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렌타인데이가 무엇인지는 개략 알고 있지만, 저는 왜 그런날이 생겼는지는 잘 모릅니다. 더구나 발렌타인데이를 둘로 쪼개서 화이트데이라고 별도의 날을 정해 사탕을 파는 상술은 우리나라 사람들 아니면 상상도 하지 못할 해괴한 짓거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이 원조 발렌타인데이의 나라라면 당연히 그 나라의 풍습을 따라야 하는데도 그와는 또 다른 한국적 발렌타인데이를 만든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미국에서는 발렌타인데이에 남녀간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초클릿을 주고 받으니까요.....

2. 제가 근무하는 곳은 우리 나라의 유명 스포츠인들이 병역의무를 다하기 위해 모여있는 곳입니다. 며칠전부터 행정병들이 엄청난 양의 소포나 택배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뭐...택배로 오는 일은 보약을 집에서 보내준다던지, 또는 원래 소속되어 있던 팀에서 유니폼을 보내준다던지 해서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그 때 보다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박스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행정병에게 뭐가 이리 많으냐고 물어보니 발렌타인데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무실에 산처럼 쌓인 박스들의 수신인을 보니 이동국 등등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는 선수들이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발렌타인데이가 진정 사랑하는 남녀간의 선물 교환과 사랑고백 풍습이라면 어느 특정인에게 수십개의 박스가 배달이 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것 아니겠습니까? 일방적인 사랑의 표시겠지요....펜으로서 어느 선수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것은 좋은데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낸 것이기에 별 의미를 담지 못한다는 이야기들을 하더군요. 그리고는 박스에서 보낸 사람의 주소는 보지도 않고 부욱~ 뜯어서는 내용물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속에는 편지 등 다른 선물도 들어 있는데 그런것은 당사자가 가지고 갑니다. 이 글을 읽는분중에 선물을 보내신 분이 계시다면 무척 속이 상하시겠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을것입니다. 특정인은 자신만의 특정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박스의 크기가 더 재미있습니다. 보통 초클릿을 넣으려면 작은 상자가 좋으련만 보내는 이들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장 작은 박스가 알라딘에서 책 20권쯤 보낼 때 사용하는 박스 정도이고 대부분 라면박스보다 더 크답니다. 더구나 그 속을 종이로 채우고 초클릿은 일부만 넣는다든가 한것도 아니고 온통 초클릿으로 채워서 보냈으니 그 양이나 무게가 오죽하겠습니까? 어떤 선수는 너무 양이 많아 아예 행정병에게 먹으라고 주고 가기도 합니다. 덕분에 사무실마다 초클릿과 사탕이 넘쳐 흘러서 더 먹으라고 해도 아예 처다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5. 저도 작은 초클릿 봉투를 받았습니다. 몇명의 여군 선수가 있는데 그들이 준비를 했더군요. 오늘 아침에는 주장들이 모일 기회가 있었기에 지나가는 말로 "야..너희들은 좋겠다. 나는 초클릿 구경도 못했는데 너무 많아서 질질 흘리고 다닐 지경이니 말이다" 선수들은 이구동성으로 "기다리십시요!!!" 하더군요.  아침 회의에 참석하고 제 방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 책상위에는 정말 산 처럼 높이 초클릿이 쌓여있었습니다. 먹다 먹다 질리니 제게 버리듯이 가져다 준것인지...아니라면 아차! 하는 심정으로 늦게라도 나눠먹기로 한것인지는 몰라도 책상의 건너편을 볼 수 없을 정도의 초클릿이 가득했습니다. 이런것이 행복인가요?  아니면 불행인가요? 제 심정으로는 먹다 남아서 처리가 곤란한데 마침 제가 핀잔을 주었기에 이렇게 왕창 가져 온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여간...어마어마한 양의 초클릿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더군요(뭐..그렇다고 기분이 좋은것만은 아니었답니다 ^^~)

6. 행정병들에게 먹고 싶은 만큼 , 가져갈 만큼 가져가라고 했고 주변의 동료들에게도 나눠 주었는데도 많은 양이 남았습니다. 저도 딱 두 개를 먹었더니만 니끼해서 더 이상 먹지도 못하겠더군요. 아마도 당분간 제 방을 찾는 사람들은 싫도록 초클릿을 먹게 될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초클릿을 찾아와서 선수들에게 전달해야하는 행정병의 고생은 실은 이만저만한게 아닙니다. 무게나 가볍나요? 그 무거운 초클릿을 나르느라고 겨울인데도 땀이 나서 모자를 벗으니 마치도 머리에서 연기가 나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릅니다. 만약 제가 이곳에 계속 근무를 한다면 다음에는 발렌타인데이 이전에 반드시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절대 5개 이상 보내지 말도록 하라고요...  펜들이 보내오는 초클릿은 반송시켜서 발송자가 반송비까지 다 물도록 할겁니다. 며칠간 일이 마비될 정도로 배달되는 초클릿.....   그것을 보내시는 분들도 정신을 조금 차려야 할것입니다. 막말로 오리지널 애인으로 인정을 받은분이 아니시라면 초클릿 보내봐야 발신자가 누군지도 확인을 안하는것은 물론이고 속 내용만 쏙 빼가고 만다는것을 아셔야 할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 드린다면 알아주지도 않는데 괜한 돈 버리지 마시고, 헛고생 하지 말아주십사는 이야기 입니다. 배달을 하는 행정병들이 속으로 욕할지도 모르니까요......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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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2-16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쵸콜렛 많이 받으셔서 좋으시겠어요. 선수들이 수수께끼님의 팬이라 쵸콜렛을 드린거라 생각하세요. ^^


전 연예인이나 선수의 팬이 되어본 적은 없지만, 제가 아는 사람 S(누군지 밝히면 꼬집힐 것 같아서 비밀 ^^;;)를 보면 팬이나 팬클럽도 여러 격이 있나봅니다.
S는 30대 중반의 아이 엄마입니다. 여러 해 전부터 가수그룹 G.O.D.의 팬인데, '아지조(아줌마도 지오디를 좋아한다)'를 비롯해서 몇개의 G.O.D. 팬클럽에 가입해 있습니다. S는 임신한 무거운 몸으로도 지오디의 콘서트를 따라다니고, 회원 일부는 진행요원들의 감시를 피해서 콘서트를 캠코더로 녹화합니다. 지오디에 관한 내용이면 지오디 엄마보다도 더 상세히 알 정도랍니다. S가 전하는 여러 유형의 팬들을 보면, 스토커 형, 선물공세 형, 경쟁적 애정공세형, 다양합니다.
S는 그냥 사랑스럽게 지켜보자는 쪽입니다. 비싼 선물을 너무 많이 보내는 것은 젊은이들 버릇 나빠진다고 지양하고, 길가다가, 혹은 어느 까페에서 멤버들을 보아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인해달라거나 아는척 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피곤하게 하지 않기 위한 배려라나요... 다만, 지금 눈앞에 있다고 다른 팬클럽 친구들에게 열심히 문자는 보내겠지요. ^^;; 그리고 이들에 관해 알게 되는 안좋은 소문들은 절대로 주위로 전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공연중에 조금 오바한 장면이 있어서 지오디 멤버들이 '캠 녹화하신 분들은 조금전 신은 유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자, 정말로 마당발인 S에게도 그 컷이 들어오지 않더랍니다.
S가 전하는 천태만상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거리입니다. 일부는 가수들에게 힘과 격려가 되겠지만, 지나친 애정표현은 부담이 되겠지요.

여러 해 전, S가 가수 이문세를 좋아할 때 이문세의 테이프가 리어카에서 싸게 판다고 알려주니 정색하고 하는 말, 자기가 테이프를 사는 돈이 이문세에게 일부나마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자기는 절대로 복사판은 안산다나요.... 참으로 지극정성입니다.

비로그인 2004-02-1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성 팬....제가 어렸을때 클리프 리차드의 내한 공연을 기억합니다. 그런 열성팬이 바로 대중문화를 살리는 일이고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예술인이기에 장르를 망라해서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S(누굴까? 수수께끼도 이니셜이 S로 시작되는데....)라는 분...아마도 열성이 아니라 열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자면...탁구장에 갔는데 손님 취급을 안해주는 것입니다. 빈 자리는 미리 예약이 되었으니 곤란하다는둥... 그래서 탁구선수(김택수, 오상은, 주세혁, 김정훈 등등 쟁쟁한 멤버들이지요...)을 나오라고 했답니다. 그 탁구장은 클럽제 운영인데 그 선수들을 보더니만 클럽 멤버들이 아주 환장을 하듯 좋아하시더군요. 덕분에 탁구(실은 저는 탁구를 못친답니다. 운동은 겨우 자치기나 할까요..) 게임비는 물론 공짜이고 저녁까지 푸짐하게 얻어먹고 왔답니다. 운동선수에 대해 S라는 분 처럼 경기장이건 어디서건 차에서 내리지 못할 정도로 말 한마디라도 건네거나 사인이라도 받으려고 작은 노트와 펜을 들고 따라붙는 소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선수들은 조금 다르지요. 특히 유명선수라도 군 복무를 필하려면 반드시 <상무>선수를 거쳐야 하는지라 남들이 우상으로 보는 선수들도 제게는 한낱 단순한 군인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딸아이도 축구선수인 이 某 선수의 사인을 받아다 달라기에 몇 장을 받아서 주었더니만 학교에서 완전히 줏가가 상한가를 쳤답니다.

얼마전에 잠실 대운동장에서 공연이 열렸고, 그 자리에는 교육부 장관도 참석하셔서 어린 관중의 무질서한 모습을 보고는 마이크를 잡으시고 좌중의 진정을 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마이동풍이더랍니다. 그런데 그 아이돌 가수가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 하니까 그 무질서한 관중들이 모두 같은 목소리로 "녜!!!" 하더랍니다. 그리고는 질서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니 교육부 장관님의 말씀에는 아예 미동도 않하던 관중들이 잘 교육받은(가을산님네 막내 아들딸들 처럼요...) 사람들 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더랍니다.
클리프 리차드의 내한공연 때 감격에 겨워 까무라쳤던 소녀도 이제는 50줄에 드셧을 겁니다. 당시에 그들의 모습을 보고 "망쪼"라고 말씀하시던 어른들도 계셨지만, 그 때의 관중들이 지금은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는 평안함속에 안주들 하고 계시지요. 대중문화란 물질문화나 문명과는 달리 누리는 것이고 향유하는 것일겁니다. 또, 공감대의 형성이 부화뇌동하는 모습으로 비춰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결코 중심을 잃는것은 아닐겁니다. 21세기를 지식화, 정보화의 문화시대라는 말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공감대나 공유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어린 소녀들이 늘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버스의 외장을 이쁘게 도장을 해 두어도 어디서 사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성능이 좋은 스프레이로 "XX는 OO을 죽도록 사랑해~~" 라던가, 아니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온통 도배하듯 하는 소녀들을 보면 무엇인지 모를 답답함이 드는데 그 답답함은 클리프가 방한했을때의 열정과는 다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제 굳어가는 머리가 요즘의 세태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고요. 제가 발렌타인데이의 초콜릿에 대해 그 단상을 적었지만, 실제로 보신다면 아마도 놀라실 정도로 그 지나침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참 지극정성"이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지극정성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그 모든것을 그저 남의집 강아지가 짖는 정도로 알고 넘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초클릿을 수령하는 선수들에게 불특정 다수 모두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야단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 와중에 제가 느낄 수 있는것이 있었습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그 열정 속에는 최소한 저보다는 젊은 피가 끓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뜨거운 젊은 피가 앞으로의 우리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데 유용하게 작용하는 힘이 될것이라는 믿음으로 금년의 발렌타인데이를 넘겨봅니다.
< 如 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