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국수를 끓였다. 조그맣게 한줌, 넣었다가 다시 또 한줌을 넣었다. 그가 원하는 국수의 양은 밥의 두세 배쯤 된다. 내딴에는 양껏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원망섞인 소리나 듣는다. 내 양을 아직도 몰라. 이쯤 되면 두말 않겠지 하고 빳빳한 국수를 풍덩 넣었다.

국수는 묘하게 끓는다. 공기 중에서는 약간의 힘만 받아도 똑똑 부러지는 것이 끓는 물에 들어가선 맥없이 무릎을 꿇는다. 폴싹 주저앉은 국수를 보면 약간 쓸쓸할 때도 있다. 겉으로는 의기양양한 체해도 금세 풀죽는 누구(누구긴, 나지)와 닮았다. 맥없어진 국수는 물밑에서 열심히 타래를 만든다. 하얀 실타래가 덩쿨덩쿨 솟아오르기 직전이다. 어릴 적엔 이런 실타래를 손에 끼고 할머니가 실을 감았더랬지. 나는 하얀 실타래에 냉정하게 찬물을 한 컵 부었다. 말갛지 못한 하얀 거품을 팔팔 일으키던 국수는 다시 주저앉았다. 이번에 부글거릴 때는 실타래의 색이 바뀌었다. 투명한 실이 저절로 감아오르며 일어올랐다.

국수를 찬물에 헹구고 보드라워진 면발을 그릇에 담았다. 그는 독한 술이 한 차례 훑고 지나간 속에 면발을 집어넣는다. 나는 그가 국수를 먹을 때마다 궁금해진다. 저 국수는 어디로 들어갈까, 하고. 그는 국수를 먹는 게 아니라 속에 쏟아붓는다. 이는 있어도 면발을 끓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그다지 잘게 부서지지 못한 면들은 꿀떡꿀떡 소리까지 내며 쏟아져 들어가는데 대체 어디로?

그는 면이 들어가는 데가 따로 있는 듯해, 라고 말했다. 그의 속이 분명한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속이 있다는 건가. 그러고 보면 사람의 속은 참 신기해, 라고 나는 말했다.

어제 점심때가 한참 지났지만 라면을 끓였다. 내가 혼자 라면을 끓이는 일은 거의 없는데도. 허기가 졌다. 점심 무렵 빵으로 끼니를 해결했지만 속이 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고프다는 것보다는 속이 비었다, 는 표현이 옳을 텐데 그걸 채워야 하는지 잠깐 망설이기도 했다. 생각이 오만군데로 흐트러지고 주워담을 수가 없었다. 속이 비어서 그런 거야, 하지만 내 빈 속보다 빈 머리를 걱정했다. 빈 속에 라면 반 개쯤 채우면 빈 머리를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라면을 먹었고, 조금 더 앉았지만 머리는 채워지지 못했다. 역시 판단력 부족이다. 하는 수 없이 책을 읽었는데 새벽녁쯤 덮은 소설이 자꾸만 생각났다. 설국의 고마코가 한 말이 맴돌았다. 괜찮아요, 어디서든 일할 수 있으니까. 징징거리지 않아요. 헛수고, 라는 말을 나는 거듭 썼는데 내 헛수고는, 내 빈 속은,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헛된 곤충의 죽음마저 소설 속의 그는 아름답다, 했는데.

아침에 국수를 끓였고, 역시 빈 속에 나도 그것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속이 채워지지 않아서 평소에 마시던 블랙커피가 아니라 하얀 프림과 설탕이 한움큼 들어간 커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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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02-02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저녁 국수사리에 골뱅이무침 먹었슴다! (그래서?*&*)()

2007-02-02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랑비 2007-02-0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에, 빈 속에 라면 반 개만 채우면 빈 머리가 채워지지 않아요. 한 개를 꽉 채워야지요. =3=3=3

urblue 2007-02-02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녁에 국수 먹을래요.

향기로운 2007-02-0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에 국수먹고 출근했어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2-0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caru님, 맥주 한 잔은 왜 말씀 안 하시는지? 맞죠? (사실 맥주 마시고 싶을 때 일부러 저녁메뉴를 골뱅이무침으로 잡아요, 전. ^^)
속삭인 님, 햐 그 속 빈 느낌요, 님 서재에 가서 저도... ^^
벼리꼬리님, 큭 그러게 한 개를 몽땅 끓일 걸 그랬나요? 그런데 왜 그냥 막 도망가세요, 잡으러 오라는 거죠? ^^
urblue님, 저녁에 국수 간편하고 좋겠어요. 저흰요, 뭐 세끼 국수 먹어도 좋다는 사람이 있어서. ^^
향기로운님, 반가워요. 저희 집에서야 해장하라고 끓였는데 향기로운 님은... ? ^^

향기로운 2007-02-0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잠도 자고요.. 밥 할 시간은 없고요^^ 그래도 든든하게 한 사발(^^) 말아 먹고 왔거든요^^

잉크냄새 2007-02-02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이거...호기심 많은 소녀같은데요. ㅎㅎ
드실땐 그냥 드세요. 어디로 가는지 알면 허망해진다고요.^^

2007-02-03 0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영엄마 2007-02-03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국수 먹고 시포라... 배 고파서 이만 잘래요. (^^)>

내가없는 이 안 2007-02-04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기로운님, 그러게요, 국수도 한 사발이 꽤 든든해요. ^^
잉크냄새님, 전 그 과정이 꽤 궁금한데요. 결과야 어떻든, 우리 속에 알 수 없는 (뱃)속이 있는 것 같지 않나요? 헤헤.
새벽별님, 오호, 저희 집이랑 비슷한 식성을? 저흰 가끔 아이가 어깃장을 놓아요. ^^
속삭인님, 아 그러셨구나. 님은 국수 앞에 놓고 있음 가끔 목도 메시겠군요. 전요, 어제 돌잔치에 다녀왔어요. 요즘 돌잔치는 영상도 보여주더라고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란 노래가 흐르고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았죠. 근데 갑자기 울컥하는 거 있죠. 분명 저렇게 사랑받으며 자랐을 아이가 어느새 엄마가 되어서 아이를 키우고 있구나, 저 아이는 또 저렇게 사랑받으며 어느새 커서 듬직한 아빠가 되겠지, 별안간 사람 사는 세월이 그렇게 느껴지는 거죠. 울 엄마들도 우리 키우면서 행복하셨겠죠? 우리가 아일 키우면서 행복하듯이 말예요. (아,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아영엄마님, 저도 새벽에 배고프면 그냥 자는 게 오히려 몸에 좋단 생각이에요. ^^

chaire 2007-02-05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워도 채워도 빈 속일 때가 있지요. 육적으로든 심적으로든.
근데 이 글, 저 전반부는 말예요. 참 문학적이어서 읽을 때 단침이 고였어요.^^

내가없는 이 안 2007-02-06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haire님, 그죠, 잘 안 채워질 때 난감해요. 요즘 그래요. 정신 빠진 사람처럼 뭐 들어와도 잘 넣어두지도 못하고... 근데 이 글은 그래봤자 국수 끓이는 얘긴걸요. chaire님 점심밥 얘기는 문학적인 음식, 혹은 음식 같은 문학이라 늘 단침이 고이는데요 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