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게 있어 음악은 하나의 생활이었습니다. 어떤 악기를 연주한다거나 그룹에서 밴드나 드럼을 맡은것이 아니고 단지 귀로만 듣는 음악일 뿐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요는 전혀 꽝이고 소위 말하는 고전음악 쪽입니다. 고등학교때만 하더라도 음악 시간에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는 고전음악은 감상을 빙자하여 두 눈을 감고 꿈나라에 가는 하나의 수단이고 도구일 따름이었는데, 대학 1학년때의 미팅 파트너로 인하여 클래식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좋아서라기 보다는 오기로 음악을 듣기 시작한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2. 첫 미팅의 상대는 음악에는 대가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종로 1가에 있는 "바로크"라는 고전음악 감상실에 데려가는데 분위기부터가 침침하고 고막을 터트릴것 같은 음장감은 잠자는 음악 치고는 무척이나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파트너를 고려하는 마음으로 졸음을 참으며 들었습니다. 그날의 미팅은 완전히 고역이었는데, 문제는 음악감상실을 나와서 찻집에서 음악을 모른다고 구박을 하는 것이었기에 속에서는 오기가 부글거리고 있었습니다. 대학입시 준비로 밤 공부를 하다보면 주로 심야방송에서 들려주는 팝송이 알게 모르게 귀에 내리 앉는지라 음악=팝..이라는 등식이 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을 따름이었지요.

3. 그 후로는 무조건 음악 감상실을 전전하면서 귀에 음악을 익히는데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었던 고전음악도 자꾸 들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그러다보니 스코어라고 하는 악보도 구해서 대편성인 교향곡의 악기별 연주도 분별하며 감상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게 되었습니다.그제서야 음악감상실에서 신이나서 팔을 흔들며 지휘하는 모습을 보였던 광적인 매니아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비록 뛰어난 음질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거금을 주고 오디오시스템을 장만을 해서는 정말로 애지중지 듣고 또 들었습니다. 레코드판 또한 소위 "빽판" 이라고 해서 외국에서 발매된 음반을 국내에서 다시 금형을 뜨고는 찍어내어 자켓도 복사를 하여 발매를 했었는데 원반과 달리 한번 더 원반으로 복사를 했기에 음질이 떨어짐에도 수십번을 반복해서 듣기도 하며 음악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4. "성음사"라는 음반 회사가 탄생하며 라이센스로 음반을 발매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음반의 음질은 지금까지 들어왔던 "빽판"의 음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바로 오케스트라의 한 가운데서 듣는 연주 같았었습니다. 당시에는 비싼 금액을 주고 구할 수 있었지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은 돈은 모두 음반 구입에 사용을 할 정도 였습니다. 한편으로는 학교에 음악 감상실이 생기고 돌아가신 육영수 여사가 음반을 기증하여 감상실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 음악감상실의 운영을 저희가 맡게 되었고, 백병동 교수의 해설로 음악감상회를 운영하기도 하였고, 피아니스트 김용배의 연주와 해설도 곁들인 음악 발표회를 여는등 비교적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것 같습니다.

5. 클래식을 듣는 사람이나 연주한 사람 모두에게는 이상한 습관이 있습니다. 그 습관(관행이나 관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이란 수십년간 연주 활동을 해 온 음악가들의 연주를 전혀 음악과는 관련이 없는 일에 매다려 살고 있는 매니아들이 그 연주를 평한다는 것입니다. 연주가 잘 되었니, 못 되었니...명반이다 아니다 등등 전문가의 연주에 시비를 거는 행위를 서슴치 않는 분들은 전혀 연주와는 관계가 없으며 단지 듣는 귀만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이며, 또 그분들의 평이 바로 음반에 대한 평으로 자리매김이 되는 현상이 하나도 이상하게 받아들여지는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6. 명반.....소위 음악 애호가들이 손꼽는 연주를 명반이라고 합니다.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명반에 담긴 명연주라는 개념을 이해하시기 힘드시겠지만, 음악을 듣다보면 명반이 왜 명반인가를 알게 된답니다. 지금은 손바닥속에 쏙 들어가는 컴팩트화된 음반이 나오고, 더구나 DVD등 디지털을 이용한 음반이 발매되어 명반의 개념은 많이 퇴색이 되었고, 과거의 명반도 디지털로 리메이킹 되어 그 가치 또한 많이 떨어진것만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기계음인 디지털보다는 색감을 느낄 수 있는 아나로그가 따스하게 피를 덥여주고 있는것은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랍니다.  그런 명반을 구하기 위한 노력은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수도승이 고행의 길로 접어들고 수행을 하듯 어렵게 어렵게 구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동두천이나 오산의 미군기지 주변에서 배회를 하다보면 중고 레코드 가게에 커다란 키의 미군들이 옆구리에  끼고 팔려고 나오면 쪼르르 달려가서 클래식 음반이 있나 없나를 살펴보고.....며칠을 고생해서 한 장이라도 구한다면 천하의 보물을 얻고 개선 장군이라도 된듯 집에 와서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음악을 듣고는 하였습니다.

7. 당시에는 쏘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물품을 구한다는것은 감히 상상도 못하였는데,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구한다거나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연주를 구하는것은 물론, 소지하는것 조차도 금지 사항으로 되어 있었던것을 미군을 통하여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컬 합니다. 한 장 두 장 쌓인 레코드는 어느덧 1000장이 넘는 자산이 되었고, 미국에 갈 기회가 있어 미국에 가서는 시간을 쪼개어 쌔크라맨토의 Towerrecord 본사의 매장에 가서 그동안 구하지 못했던 레코드를 마음놓고 잔뜩 고르기도 하였습니다. 그 구하기 힘들었던 레코드나 얼마나 흔하던지....세상에 단 1000장만 만들어낸 음반도 있어서 구해 오기도 하였는데, 제가 고른 음반의 수량이 제법 많다보니 판매담당 부사장이 직접 나와서는 정말로 다 살것이냐고 반문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귀국시 검색대에서 큰 가방에 하나 가득  담겨있는 레코드를 보더니 압수보다는 그 정성이 지극하여 통관을 시켜 주겠다고 할 정도로 틈만 나면 레코드를 모았습니다.

8. 지금은 제 방 한구석에 차곡히 쌓여 옛날처럼 주인이 나를 울게하지 않을까를 기다리는 음반들...  가만히 생각해보면 3000여장 되는 원판 중에는 겨우 한번 듣고는 두번 다시는 듣지 않는 음반부터 너무 많이 들어서 자켓에서 꺼내서 손에 들고보면 레코드 바늘이 워낙 많이 지나가서 뺀질뺀질 거리는 음반까지 다양하지만 지금 3000여장을 한번씩만 듣는다 해도, 70분(평균 연주시간) 곱하기 3000장만 하더라도 21만 시간을 들어야 하는데 죽는날 까지 듣는다해도 못 듣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레코드는 레코드장에 가지런히 언젠가 나를 꺼내주겠지...라는 마음으로 정열을 하고 서 있습니다.

9. 지금은 레코드를 꺼내어 플레이어 위에 올려두고 듣든다는 것은 디지털에 비하여 상당히 번거롭기에 별로 잘 듣지 않는 편입니다. 소위 LP판의 단점인 스크레치에 의한 잡음도 하나의 문제지만 컴팩트화된 생활용품 때문에 따뜻한 정이 담긴 아나로그가 점차 우리의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것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자켓을 들여다보면서 자켓에 담긴 음악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혀 생경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역시 그 그림도 정감있게 언제나 저와 함께 하는것 같습니다.

옳고 그름이 명확하여 칼날같은 판결을 내리는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디지털....  언제인지는 모르나 우리의 생활도 점차 차갑게 차갑게 디지털화 되어가며 사람과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쌓아갔던 온정은 점차 우리로부터 멀어지는것이 아닐지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용하게 전원주택에 몸을 담고 그동안 아껴두었던 아나로그 음반의 따뜻한 음색을 느끼며 따뜻한 아랫목에서  화롯불에 군밤을 구워 먹으며 감상할 수 있는 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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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3-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 있었던 일화가 인상적이네요^^; 저도 모아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시간계산을 하곤 했는데...새발의 피군요. 수수께끼님의 음반에 비하면...
지직대는 스크래치 소리가 들어보고 싶어졌어요.

2004-03-07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03-07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맞아요...역시 치매 증세가 틀림없나봅니다. 클래식 매니아로만 만족하고 있습니다. 오디오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아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동안은 "스테레오 뮤직"이라는 잡지를 열독했었는데, 신보 소개와 연주에 대한 평이나 마이너 레이블의 출간 소식도 좋지만 오디오에 대한 광고와 사용기등이 은근히 구매욕을 잡아내기에 과감하게 이별을 해 버리고, 지금은 거들떠도 안본답니다(음...이것이야 말로 貧者의 서글픔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