 유행하고 남용되기 때문에 다의적인 말이 된다.
이 '근대' 유행의 시대를 거쳐서, 드디어 역사학자들이 좋다 싫다라는 가치 부여 없이 이 말을 사용하면서 시대 구분 용어로서의 겉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결국 '근대'라는 말은 처음에는 현실의 의미 없이 단지 형태만으로 존재했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하나하나 의미를 획득해갔던 것이다. 이것은 번역어의 의미 형성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70-72쪽

미시마 유키오가 '미'를 말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미'에 대해서 말할 때와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할 때이다. 그는 보통 평론풍의 짧은 글에서는 '미'에 대해서 말하며, 소설 작품 속에서는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이 중 우선 전자부터 보자.
미시마 유키오가 '미'에 대해서 말할 때는 거의 늘 경멸조의 부정적인 어투를 사용한다. (중략)그런데, 이 <킨카쿠지> 안에서 미시마 유키오는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중략) '미'가 킨카쿠지와도 별개인 양 '나'에 대립하여 존재하면서 '나'의 앞에 나타나 '나'의 위에 군림하며 '나'를 이끌려고 한다. '미'는 여기서는 늘 저 멀리 있고, '나'는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보기만 하는 입장이다. 그 정체 그 자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것은 평론 등에서 '미'에 대해 말할 때 마치 별볼일 없는 것처럼 경멸조로 언급하던 '미'와는 딴판이다. (아래에 계속)
-86-88쪽

(위에서 계속)
이렇게 '미'를 말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은 분명히 의식적인 조작이다. 독자는 소설의 무대 위에 나타나는 '미'를 매우 중요한 무서운 그 어떤 존재라고 느끼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평론 등에서 경멸조로 '미'를 언급할 때는 마치 소설의 무대 뒤로 돌아가서 미의 딴 모습을 보여주는 척한다. 독자는 어느 쪽에서 보아도 '미'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뭔가 뜻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이 '미'라는 말의 트릭이 가능했던 것은 '미'라는 번역어가 일본어 속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작자 편한 대로 그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조작할 수 있었던 데 있다. -88-89쪽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보면 아서 예로 든 문장 조금 뒷부분에서는 이 je suis라는 것을 mon être라고 바꿔 말하고, 거기서부터 또 Être parfait (완전한 être, 즉 신)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는 suis의 명사형 être 쪽이 사고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또 이 être는 명사이면서 1인칭 단수형인 suis의 원형동사이기도 하다. 명사 중심으로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때로 동사 표현으로 말을 바꾸고 있다. 즉 명사 표현과 동사 표현 사이를 쉽게 왕복할 수 있다. (중략)
번역용 일본어인 '존재한다'는 동사이네, '존재'는 명사이다. 양자는 언뜻 보아 근원이 같은 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명사 '존재' 쪽이 먼저 있고 동사형은 여기에 하다(する)를 붙인 '하다' 동사이다. 명사 중심의 구성이란 점에서는 서구어보다도 철저하다. 서구 학술 용어의 번역에 딱 좋은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은 일본어 원래의 구조라기보다는 오랜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져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 계속)-122-123쪽

(위에서 계속)
그럼, 전래되어온 일본어 ある나 いる는 어떤가? 이미 서술한 ある뿐 아니라いる도 명사화하기 어렵다. (중략)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서구 철학의 번역을 '존재'와 같은 한자 두 자의 표현을 중심으로 해온 데에는 실로 지당한 까닭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 번역용 일본어는 확실히 편리했다. 그러나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이 이점의 다른 면을 놓ㅊ서는 안 된다. 즉 한자 중심의 표현은 번역에는 이로웠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상 등의 분야에서 일본 고유의 야마토 말, 즉 전래의 일상어 표현을 잘라 버려왔다는 것이다. 그런 탓에 가령 일본의 철학은 우리들의 일상에 살아 있는 의미를 포섭하지 못했다. 이것은 지금부터 350년쯤 전에 라틴어가 아니라 굳이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쓴 데카르트의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며, 나아가 소크라테스 이래의 서구 철학의 기본적 태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123쪽

역사학자 츠다 소키치(1873~1961)는 (중략) '자유'라는 말이 사용된 오래된 예를 들고 있다. <후한서>에 붉은 눈썹의 도적들이 자신들이 옹립한 천자를 어린애 취급하여 "百事自由'로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일본의 예로는 <도연초>에 죠신소즈라는 중에 대해서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버릇이 있으며, 만사 자유로이 하고 다른 사람을 따른 ㄴ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유'라는 말에는 '제멋대로'라는 식의 용례가 많다. '자유'라는 말을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는 용례도 있는데 특히 선승(禪僧)의 경우에는 '자유 해탈' 등 얽매이지 않는 경지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170-171쪽

그렇다면 여러 가지 번역어 중 '자유'가 승리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쿠후 말기~메이지 초기에 '자유'와 경쟁하던 '자주', '자체', '불기', '관홍' 등은 적어도 나쁜 뜻의 어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자유'보다도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그 점은 한자, 한문 서적에 통달한 당시의 지식인들이라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번역어가 선택되고 남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자의 뜻으로 보아 가장 적절한 말이 남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번역어다운 말이 정착한다. 번역어는 모국어의 문맥 속에 들어온 이질적인 태생의, 이질적인 뜻의 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이질성이 그냥 남아 있는 것, 즉 어딘가 잘 모르는 구석이 있다든가, 어감이 어딘가 어긋난다든가 하는 상태로 있는 것이 낫다. (중략)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고르는 것이 아니라, 소위 일본어라는 하나의 언어 구조가 저절로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어란 전래의 모국어로부터 보자면 구별된 말이다.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별의 표시를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말인 것이다.-177-178쪽

he나 she 등이 서구 문장에서 하는 역할은, 첫째 행위의 주체인 주어를 명확하게 해주는 구문상의 기능이다. 가로 문자의 글에서는 he나 she 등은 얼마든지 반복된다. 표시하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적 필요 이전의 형식상의 요청이다. 즉 ㅈ서구인들은 3인칭대명사 등 인칭대명사가 많은 글에 친근감을 느낀다. 그 배후에는 늘 행위의 주체를 밝히고 책임자를 개체로서 포착하여 분명하게 해두고자 하는 사고 구조가 있다.
일본어로 쓴 글에 주어가 적은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주어가 '생략'된다고 하는 견해는 본래 주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서구 문장을 모델로 삼은 데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주어는 문맥상 알 수 있으면 특별히 필요할 때 이외에는 표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일본어에 더 잘 맞는 생각이다. (아래에 계속)-192쪽

(위에서 계속)
또 하나, 일본어에는 주어를 표시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한 예로, 일본어 고유의 '자발(自發)의 조동사'가 사용될 경우가 그렇다. 내가 이 책과 같은 글을 쓰면서, "...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쓰면 말한 것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하지만, "...라고 생각된다"라고 쓰면 왠지 책임이 경감되는 듯하여 약간 자신이 없을 때는 그만 이 표현을 쓰고 싶어진다. '생각된다'라는 표현을 쓰면 생각하는 주체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 일본인들은 '하다'가 아니라 '되다'라는 동사를 즐겨 쓴다. 회의석상에서 보고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하면 저항이 있지만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말하면 무난히 통과된다고 한다. 채소 가게 아저씨가 "싸졌습니다"라고 말할 때, "싸졌다"는 행위에는 당사자인 채소 가게 아저씨뿐 아니라 동업자도 손님도 얼마간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라고 생각된다"라고 쓰면, 그 내용은 필자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ㅏ 다른 논자도 독자도 얼마간 그 생각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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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1-09-28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어를 잘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이 있었다. 책을 읽으며 그의 의견에 크게 공감했다. 별 생각 없이 쓰던 단어들에 담겨 있는 고민의 깊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것이 무척 유감이다.
아울러, 요전에 <형이상학>을 읽으며, 역자의 고유어에 대한 집착이 크게 불편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자 번역어가 가진 고민의 무게를 반일 민족주의 구호 따위로 그리 쉽게 내버리는 데는 역시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데카르트가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썼다는 지적, 고유어로 철학할 때에 철학이 일상의 의미를 포섭할 수 있다는 말이 <형이상학>의 역자의 의도를 짐작하게 해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