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들어서자 안경이 부예졌다. 부엉이 같은 얼굴로 나서고 싶지 않아 얼른 안경을 빼들었다. 호주머니에서 휴지 한 장을 꺼내 부랴부랴 닦았다. 그때 앞에 섰던 동생이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이었고, 나는 계단 아래서 올려다볼 사람들의 눈을 생각했다. 마치 무조건반사처럼 동생을 따라 계단을 내려섰다. 눈을 손에 빼들었으니 걸음을 멈춰야 할 텐데, 다리는 생각을 미처 따라가지 못했다. 다리가 움직이고 나서야 아뿔싸, 다리의 섣부른 반응을 깨달았다. 다리가 원래의 보폭을 관습처럼 따르기만 해도 별 문제는 없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저장된 보폭만 움직이면 된다.

하지만 다리는 기대에 어긋났다. 기억된 보폭을 잊고 순간 희끄무레한 시야를 받아들였다. 다리가 부웅 하고 큰 보폭으로 계단을 내려섰고, 몸체는 덩달아 흔들렸다. 그런 순간에는 우스꽝스럽게도 점을 친다. 넘어질까, 균형을 잡을까. 1초도 안 되는 미미한 순간에는 강한 의지보다는 순진한 순발력이 강하게 작용할지도. 넘어지지 않겠다는 의지와 잽한 균형감각 중에 나는 뭘 가졌을까. 나는 의지가 굳건한 사람일까, 순발력이 민첩한 사람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는, 차라리 강한 의지에 손을 들어준다. 물론 명백한 양자택일에 섰을 때만 그렇다. 순발력이란 게 몸 어딘가에 박혔다고 자신했던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의지라는 게 어느 구석에 박혔나 훑어볼 만큼 단단하게 살아오지도 못했다. 슬그머니 의지 쪽에 손을 든 건, 일종의 열등감이다. 의지는 욕심이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순발력은 욕심과 상관없이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내겐 주지 않았냐고, 원망하는 일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 대신 처음부터 내겐 없는 거라 밀어두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점을 친다 해도 별로 적중률과는 상관없는 결과물이기 쉽다. 올해들어 처음으로 점치는 사람 앞에 앉아보았다. 반쯤은 재미, 라고 쓰려다가 생각해보니 사실 재미가 다였다. 마트에서 어쩌다가 쥐게 된 할인쿠폰으로 내 옆사람의 운세를 물었다. 그는 올해 새로운 일을 모색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의지를 적당히 숨긴 채 그는 앉았고, 나는 키득거렸다. 그런데 별안간 까만 어둠 앞에 선 듯한 느낌에 휘감겼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숨겨진 불빛을 하나하나 끌어냈다. 여기는 아니고, 여기서 운이 풀려, 라는 말 한마디는 어딘가 구겨져 들어가 있던 불빛을 꺼내가지고 나왔다. 점은, 묘했다. 손을 동그랗게 말고 여기 불빛이 있어, 라며 허상의 불빛을 만들어내는 것인지, 실제 궁둥이 아래 깔렸던 불빛을 한쪽 궁둥이 들어올려 꺼내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우리는 그때 캄캄함 속에 불빛을 끌어오는 작업에 몰두한 사람들처럼 머리를 모았다. 그렇다고 반딧불이처럼 희미하게 깜박대는 불빛을 가슴에 고이 안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둘 다 큭큭 웃으며 거봐, 내가 뭐랬어, 같은 하나마나한 소리를 주고받았다.

계단 위에서 휘청거린 결과, 나는 우습게도 순발력 잽싼 사람처럼 균형을 잡았다. 거기서 넘어졌더라면 발목이 무사하지 않았을 것이고, 계단 아래 있던 사람들은 어이없는 사고를 지켜봤을 것이다. 게다가 안경만큼은 놓치지 않겠다며 손아귀에 꼭 쥐어 부러뜨리고 말았을지도. 하여, 새해엔 기대하지 않던 순발력을 내 몸 어딘가에서 찾았다. 강한 의지라는 건 욕심이 있으면 얻게 마련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렇다면 순발력까지 낚은 셈.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에서는 차를 슬슬 몰아야 했다. 어둠을 길들이고 방향감각을 살린다. 라이트를 번쩍거린다. 있는 빛, 없는 빛, 다 끌어내면서 길을 간다. 엄한 논바닥에 굴러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디쯤 짚히는 구석이 있는 의지도 잡아내고, 어딘가 박혔을지 모를 순발력도 끄집어낸다. 가끔은 허상의 불빛도 빛으로 만들 재주가 있으면 그렇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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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7-01-08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무래도 길운이신 듯 하긴 하지만. *^^*

chika 2007-01-0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복많이 받으세요..(조선인님 따라하기;;;;;)

프레이야 2007-01-08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발력, 상당히 중요한 힘이에요^^ 좋은 징조네요..

chaire 2007-01-08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열심히 살겠다, 는 말씀이시지요?^^ 새해를 여는 데 어울리는, 참 멋진 글이에요. 점쟁이 앞에 앉아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두려워서요) 한번 가볼까 싶어지는군요. 저에게도 어딘가 빛의 구멍이 있으려나요?

icaru 2007-01-11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 보러 시골길을 차로 몰아 다녀오셨군요~ 부군 님하고요~ 와아..재밌었겠다. 운세는 재미만으로 보는 게 아니지만 ^^
있는 빛 없는 빛 끌어내면서... 란 표현~ 굉장히 기운차게 들려요!! 제 속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무엇... 저도 그것의 존재를 어느 순간 득(得할) 날이 오겠죠?

2007-01-08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7-01-08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우겨서 길운이에요. ^^ 덕담 고마워요. 마로랑 해람이랑 조선인님도 행복한 한해가 되시길요.

치카님, 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도 따라하기 *^^*) 올해엔 책 말고 밥도 잘 챙겨드세요. ^^

혜경님, 좋은 징조 맞겠죠? 인대가 쓸데없이 잘 늘어나는 발목을 달고 다니는 터라 혼자서 십년감수, 했어요. ^^

카이레님, 저도 그 비슷한 이유로 한 번도 없다는. 제 안에 들어있는 분량이 조금 투명하게 보여서 확인사살이 아닐까 싶은 거죠. ^^ 이번엔 제 운을 물어보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냥 재미로, 사실은 그 앞에 앉으면 어떤 심정일까 궁금해서요. 근데 빛의 구멍, 가슴에 부딪히는 말이네요. 그런 게 있담 저도 잘 찾지 못하는데. 그거, 있음과 없음이 아니라 찾음과 못 찾음일 거라 굳건히 생각하기로...

이카루님, 댓글 덕분에 제가 무진장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는걸요. 점을 보고 싶어서 시골길로 찾아들어갈 바지런함은 없는데. ^^ 마트에서 계산을 치르니까 할인쿠폰을 집어줬고, 바로 앞에 점치는 활달한 아줌마가 있더라는 얘기죠. 시골길 얘긴 좀 뜬금없었나 봐요. 몇해 전 아득하게 까맸던 시골길이 왠지 캄캄한 운명길처럼 떠올라서 써본 건데. ^^

속삭인 님, 그 사연 말이죠, 정말 많은 추측을 하게 해요. 제 주변에도 그런 인물이 있어서, 왜 그런 구도가 만들어졌을까 혼자 생각도 해봤어요. 님 리뷰 읽으면서요. 근데 님은, 생활이 다소 팍팍해지더라도 삶은 더 풍성해지실 듯싶은데. 안 그래요? ^^

반딧불,, 2007-01-0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상의 불빛을 빛으로 만드는 재주라..참으로 부럽습니다.
로또나 되어라 하면서 로또 안사고 있어요.ㅎㅎㅎ
자자, 좋은 일 많은 한 해 되셔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1-10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로또보다 더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보죠. 저도 로또는 한 번도 산 적이 없어요. 벼락 같은 돈이 떨어진다는 상상, 이상하게도 상상조차 할 수 없네요. 역시 상상력 부족. ^^ 님도, 즐거운 한해가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