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름 모를 선인장을 하나 가꾸고 있다, 고 시작하려니 왠지 불성실한 사람 같다. 어느 작가는 이름 모를 꽃이 어쩌고, 하지 말랬다. 제대로 알고 쓰라는 말일 텐데, 이름 모를 꽃도 나름 낭만적(!)이지 않을까. 알지도 못하면서 기분만 내는 이름 모를 꽃, 은 설득력이 없겠지만, 여하튼 집에서 물 주고 키우는 선인장 이름을 모른다. 잎 하나 똑 떼어준 걸 집에서 노는 화분에 꽂았더니 저 혼자서 장성해진 터라.

이 선인장은 잎에서 잎이 나오는 방식으로 제 몸을 불린다. 그렇게 마냥 길어지는 줄 알았는데 며칠 전 작은 잎이 아니라 작은 봉오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놈이 뭐가 될까, 싶어서 매일같이 들여다보았다. 아닌게아니라, 정말 봉오리였다. 분홍빛 봉오리가 봉긋해지더니 몸매도 날렵하게 쭉쭉 길어졌다. 날이 갈수록 궁금증이 더했다. 관객이 빈 손으로야 볼 수 없어 때 되면 아차차 물! 하고 부어주고 아차차 햇빛 나네! 하고 옮겨주었다. 무심한 주인이 간만에 방정을 떤다 싶을 만큼 정성을 들였다.

마침내 뾰족해진 봉오리가 하나씩 잎을 열었다. 잎은 파도타기를 제대로 연습한 응원단처럼 열렸다. 자기제어능력이 도드라진 녀석이었다. 어느 잎 하나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차례로 열렸다. 어느 날 암술과 수술을 다 드러내고 이제 됐수, 하는 듯 화려해진 자태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잘했어, 이름 모를 선인장!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하나씩 잎을 접고 서서히 시들어갔다. 이제 끝났구나, 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더니 뜻밖에도 연둣빛이 만연하다. 잎에서 잎이 나서 맨 끝에 태어난 잎이 오동통하게 살이 쪄 있다. 어린 잎. 이유도 없이 가슴이 뜨듯해졌다.

어제 아이가 피아노 앞에서 끙끙거렸다. 제목은, 아기 코끼리의 걸음마. 왼손은 스타카토, 오른손은 이음줄과 스타카토가 뒤섞였다. 왼손과 오른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고, 그나마 오른손은 박자마저 속을 썩인다. 붓점이 하나 붙는 바람에 나머지 팔분음표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이런 악보는 듣는 사람은 재밌고 연주하는 사람은 골탕을 먹는다. 붓점이 연이어서 붙었다면 리듬을 탈 수 있지만 딱 한 번만 붙으면 춤을 추다가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해야 하는 연주가 된다. 아이가 해낼 수 있을까.

아이가 작정을 한 듯이 연습을 했다. 서툰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널을 뛰었다. 제목마저도 아기 코끼리의 걸음마! 아이의 작은 어깨가 아기 코끼리의 부드러운 등허리처럼 보였다. 나는 끙끙거리는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린 코끼리 같은 어린 아이.

어린 것은 왜 예쁠까. 내가 더는 어린 것이 아니라서일 수도 있겠다. 아님 모든 살아있는 것의 어린 것은 생태적으로 예쁘기 때문일 수도. 아닌가? 12월 첫날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영엄마 2006-12-0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우아한 자태가 느껴지게 쓰시는 이안님~ 님 정성덕분에 이름 모를 선인장이 잘 자라고 있군요. ^^ 글을 통해 아이가 피아노 연습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울 애들은 열의가 없어서 하는 둥 마는 둥...ㅡㅜ) 음.. 저도 아직 어리니 예쁘게 봐주세요~~=3=3=3

2006-12-01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aire 2006-12-0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 모를 선인장!, 이라고 적으신 부분에서 저도 그만 감탄사를 쏟아냈어요. 이름 모를 선인장, 이 곧 그 어린 식물의 이름 같군요.(잘난 소설가님들이야 뭐라든 흥!)
선인장도 님의 아이도 참 어여쁩니다. 그 어여쁜 아이의 어깨에 손 얹어주는 엄마도 어여쁩니다. 배시시 ^___^

2006-12-01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6-12-01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어디 우아한 자태가 있어요? ^^ 아이들마다 좋아하는 게 다른 듯해요. 다른 꼬마들은 태권도복을 부러워들 한다던데 이 꼬마는 하나도 안 부럽다네요. 전 우렁차게 기합도 넣어가면서 휙휙 날아다니는 게 그렇게 부럽더만 아무리 꼬셔도 안 넘어가요. ^^ 아영이 태권도복이 부럽던데 말이죠.

속삭인 님> 그러실 줄 알았죠. 앞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계속 일어날 걸요. 다 얘기해주세요. 사진도 올려주시고. 같이 기뻐해드릴 테니. 그집 꼬마 듬직해서 그럴 줄 알았어요. ^^
피아노는요, 한 손씩만 조율할 수 있다가 양손을 동시에 따로따로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요. 그게 딱 보이는 지점이 너무 기특하고 예뻐요. 하지만 뭐든 재미있어야 하잖아요. 피아노가 지루하기만 하다면, 아무리 좋다 해도 다른 걸로 바꿔줘야겠죠. ^^

카이레님>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제목을 이름 모를 선인장이라고 붙이는 건데! 그래도 산에 오르면 참 답답해요. 이게 무슨 꽃일까 무슨 나무일까 또 무슨 곤충일까. 우리끼리는 그런 얘길 하죠. 딱 갖다대면 이름이 나오는 센서가 부착된 뭔가를 발명해야 하는 거 아냐, 하면서요. ^^

속삭인 님> 왓! 저도 반가워요. 사실 님 서재가 제 즐겨찾기가 이미 들어가 있다는 거 모르셨죠? 우연히 알게 됐고요, 여기 올 때마다 슬며시 들어갔다가 나오고 그랬어요. 저요, 그간 소심증이 엄청 심해졌답니다. 서재로 갈게요!

반딧불,, 2006-12-0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그렇듯이 퐁당 빠지게 하는 글입니다.
맞아요. 어린 것들은 어찌 그리도 어여쁜지...^^

내가없는 이 안 2006-12-02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우리도 그런 소리 자주 하잖아요. 어릴 땐 예뻤는데 어쩌고. ^^ 사실은 12월 첫날이라서 조금 쓸쓸했다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쓴 거랍니다. 헤헤.

icaru 2006-12-20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한진아파트 사시는거죠?

향기로운 2007-02-0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건 다 이쁘죠..^^ 아이가 연주하는 '아기 코끼리 걸음마' 들음 고개가 끄덕거려지거나 미소가 번질 것 같아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2-0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기로운님, 곡의 제목이 공교롭게도 뚱땅거리는 아이의 피아노와 잘 맞아떨어졌죠 뭐. ^^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