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선물받고 싶은 것

아이가 베란다 유리에 코를 박고 섰다.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뭔가를 속삭였다.
뭐했니, 라고 묻자 산타 할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어서, 라고 말했다.
"선물을 받고 싶다고 말했구나. 뭘 갖고 싶은데?"
"강아지나 고양이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상자 안에 살아있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넣기는 좀 그렇지 않니?"
"..."
"그것 말고는 없니?"
"...동생?"
아이가 속삭이듯 묻고는 겸연쩍게 웃었다.
장난이지만 무작정 허투루하는 장난은 아니었다.
웃음에 살짝 바람이 묻어났다.

_조카는 아직 남녀를 구별할 줄 모른다.

어쩌다가 얼결에 남녀 구별을 고추의 있음과 없음으로 알려주고 말았다, 고 했다.
그때부터 조카는 궁금한 게 산더미처럼 많아졌다.
"엄마는 고추 있어요? 아빠는요? 할머니는? 이모는? 이모부는? 고모는? 목사님은요? 사모님은요?"
주위에서 봐온 사람얼굴 가진 모든 이를 물어댔다.
그러다가 조금 더 확장되어 주변의 모든 동식물의 성별이 궁금해졌다.
"강아지는요? 오리는요?"
그만하라고 엄마가 주의를 주자, 조카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진지하게 물었다, 고 했다.
질문을 귀찮아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다.
"스탠드는요? 휴지는?"
지금 이 아이에게는 고추가 세상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 되었다.

우리 아이도 지금 만 세돌이 된 조카만한 나이에 그런 놀라움을 겪었다.
"할머니가 정말 여자였어요?"
할아버지가 없는 아이에게는 할머니가 남녀의 구별을 뛰어넘는 존재였다.
그래서 할머니가 새삼 여자'였냐고' 물었다.
질문이 묘했다. 여자예요, 가 아니라 여자였어요, 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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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12-21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를 어째....할머님,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요?

icaru 2006-12-2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아버지가 없는 아이에게는 할머니가 남녀의 구별을 뛰어넘는 존재.. ㅋㅋ
히고야... 고추란 게 뭔지~ ㅋㅋ

동생을 바라는 아이의 마음~ '동생'을 고양이나 강아지 다음으로 말한 것은, 엄마를 난감하게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버티었다가 한 대답이었기 때문일까요... 앙... 그 마음을 어이 하리오...

2006-12-21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aire 2006-12-21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이 나이 먹은 제가 생각해도, 남자와 여자를 '구별'한다, 는 게 참 어려운 개념이잖아요. 결국 우리는 생물학적 구별이 가장 간편하고 그걸 위해 또 가장 간편한 방식으로 '고추'를 용례로 사용하지만, 그게 또 아이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냐고요.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당한 것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지당한 것'이 되었는가 새삼 신기하고 의문스럽습니다. 조카 아이가 어떤 식으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해나갈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하하. (그 구별이란 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닌 듯하지만 :)

속닥, 둘째 낳으세요. 크리스마스 선물로다가..=3=3=3

내가없는 이 안 2006-12-2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글쎄요, 저희끼리 살살 말하면서 웃어서 기억하실는지. ^^ 저야 아직 의젓한 어른이 아니라서 조금 띵했을 것도 같은데.

이카루님, 어쩌다 보니 할아버지가 한 분도 안 계세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그림책에서 당연히 가져오게 되었더라고요. 어느 날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니까 글쎄 주변머리만 남은 할아버지가 있더군요.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은 머리숱이 다들 많으셨던 것 같은데. ^^

카이레님> 그런 갖가지 구별을 깨쳐나간다는 게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짐작이 가요. 좀 살았다고 하는 어른들도 자기가 모르는 세계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드니까요. 반면에 지당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지당하게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명확한 선입견도 문제잖아요. 아이의 미술 수업에 이런 게 있었어요. 빗소리를 한참 들려주고 나서 그림으로 그리자, 고 그랬대요. 어린 아이들은 이의 없이 그림으로 그리지만 7세쯤 된 아이들은 그걸 어떻게 그려요, 라고 반문하더라죠. 소리는 소리일 뿐, 이라고 생각하다니 어찌나 아쉽던지요.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렇게 거한 걸 어떻게. ^^ 카이레님 얼굴 보러 가야겠는데요. 크리스마스 맞이인가요?

2006-12-22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26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26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28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02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7-01-03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잘해내실 거라 믿어요. 좋은 소식을 들어서 저도 기분 좋은데요! ^^

향기로운 2007-02-02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의 상상력은 어른의 사고 이상을 훨씬 뛰어넘으니까요^^ 아마도 어른들은 나이가 들면서 잊어버리게 되었을테지만 아이가 갖고 있는 순수함은 오래오래 간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귀여워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2-0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기로운님, 아이한테 상상력을 배워요. 상상력은 휘발성이 강한가 봐요. 크면서 사라지는 걸 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