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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국수를 끓였다. 조그맣게 한줌, 넣었다가 다시 또 한줌을 넣었다. 그가 원하는 국수의 양은 밥의 두세 배쯤 된다. 내딴에는 양껏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원망섞인 소리나 듣는다. 내 양을 아직도 몰라. 이쯤 되면 두말 않겠지 하고 빳빳한 국수를 풍덩 넣었다.

국수는 묘하게 끓는다. 공기 중에서는 약간의 힘만 받아도 똑똑 부러지는 것이 끓는 물에 들어가선 맥없이 무릎을 꿇는다. 폴싹 주저앉은 국수를 보면 약간 쓸쓸할 때도 있다. 겉으로는 의기양양한 체해도 금세 풀죽는 누구(누구긴, 나지)와 닮았다. 맥없어진 국수는 물밑에서 열심히 타래를 만든다. 하얀 실타래가 덩쿨덩쿨 솟아오르기 직전이다. 어릴 적엔 이런 실타래를 손에 끼고 할머니가 실을 감았더랬지. 나는 하얀 실타래에 냉정하게 찬물을 한 컵 부었다. 말갛지 못한 하얀 거품을 팔팔 일으키던 국수는 다시 주저앉았다. 이번에 부글거릴 때는 실타래의 색이 바뀌었다. 투명한 실이 저절로 감아오르며 일어올랐다.

국수를 찬물에 헹구고 보드라워진 면발을 그릇에 담았다. 그는 독한 술이 한 차례 훑고 지나간 속에 면발을 집어넣는다. 나는 그가 국수를 먹을 때마다 궁금해진다. 저 국수는 어디로 들어갈까, 하고. 그는 국수를 먹는 게 아니라 속에 쏟아붓는다. 이는 있어도 면발을 끓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그다지 잘게 부서지지 못한 면들은 꿀떡꿀떡 소리까지 내며 쏟아져 들어가는데 대체 어디로?

그는 면이 들어가는 데가 따로 있는 듯해, 라고 말했다. 그의 속이 분명한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속이 있다는 건가. 그러고 보면 사람의 속은 참 신기해, 라고 나는 말했다.

어제 점심때가 한참 지났지만 라면을 끓였다. 내가 혼자 라면을 끓이는 일은 거의 없는데도. 허기가 졌다. 점심 무렵 빵으로 끼니를 해결했지만 속이 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고프다는 것보다는 속이 비었다, 는 표현이 옳을 텐데 그걸 채워야 하는지 잠깐 망설이기도 했다. 생각이 오만군데로 흐트러지고 주워담을 수가 없었다. 속이 비어서 그런 거야, 하지만 내 빈 속보다 빈 머리를 걱정했다. 빈 속에 라면 반 개쯤 채우면 빈 머리를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라면을 먹었고, 조금 더 앉았지만 머리는 채워지지 못했다. 역시 판단력 부족이다. 하는 수 없이 책을 읽었는데 새벽녁쯤 덮은 소설이 자꾸만 생각났다. 설국의 고마코가 한 말이 맴돌았다. 괜찮아요, 어디서든 일할 수 있으니까. 징징거리지 않아요. 헛수고, 라는 말을 나는 거듭 썼는데 내 헛수고는, 내 빈 속은,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헛된 곤충의 죽음마저 소설 속의 그는 아름답다, 했는데.

아침에 국수를 끓였고, 역시 빈 속에 나도 그것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속이 채워지지 않아서 평소에 마시던 블랙커피가 아니라 하얀 프림과 설탕이 한움큼 들어간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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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02-0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저녁 국수사리에 골뱅이무침 먹었슴다! (그래서?*&*)()

2007-02-02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랑비 2007-02-0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에, 빈 속에 라면 반 개만 채우면 빈 머리가 채워지지 않아요. 한 개를 꽉 채워야지요. =3=3=3

urblue 2007-02-0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녁에 국수 먹을래요.

향기로운 2007-02-0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에 국수먹고 출근했어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2-0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caru님, 맥주 한 잔은 왜 말씀 안 하시는지? 맞죠? (사실 맥주 마시고 싶을 때 일부러 저녁메뉴를 골뱅이무침으로 잡아요, 전. ^^)
속삭인 님, 햐 그 속 빈 느낌요, 님 서재에 가서 저도... ^^
벼리꼬리님, 큭 그러게 한 개를 몽땅 끓일 걸 그랬나요? 그런데 왜 그냥 막 도망가세요, 잡으러 오라는 거죠? ^^
urblue님, 저녁에 국수 간편하고 좋겠어요. 저흰요, 뭐 세끼 국수 먹어도 좋다는 사람이 있어서. ^^
향기로운님, 반가워요. 저희 집에서야 해장하라고 끓였는데 향기로운 님은... ? ^^

향기로운 2007-02-0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잠도 자고요.. 밥 할 시간은 없고요^^ 그래도 든든하게 한 사발(^^) 말아 먹고 왔거든요^^

잉크냄새 2007-02-02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이거...호기심 많은 소녀같은데요. ㅎㅎ
드실땐 그냥 드세요. 어디로 가는지 알면 허망해진다고요.^^

2007-02-03 0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영엄마 2007-02-03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국수 먹고 시포라... 배 고파서 이만 잘래요. (^^)>

내가없는 이 안 2007-02-04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기로운님, 그러게요, 국수도 한 사발이 꽤 든든해요. ^^
잉크냄새님, 전 그 과정이 꽤 궁금한데요. 결과야 어떻든, 우리 속에 알 수 없는 (뱃)속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헤헤.
새벽별님, 오호, 저희 집이랑 비슷한 식성을? 저흰 가끔 아이가 어깃장을 놓아요. ^^
속삭인님, 아 그러셨구나. 님은 국수 앞에 놓고 있음 가끔 목도 메시겠군요. 전요, 어제 돌잔치에 다녀왔어요. 요즘 돌잔치는 영상도 보여주더라고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란 노래가 흐르고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았죠. 근데 갑자기 울컥하는 거 있죠. 분명 저렇게 사랑받으며 자랐을 아이가 어느새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키우고 있구나, 저 아이는 또 저렇게 사랑받으며 어느새 커서 듬직한 아빠가 되겠지, 별안간 사람 사는 세월이 그렇게 느껴지는 거죠. 울 엄마들도 우리 키우면서 행복하셨겠죠? 우리가 아일 키우면서 행복하듯이 말예요. (아,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아영엄마님, 저도 새벽에 배고프면 그냥 자는 게 오히려 몸에 좋단 생각이에요. ^^

chaire 2007-02-05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워도 채워도 빈 속일 때가 있지요. 육적으로든 심적으로든.
근데 이 글, 저 전반부는 말예요. 참 문학적이어서 읽을 때 단침이 고였어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2-06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haire님, 그죠, 잘 안 채워질 때 난감해요. 요즘 그래요. 정신 빠진 사람처럼 뭐 들어와도 잘 넣어두지도 못하고... 근데 이 글은 그래봤자 국수 끓이는 얘긴걸요. chaire님 점심밥 얘기는 문학적인 음식, 혹은 음식 같은 문학이라 늘 단침이 고이는데요 뭘. ^^
 

아이에게 야단을 쳤다. 내 딴에는 무척 억울한 무언가가 있었다. 화법은, 이랬다. 너 어쩜 그럴 수 있니? 잠시 그러다 거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자기 코앞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입을 꼭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사뭇 결연하기 그지없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었다. 잘못한 거 알아? 하고 재차 물었다. 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아, 잘못한 거. 내용은 자기 잘못을 시인했지만 태도로 봐선 전혀 문제될 일이 없다는 투다. 나는 뜨악한 얼굴로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시 물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당당했다.

그 후로 잔소리가 조금 더 이어졌다. 나야말로 잔소리를 싫어한다. 잔소리를 할라치면 잔소리를 늘어놓는 내 목소리까지 듣기 싫어져 돌연 입을 다물기 일쑤다. 아이는 내내 말없이 굳은 얼굴로 야단을 맞았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가 화를 내서 미안한데..., 여기까지 말하고는 아이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이의 견고한 얼굴 근육이 한순간 허물어졌다.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눈빛이 순해졌다. 두드리는 것도 두렵게 하던 성문이 열리는 걸 보았다. 아이의 눈에서 단단한 벽돌 하나가 빠져나오는 것처럼 별안간 눈물이 그득해졌다. 내가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내놓자마자 아이의 여린 마음이 내게 쏟아져들어왔다. 내게 와 부딪혀서 튕겨나갔던 아이의 표정과 말이 그제야 내게 들어왔다. 아, 생각해보니 단단한 건, 네가 아니라 나였구나.

너는 그럴 수도 있겠다, 내가 화를 낸 게 잘못이었어, 이렇게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더 얘기하지 않아도 아이는 나를 이해했고, 나는 아이를 이해했다.

 

요즘 이 책을 틈틈이 읽고 있는데 우연히 I message라는 말을 책 끄트머리에서 만났다. <나의 기분과 상황을 이야기해 아이들의 자발성, 책임감, 창의성을 길러주는 기법>. 이를테면, <더러운 호랑이를 보고, "너는 돼지 우리에 사냐?"보다는 "이 호랑이를 보니까 엄마가 또 치워야 할 것 같아서 답답하네."라고 말하는 것>. 이상하다. 다 아는 얘기인데 어젯밤 가벼운 실랑이를 겪고 나니까 대단한 해결법인 것처럼 다가온다. 물론, 안다고 다 아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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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01-2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매가 부드러워지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이안이 모습...
근데 정말요...얼마나 컸나 보고 싶어요.

"엄마가 화를 내서 미안한데...,"와 같은 말은 막상 부모가 되어 화를 내게 되는 상황에 처했을 떄는 잘 안 나오는 멘트인가봐요~ 하긴.. 누구에게건 미안하다고 말하는 법은 쉽지가 않아서... 이 책도 비덜프의 <아이에게 행복을 주는 비결>과 같은 맥락의 책인것 같아요...

2007-01-26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7-01-27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caru님, 그래요?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
이 작은 사건이 마무리된 후에요, 웃지못할 해프닝도 있었어요. 녀석이 숙제라면서 엄마를 그리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살짝 긴장시키는 거 있죠. 엄마 화내는 거 그릴까? 하는 바람에 화들짝 놀랐어요. -.- 이 책은 비덜프 것과는 달리 그냥 실용서예요. 아이를 학교 보내기 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를 위한. 헤헤.

속삭인 님, 그럼 제가 거짓말을 많이 했다는 건데... ^^

chaire 2007-01-27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안이 보여주세요. 예에전에, 오래전에 올렸던 모습보다 한참 자라, 이제 어른스러울 정돌 거 같아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1-2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크긴 했어요, chaire님. 반항도 하고, 우기기도 하고... 이제 슬슬 걱정이 돼요. 나중에 대화 안 되는 엄마가 될까봐요. 근데 뭐 드러낼 만한 사진이 있어야죠, 열심히 찍어주는 엄마가 아니라서. ^^

반딧불,, 2007-02-0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법은 연습해도 깡그리 잊어요.
아무리 많이 공부를 해도 모르겠구요. 아이를 키우면서 참으로 많이 생각합니다.
아이가 나를 키운다는 것을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2-02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딧불님, 정말 반가워요! 아이가 절 키운다고 생각될 때가 많긴 한데요, 그걸 잘 잊어먹기도 잘해요. 버럭, 발끈, 화낼 땐 제가 미워죽겠어요...
 

거룩한 계보가 한참 진행이 됐지만, 그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 영화에서 가장 대중성이 높은 배우인 정준호가 맡은 배역인데도. 그는 조금 딸리는 사람이다. 주먹으로 먹고 사는 깡패인데 그 중요한 주먹이 앞서 큰집에 들어간 친구들보다 약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는 형님 옆에 남았다. 오른팔 치성이 큰 과업을 업고 큰집에 들어가자 그는 형님의 오른팔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형님은 그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왼손잡이여. 자기 자리는 살아남았어도 여전히 흔들리고, 그 명실상부한 오른팔 치성에게 형님은 등을 돌린다. 우정과 충성은 그를 마냥 미약한 존재로 누른다.

큰집에서 뛰쳐나온 치성과 또다른 친구 순탄은 쇠파이프 앞에서도 휙휙 날아다닌다. 그는 충성을 선택하고 주먹을 휘두르려는데 그의 주먹은 치성의 옷자락에도 스치지 못한다. 되려 치성의 주먹은 그의 몸에서 퍽퍽 소리를 낸다. 그는 왜 꺼져가는 충성을 붙잡고 안간힘을 쓸까. 아니, 깡패의 세계에선 의리고 뭐고 없다는데 그는 왜 우정을 붙잡고 죽어갈까.

거룩한 계보의 끄트머리가 되어서야 그는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냈다. 순전히 관객의 의문으로 자생되는 인물이다. 그건 흥미롭게도 정준호라는 배우와 맞물려서 생겼다. 저 배우는 왜 저(딴) 배역을 맡았을까. 눈빛과 주먹, 게다가 발차기까지 빛나는 정재영의 배역 맞은편에서 그는 힘을 쓰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배역을 맡은 정준호가 다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존재감은 혼자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었다. 관객이 만들어내는 의문이 그의 자리를 만들어 그 안에서 그가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왜, 라는 의문. 혹은 쟤 뭐야, 라는 의문.

영화 속 인물에 대한 호감도는 떨어지지만 어쨌거나 그는 나와 가깝다. (주먹에) 딸리고, (선택에) 우유부단하고, (진정 오른팔에 되려면 눈물이 말라야 하지만) 쓸데없이 유약하다. 채워 있는 부분보다 비어 있는 부분이 많아서 의문을 던지고 되받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의 영화 속 자리는 명실상부한 정재영의 맞은편이 되었다. 자리는, 의문과 회의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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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7-01-13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가슴을 칩니다.
(건강하신거죠??)

내가없는 이 안 2007-01-15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님도 건강하신 거죠?

icaru 2007-01-1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제야 글을 보았을꼬~
음, 비단 정준호 뿐이겠나요~ 이안 님 뿐이겠나요~
그래서, 스스로 끊임없이 존재의 이유를 물어가며 살아야 하나봐요. 그리고 조금더, 조금더 뻔뻔해지자! 고 채근하고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흣..

잉크냄새 2007-01-16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워있는 부분과 비어있는 부분이 만나는 분기점은 어디일까요. 전 왠지 그 분기점을 지나 자꾸 비어가는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채워져야 하는데 젊은날보다 오히려 비어가는것 같으니....이걸 참...우짜쓰까잉~~

내가없는 이 안 2007-01-17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caru님, 조금 더 뻔뻔해지자, 는 말 필요하긴 해요. 나이들면서 둔감해진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닌가봐요. ^^

잉크냄새님, 은 뭘 채우고 뭘 비우실까 괜히 궁금한데요. ^^

2007-01-18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aire 2007-01-2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볼 생각이 없었는데, 보고 싶어지네요. 메모해둬야겠어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1-2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폭 영화, 라는 말 때문에 좀 그렇죠. 이런 이야기를 조폭 빼고는 어떻게 만들어볼 수 없을까, 좀 생각해봤더랬어요. 그런데 chaire님... 잘 계신 거죠?

2007-01-23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안경이 부예졌다. 부엉이 같은 얼굴로 나서고 싶지 않아 얼른 안경을 빼들었다. 호주머니에서 휴지 한 장을 꺼내 부랴부랴 닦았다. 그때 앞에 섰던 동생이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이었고, 나는 계단 아래서 올려다볼 사람들의 눈을 생각했다. 마치 무조건반사처럼 동생을 따라 계단을 내려섰다. 눈을 손에 빼들었으니 걸음을 멈춰야 할 텐데, 다리는 생각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다리가 움직이고 나서야 아뿔싸, 다리의 섣부른 반응을 깨달았다. 다리가 원래의 보폭을 관습처럼 따르기만 해도 별 문제는 없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저장된 보폭만 움직이면 된다.

하지만 다리는 기대에 어긋났다. 기억된 보폭을 잊고 순간 희끄무레한 시야를 받아들였다. 다리가 부웅 하고 큰 보폭으로 계단을 내려섰고, 몸체는 덩달아 흔들렸다. 그런 순간에는 우스꽝스럽게도 점을 친다. 넘어질까, 균형을 잡을까. 1초도 안 되는 미미한 순간에는 강한 의지보다는 순진한 순발력이 강하게 작용할지도. 넘어지지 않겠다는 의지와 잽한 균형감각 중에 나는 뭘 가졌을까. 나는 의지가 굳건한 사람일까, 순발력이 민첩한 사람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는, 차라리 강한 의지에 손을 들어준다. 물론 명백한 양자택일에 섰을 때만 그렇다. 순발력이란 게 몸 어딘가에 박혔다고 자신했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의지라는 게 어느 구석에 박혔나 훑어볼 만큼 단단하게 살아오지도 못했다. 슬그머니 의지 쪽에 손을 든 건, 일종의 열등감이다. 의지는 욕심이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순발력은 욕심과 상관없이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내겐 주지 않았냐고, 원망하는 일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 대신 처음부터 내겐 없는 거라 밀어두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점을 친다 해도 별로 적중률과는 상관없는 결과물이기 쉽다. 올해들어 처음으로 점치는 사람 앞에 앉아보았다. 반쯤은 재미, 라고 쓰려다가 생각해보니 사실 재미가 다였다. 마트에서 어쩌다가 쥐게 된 할인쿠폰으로 내 옆사람의 운세를 물었다. 그는 올해 새로운 일을 모색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의지를 적당히 숨긴 채 그는 앉았고, 나는 키득거렸다. 그런데 별안간 까만 어둠 앞에 선 듯한 느낌에 휘감겼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숨겨진 불빛을 하나하나 끌어냈다. 여기는 아니고, 여기서 운이 풀려, 라는 말 한마디는 어딘가 구겨져 들어가 있던 불빛을 꺼내가지고 나왔다. 점은, 묘했다. 손을 동그랗게 말고 여기 불빛이 있어, 라며 허상의 불빛을 만들어내는 것인지, 실제 궁둥이 아래 깔렸던 불빛을 한쪽 궁둥이 들어올려 꺼내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우리는 그때 캄캄함 속에 불빛을 끌어오는 작업에 몰두한 사람들처럼 머리를 모았다. 그렇다고 반딧불이처럼 희미하게 깜박대는 불빛을 가슴에 고이 안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둘 다 큭큭 웃으며 거봐, 내가 뭐랬어, 같은 하나마나한 소리를 주고받았다.

계단 위에서 휘청거린 결과, 나는 우습게도 순발력 잽싼 사람처럼 균형을 잡았다. 거기서 넘어졌더라면 발목이 무사하지 않았을 것이고, 계단 아래 있던 사람들은 어이없는 사고를 지켜봤을 것이다. 게다가 안경만큼은 놓치지 않겠다며 손아귀에 꼭 쥐어 부러뜨리고 말았을지도. 하여, 새해엔 기대하지 않던 순발력을 내 몸 어딘가에서 찾았다. 강한 의지라는 건 욕심이 있으면 얻게 마련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렇다면 순발력까지 낚은 셈.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에서는 차를 슬슬 몰아야 했다. 어둠을 길들이고 방향감각을 살린다. 라이트를 번쩍거린다. 있는 빛, 없는 빛, 다 끌어내면서 길을 간다. 엄한 논바닥에 굴러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디쯤 짚히는 구석이 있는 의지도 잡아내고, 어딘가 박혔을지 모를 순발력도 끄집어낸다. 가끔은 허상의 불빛도 빛으로 만들 재주가 있으면 그렇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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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1-08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무래도 길운이신 듯 하긴 하지만. *^^*

chika 2007-01-0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복많이 받으세요..(조선인님 따라하기;;;;;)

프레이야 2007-01-08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발력, 상당히 중요한 힘이에요^^ 좋은 징조네요..

chaire 2007-01-08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열심히 살겠다, 는 말씀이시지요?^^ 새해를 여는 데 어울리는, 참 멋진 글이에요. 점쟁이 앞에 앉아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두려워서요) 한번 가볼까 싶어지는군요. 저에게도 어딘가 빛의 구멍이 있으려나요?

icaru 2007-01-11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 보러 시골길을 차로 몰아 다녀오셨군요~ 부군 님하고요~ 와아..재밌었겠다. 운세는 재미만으로 보는 게 아니지만 ^^
있는 빛 없는 빛 끌어내면서... 란 표현~ 굉장히 기운차게 들려요!! 제 속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무엇... 저도 그것의 존재를 어느 순간 득(得할) 날이 오겠죠?

2007-01-08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7-01-08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우겨서 길운이에요. ^^ 덕담 고마워요. 마로랑 해람이랑 조선인님도 행복한 한해가 되시길요.

치카님, 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도 따라하기 *^^*) 올해엔 책 말고 밥도 잘 챙겨드세요. ^^

혜경님, 좋은 징조 맞겠죠? 인대가 쓸데없이 잘 늘어나는 발목을 달고 다니는 터라 혼자서 십년감수, 했어요. ^^

카이레님, 저도 그 비슷한 이유로 한 번도 없다는. 제 안에 들어있는 분량이 조금 투명하게 보여서 확인사살이 아닐까 싶은 거죠. ^^ 이번엔 제 운을 물어보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냥 재미로, 사실은 그 앞에 앉으면 어떤 심정일까 궁금해서요. 근데 빛의 구멍, 가슴에 부딪히는 말이네요. 그런 게 있담 저도 잘 찾지 못하는데. 그거, 있음과 없음이 아니라 찾음과 못 찾음일 거라 굳건히 생각하기로...

이카루님, 댓글 덕분에 제가 무진장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는걸요. 점을 보고 싶어서 시골길로 찾아들어갈 바지런함은 없는데. ^^ 마트에서 계산을 치르니까 할인쿠폰을 집어줬고, 바로 앞에 점치는 활달한 아줌마가 있더라는 얘기죠. 시골길 얘긴 좀 뜬금없었나 봐요. 몇해 전 아득하게 까맸던 시골길이 왠지 캄캄한 운명길처럼 떠올라서 써본 건데. ^^

속삭인 님, 그 사연 말이죠, 정말 많은 추측을 하게 해요. 제 주변에도 그런 인물이 있어서, 왜 그런 구도가 만들어졌을까 혼자 생각도 해봤어요. 님 리뷰 읽으면서요. 근데 님은, 생활이 다소 팍팍해지더라도 삶은 더 풍성해지실 듯싶은데. 안 그래요? ^^

반딧불,, 2007-01-0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상의 불빛을 빛으로 만드는 재주라..참으로 부럽습니다.
로또나 되어라 하면서 로또 안사고 있어요.ㅎㅎㅎ
자자, 좋은 일 많은 한 해 되셔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1-10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로또보다 더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보죠. 저도 로또는 한 번도 산 적이 없어요. 벼락 같은 돈이 떨어진다는 상상, 이상하게도 상상조차 할 수 없네요. 역시 상상력 부족. ^^ 님도, 즐거운 한해가 되세요!
 

_선물받고 싶은 것

아이가 베란다 유리에 코를 박고 섰다.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뭔가를 속삭였다.
뭐했니, 라고 묻자 산타 할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어서, 라고 말했다.
"선물을 받고 싶다고 말했구나. 뭘 갖고 싶은데?"
"강아지나 고양이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상자 안에 살아있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넣기는 좀 그렇지 않니?"
"..."
"그것 말고는 없니?"
"...동생?"
아이가 속삭이듯 묻고는 겸연쩍게 웃었다.
장난이지만 무작정 허투루하는 장난은 아니었다.
웃음에 살짝 바람이 묻어났다.

_조카는 아직 남녀를 구별할 줄 모른다.

어쩌다가 얼결에 남녀 구별을 고추의 있음과 없음으로 알려주고 말았다, 고 했다.
그때부터 조카는 궁금한 게 산더미처럼 많아졌다.
"엄마는 고추 있어요? 아빠는요? 할머니는? 이모는? 이모부는? 고모는? 목사님은요? 사모님은요?"
주위에서 봐온 사람얼굴 가진 모든 이를 물어댔다.
그러다가 조금 더 확장되어 주변의 모든 동식물의 성별이 궁금해졌다.
"강아지는요? 오리는요?"
그만하라고 엄마가 주의를 주자, 조카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진지하게 물었다, 고 했다.
질문을 귀찮아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다.
"스탠드는요? 휴지는?"
지금 이 아이에게는 고추가 세상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 되었다.

우리 아이도 지금 만 세돌이 된 조카만한 나이에 그런 놀라움을 겪었다.
"할머니가 정말 여자였어요?"
할아버지가 없는 아이에게는 할머니가 남녀의 구별을 뛰어넘는 존재였다.
그래서 할머니가 새삼 여자'였냐고' 물었다.
질문이 묘했다. 여자예요, 가 아니라 여자였어요, 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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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12-2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를 어째....할머님,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요?

icaru 2006-12-2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아버지가 없는 아이에게는 할머니가 남녀의 구별을 뛰어넘는 존재.. ㅋㅋ
히고야... 고추란 게 뭔지~ ㅋㅋ

동생을 바라는 아이의 마음~ '동생'을 고양이나 강아지 다음으로 말한 것은, 엄마를 난감하게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버티었다가 한 대답이었기 때문일까요... 앙... 그 마음을 어이 하리오...

2006-12-21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aire 2006-12-21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이 나이 먹은 제가 생각해도, 남자와 여자를 '구별'한다, 는 게 참 어려운 개념이잖아요. 결국 우리는 생물학적 구별이 가장 간편하고 그걸 위해 또 가장 간편한 방식으로 '고추'를 용례로 사용하지만, 그게 또 아이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냐고요.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당한 것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지당한 것'이 되었는가 새삼 신기하고 의문스럽습니다. 조카 아이가 어떤 식으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나갈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하하. (그 구별이란 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닌 듯하지만 :)

속닥, 둘째 낳으세요. 크리스마스 선물로다가..=3=3=3

내가없는 이 안 2006-12-2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글쎄요, 저희끼리 살살 말하면서 웃어서 기억하실는지. ^^ 저야 아직 의젓한 어른이 아니라서 조금 띵했을 것도 같은데.

이카루님, 어쩌다 보니 할아버지가 한 분도 안 계세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그림책에서 당연히 가져오게 되었더라고요. 어느 날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니까 글쎄 주변머리만 남은 할아버지가 있더군요.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은 머리숱이 다들 많으셨던 것 같은데. ^^

카이레님> 그런 갖가지 구별을 깨쳐나간다는 게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짐작이 가요. 좀 살았다고 하는 어른들도 자기가 모르는 세계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드니까요. 반면에 지당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지당하게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명확한 선입견도 문제잖아요. 아이의 미술 수업에 이런 게 있었어요. 빗소리를 한참 들려주고 나서 그림으로 그리자, 고 그랬대요. 어린 아이들은 이의 없이 그림으로 그리지만 7세쯤 된 아이들은 그걸 어떻게 그려요, 라고 반문하더라죠. 소리는 소리일 뿐, 이라고 생각하다니 어찌나 아쉽던지요.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렇게 거한 걸 어떻게. ^^ 카이레님 얼굴 보러 가야겠는데요. 크리스마스 맞이인가요?

2006-12-22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26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26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28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02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7-01-03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잘해내실 거라 믿어요. 좋은 소식을 들어서 저도 기분 좋은데요! ^^

향기로운 2007-02-02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의 상상력은 어른의 사고 이상을 훨씬 뛰어넘으니까요^^ 아마도 어른들은 나이가 들면서 잊어버리게 되었을테지만 아이가 갖고 있는 순수함은 오래오래 간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귀여워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2-0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기로운님, 아이한테 상상력을 배워요. 상상력은 휘발성이 강한가 봐요. 크면서 사라지는 걸 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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