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 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구판절판


휘그당원인 디포우가 깊은 낙관주의자라면, 스위프트는 (월포울 시대의 토리당원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지독한 비관주의자이다. 따라서 디포우가 세상과 하느님을 믿는 부르즈와적, 퓨리턴적 생활철학을 선언한다면, 스위프트는 사람을 미워하고 세상을 멸시하는 냉소적인 우월감을 공공연히 과시한다. (중략) 오직 혼자 힘으로 거친 자연을 이기고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행복과 안전과 질서와 법과 관습을 창조해낸 로빈슨 크루쏘우는 중간계급의 고전적 대표자이다. 그의 모험담은 근면과 인내와 발명심과 모든 난관을 극복하는 건강한 인간 오성, 요컨대 실천적인 시민적 덕목을 기리는 하나의 영원한 찬가이다.또한 그것은 자기의 강한 힘을 자각하고 야심에 불타는 한 계급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진취적인 기상과 세계지배의 꿈에 부푼 한 젊은 민족의 선언문이다. (아래에 계속)-69-71쪽

(위에서 계속) 반면에 스위프트는 오직 이 모든 것의 뒷면만을 본다. 그것은 단지 그가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관찰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대포우의 소박한 신념을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계몽주의 시대의 환멸을 맨 먼저 체험한 사람들 증의 하나로서 자기의 체험을 형상화하여 깡디드를 능가하는 이 시대의 인물로 걸리버를 창조했다. 그는 증오가 천재로 만든 사람에 속하는데, 다른 사람이 미워하는 것보다 더 잘 미워하기 때문에, 그리고 포우프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듯이 세상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괴롭히기를 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사물을 본다. 이리하여 그는 인도주의와 정서를 중시했으면서도 잔인한 책들이 결코 적지 않았던 이 세기에도 가장 잔인한 책의 저자가 되었다. 영문학에서, <로빈슨 크루쏘우>에 버금가는 위대한 '소년소설'인 이 작품보다 박애주의적인 <로빈슨 크루쏘우>에 더 반대되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려울 것인데, 그 잔인함에서 <걸리버 여행기>를 능가하는 것은 아마 아동들에게 널리 알려진 또 하나의 고전인 <돈 끼호떼>뿐일 것이다. (아래에 계속)-69-71쪽

(위에서 계속)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버 여행기>와 <로빈슨 크루쏘우>에는 일종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두 작품은 문학사적으로 보아 르네쌍스 시대에 유행했고 씨라노 드 베르주라끄, 깜빠넬라, 토마스 모어 등을 대표적 작가로 하는 저 공상적 여행소설과 유토피아적 기적담에 연원을 둔다. 그리고 또한 이 두 작품은 동일한 세계관상의 문제, 즉 인간문화의 기원과 타당성이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문명의 사회적 기반이 뒤흔들리게 된 시대엠만 이러한 문제들은 그처럼 심각한 의미를 가지는 법인데 디포우와 스위프트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또 문화의 주역이 한 계층에서 다른 계층으로 교체되는 바로 그 와중에서만 여러 상이한 문명들의 사회적 제약성이라는 사상을 그처럼 날카롭게 규정하는 것이 가능한 법인데 그들에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69-71쪽

루쏘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편에 서서 절대적 자유의 쟁취를 위해 진력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태어났던 그대로의 소시민으로, 생활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던 그대로의 '뿌리뽑인 존재'로 일관했다. (중략) 그러나 볼떼르가 루쏘의 평민적 감상성과 무비판적 열광과 역사에 대한 몰이해를 공격한 것은 다만 그의 부르즈와로서의 입장 내지 부유한 신사의 입장에서 그렇게 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도한 냉저앟고 회의적이며 현실주의적 사고를 지닌 시민이자 학자로서 루쏘가 열어젖힌, 계몽주의라는 구조 전체를 집어삼키려 하는 비합리주의의 심연에 대해 저항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험이 실제로 얼마나 컸으며 볼떼르의 우려가 얼마나 정당했는가 하는 것은 독일에서의 계몽주의의 운명이 보여주는 바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경우 볼떼르는 자기 자신의 영향력의 성과를 과소평가했다고 할 수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합리주의와 유물주의의 여러 업적들이 쉽게 말살될 수 없을 만큼 튼튼한 기반을 구축했던 것이다.-102-103쪽

지체 높은 귀족이나 직접적인 주문자를 위한 작곡과 누가 누군지 모르는 연주회 청중을 위한 창작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주문작품이 대체로 2회 연주를 위한 것임에 비하여 연주용 작품이란 되도록 여러 번 되풀이하여 연주될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연주용 작품이 대체로 더 조심스럽게 작곡되고 또 작곡가가 연주에 관해 더 까다로운 요구를 내놓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중략) 주문에 의한 객관적인 작곡에서 개인적, 자기고백적인 음악으로의 최종적인 전환은 모짜르트와 베토벤 사이에서 일어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난 것은 베토벤의 원숙기가 시작될 무렵, 그러니까 <에로이카> 직전으로서, 공개연주회라고 하는 것이 이제 완전히 사회적으로 확립되고 되풀이 연주되어야 하 필요 때문에 기반을 굳히게 된 악보 매매가 작곡가의 주수입원을 이루게 된 시기이다. 베토벤의 경우 이때부터 크고 작은 모든 작품들은 단지 그의 새로운 이념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의 새로운 발전단계의 표현이다. -107-108쪽

괴테는 말년에 가서 문학에 대한 순개인적 입장에서 멀어지면서 차츰 일반적인 문명적 과제를 중시하는 초개인적이고 초국가적인 예술관에 가까워져 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계문학'이라는 명칭과 부분적으로는 그 개념까지도 그에게서 처음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세계문학적 상황은 사람들이 미처 의식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계몽주의의 문학, 볼떼르와 디드로, 로크와 엘베씨우스, 루쏘와 리처드슨의 작품들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이미 '세계문학'이었다. 18세기 전반 이래 일조으이 '유럽적 대화'가 진행중이었고 유럽의 모든 문화민족들이 비록 대부분 수동적이긴 했지만 이 대화에 참가하였다. (중략) 세계문학의 이론과 실제는 세계무역의 목적과 방법에 의해 조건지어진 문명의 산물이다. 여러 나라들 사이의 정신적 상품의 교환을 무역과 비교했던 괴테의 발언 자체가 이러한 상관관계를 암시하고 있고, 또 이러한 개념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168-169쪽

혁명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에겐 끝없는 환멸이 엄습하였고, 계몽주의의 낙관적 세계관은 그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8세기의 자유주의는 자유와 평등이 동일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 둘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18세기 낙관주의의 원천이었다면, 이 두 이념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믿음의 상실은 혁명 이후 시대의 비관주의의 근원이다. -208쪽

예술교욱의 민주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미술관의 설립과 확장이었다. 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이딸리아 여해을 할 형편이 못 되었던 미술가들에겐 유명한 거장들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 작품들은 대부분 왕실이나 대수집가의 진열실에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대중은 여기에 접근할 기회가 없었다. 혁명과 함께 이러한 사정은 일변하였다. 1792년 국민의회는 루브르에 미술관을 창설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때부터 젊은 예술가들은 자기 아뜰리에 바로 근처에 있는 이곳 루브르에서 매일처럼 걸작품을 연구하거나 모사할 수 있었고, 또 이곳의 진열실에서 스승에게 배운 바를 다시 확인하고 가장 잘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212-213쪽

프랑스 낭만주의가 정치적 혁명에 대한 보수층의 반동으로 생겨났다면, 영국 낭만주의는 근본적으로 산업혁명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반동으로 생겨났다.-266쪽

18세기의 사람들은 시가 사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시적 형상의 의미와 목적은 이념적 내용의 설명이요 해설이었다. 낭만주의 문학에서는 이와 반대로 시적 형상은 이념의 결과가 아니라 원천이다. (중략) 낭만주의자들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초감성적인 영혼을 시적 영감의 원천으로 믿고 그것을 언어의 자발적인 창조력과 동일시하였다. (중략) 여기에서는 영감의 신적 기원이라는 것이 내용적 특성이 아니라 하나의 순수한 형식적 특성이다. 본래부터 영혼 속에 존재하고 있지 않던 것이 영감을 통해서 영혼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서 두 원칙, 즉 신적 원칙과 시인적, 개인적 원칙은 손상 없이 유지되며 그리하여 시인은 자기 자신의 신이 된 것이었다.-268쪽

영국에서의 독자의 수효는 18세기 초기부터 계속 증가일로에 있었다. 그 첫째 단계는 1710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잡지가 생겨나서 1750년경 소설문학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시기이고, 두번째 단계는 1770년에서 1800년에 이르는 사이비 역사공포소설의 시기이고, 마지막 단계가 바로 월터 스콧에서 시작하는 현대 자연주의적 소설의 시기이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지금가지 전혀 책을 읽지 않거나 아니면 읽더라도 기껏해야 일반적인 종교서적을 읽던 시민계급의 일부분을 세속적 문학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고, 두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독자층이 돈 많은 부르즈와지를 중심으로 하는(그것도 주로 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넓은 써클로 확대되었으며, 세번째 단계에서는 소설에서 오락뿐만 아니라 교훈을 찾았던 중류층 혹은 하류층 부르즈와지 사회계층이 독자층에 가세하였다.-276쪽

자연주의에 반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갖는 공통점은 이 두 양식이 현존재와 인간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설정하고 도 여기에 웅대한 비극적, 영웅적 면모와 정열적인 감상적 표현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들라크르와에게는 아직 남아 있지만 콘스터블과 19세기 자연주의에 오면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중략) 그러나 인간이 예술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물체적 세계가 인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자 회화는 새로운 내용을 획득하게 될 뿐 아니라 점점 더 기술적이고 순전히 형식적인 문제의 해결에 의존하게 된다. 묘사대상은 점차 모든 미적 가치와 예술적 관심을 잃게 되고 그리하여 예술은 일찍이 유례가 없었을 만큼 형식주의적으로 된다. 무엇을 그리는가 하는 것은 이제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오직 어떻게 그려졌는가 하는 것만이 문제 된다.-280쪽

고전적 쏘나따나 심포니가 소규모의 세계 즉 소우주였다면, 예컨대 슈만의 <사육제>나 리스트의 <순례의 해> 등과 같은 음악적 그림이 연속된 악곡은 마치 화가의 스케치북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곳들은 군데군데 뒤어난 서정적, 인상주의적 부분들을 포함ㅎ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총체성과 유기적 통일성의 인상을 주려는 노력은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다. 베를리오즈, 리스트, 림스끼-꼬르사꼬프, 스메타나 등의 음악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심포니를 밀어내게 한 교향시에 대한 그들의 편애는 무엇보다도 세계를 전체로서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혹은 그렇게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는 징표이다.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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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12-1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의 우선 공략 대상은 "담임 선생님"의 박사 논문에서부터 줄기차게 인용되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사회학자가 쓴 문학사, 예술사인가? 내용이 너무 많아서 전체적인 인상을 잡기가 쉽지 않아 그냥 흥미위주로 읽는다. 고척도서관에 1, 2권이 없어서 3권부터 시작. 과연 이 주 내로 모두 읽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