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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ㅣ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기억한다.
런던의 안개낀 어느 밤, 멀리로 일하러 가는 아버지와 헤어지며 세라가 아버지에게 받은 인형을.
울새를 따라 담쟁이 덩굴에 숨겨진 비밀의 화원을 발견하는 메리를.
구빈원에서 제발 죽 좀 더 달라고 빌던 불쌍한 올리버 트위스트를.
복수를 위해 워더링 하이츠로 돌아온 히드클리프 씨를.
아름답지도 상냥하지도 못하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길을 개척해나갔던 제인에어를.
어린 시절부터 나는 빅토리아풍 소설속의 인물들에게 완전히 매혹되어 있었다.
천성이 우울하고 음침한 건지,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음침함과 우울함을 오히려 편하게 여기며 빠져들었다.
부자든지 가난하든지 고아가 되는 아이들, 출생의 비밀, 깍듯한 예의로 포장된 냉소와 교활함,
어둡고 비정한 런던 거리, 너무 어두워 으스스하기까지한 외딴 저택,
폐쇄, 음모, 배신, 복수,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사랑.
집 어디선가에서는 미치거나 아픈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백지장처럼 창백한 숙녀들은 어디에서든 충격적인 비밀에 노출되어있기 때문에 잘도 쓰러지고,
무뚝뚝한 얼굴로 냉소를 내뱉는 신사들에게는 반드시 출생의 비밀이라도 하나 감춰져 있어야 폼이 난다.
나는 빅토리아풍의 음침함을 너무나 사랑한다.
너무나. 너무나.
이런 내가 이 소설을 싫어할 이유가 단 한가지라도 있을까?
내 오랜 로망을 건드리고, 완벽히 매혹시켜버린 소설인데 말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핑거스미스는 도둑(소매치기)라는 은어이고,
이 소설은 빅토리아풍 레즈비언 스릴러 소설이다.
대저택에 사는 공주가 하나 있다.
얼굴이 창백하리만치 하얗고, 실처럼 가는 금발머리에, 다소 백치미를 풍기는,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연약한 공주이다.
그러나 공주는 고아라 삼촌의 손에 엄격하게 격리되어 커서 친구 하나 없고,
시골에서 사는 공주라 촌스럽고, 도시를 동경하며, 도시속의 자유를 동경하지만,
절대로 이 견고한 성에서 빠져나갈수 없다는 체념에 빠져있다.
음침하고 고루한 저택에 갖혀사는 갈망으로 가득차있고 외로운 이 공주는
시골 대저택에 격리된 채 사는 핑거스미스의 주인공 모드이다.
동화에서는 기사라든지, 왕자님이라든지 뭐라도 나와서 잘도 공주를 구해주건만,
이 공주에게 꼬이는 남자는 오로지 사기꾼 리처드 리버스뿐이다.
리처드 리버스, 별명은 젠틀맨.
착한 구석이라고는 단 한구석도 찾아볼수 없는 원조 악당.
교활하고 치밀하고, 게다가 머리도 좋은 악마.
미남에, 멋쟁이에, 예술적인 소질이 있고, 여자가 줄줄 따라서,
외로운 상속녀 하나 물어 어떻게 사기를 칠까 밖에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제비.
이 교활한 여우 젠틀맨이 결혼하자마자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을 모드에게 다가선다.
그리고 모드를 속이기 위해 미끼로 던져놓은 수.
교수형당한 살인자인 엄마를 마음속의 긍지로 품고사는 핑거스미스.
밝고 순박하고 잘 웃으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고,
어머니처럼 여기며 자라온 석스비 부인을 사랑하는 착하고 순진한 열일곱살의 아이.
젠틀맨은 모드를 꼬득여 결혼해 상속을 가로채려는 야심에 수를 끌어들여
수를 모드의 하녀로 배치시켜 놓는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친해지다 친해지다 못해 모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핑거스미스는 1부 마지막을 꽤 충격적인 반전으로 마무리하고 부터는
소설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며 그간의 모든 이야기를 재조명하며 보게되는 소설이다.
사소하게 지나쳤던 것 하나부터 작고 큰 반전들이 뒤이어 줄줄 따라오기 시작하는데,
어느 정도 비극 드라마에 심취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첫번째 반전 이후의 반전들은 예측하기 쉽다.
그러나 반전의 묘미는 그것이 어떤 내용이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포장되어 등장하느냐에 있다.
뒤이어 이어지는 이야기를 어느 정도 예측을 했음에도, 마음이 덜컹덜컹 내려 앉는다.
여는 순간 멈출 수가 없는 소설이라, 만 하루동안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주말 약속도 깼다.)
피곤에 지쳐 눈이 벌게질 때까지 책을 읽어내려갔다.
읽고 읽고 또 읽어도 방대한 분량, 너무 빨리 읽어 버릴까봐 아껴서읽고 싶어도,
한번 열면 멈출수가 없기에 계속 물고 늘어져서 끝장을 봐야 속이 시원해지는 소설이다.
세라 워터스는 빅토리아시대의 레즈비언의 성에 대해 연구하다가
이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 시리즈를 쓰게되었다고 하는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 기준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피해자이고 가해자인 동시에, 교활하고 음흉한 속내를 가지고 있는데도,
빨려들어갈 듯이 매력적이고, 생생하다.
순진한 수, 교활한 모드, 악마적인 젠틀맨 이외에도,
비정하나 애틋한 석스비부인, 멍청하지만 착해빠진 데인티, 멍청하고 무식한 존,
장물아비인 주제에 정도 많은 입스씨, 병적일정도로 결벽스러우면서 외설소설에 빠져있는 릴리씨.
이 모든 등장인물들이 매력적이라, 보는 내내 그들을 좋아하면서도 미워했다.
모드와 수, 두 아가씨의의 로맨스 또한 애틋한 동시에 긴박감 넘치기 이를데 없어서
뭔가 이루어지려면 오해가 첩첩산중으로 쌓여 독자를 한시도 편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적제적소에 터지는 작고 큰 반전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구성력,
누구의 마음속에나 존재하는 사랑과 미움과 모성에 대한 갈망을 마음에 와닿게 드러내놓는 표현력.
까도 까도 이야기가 흘러 나온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빅토리아풍 소설에 매혹되어있었다고 하고,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위대한 유산>과 <제인에어>라고 한다.(어쩜 취향이 나랑 똑같으셔!)
그래서 이 소설은 <올리버 트위스트>의 비정한 런던 거리와 <제인에어>의 음침한 저택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그 소설들처럼, <핑거스미스> 역시 정말로 매력적이다.
책을 보면서 절대로 끊어 읽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조마조마하며 두근댔던 감정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은 올해 읽은 가장 재밌는 소설이 되어버렸다.
당신은 빅토리아풍의 음침함을 사랑하는가.
혹은 스릴러나 고딕풍 추리소설을 사랑하는가.
퀴어를 좋아하고, 음모와 비밀을 사랑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절대로 놓치 말기를 바란다.
무엇을 바라든, 그 이상의 것을 얻게 될테니.
p.s 1. 열린책들에서 세라 워터스의 소설을 앞으로도 계속 출간한단다. 야호!!!ㅠ ㅠ
티핑더 벨벳과 어피니티, 최근작인 나이트워치도 볼수 있게 생겼다!!! 좀 많이 기다려야하겠지만.........
좀 더 기다려서, 티핑더벨벳의 소설부터 보고싶으나, 참을성이 없어서 드라마부터 봐야하는 이 현실......
아아아악............ㅠ ㅠ
p.s 2. 젠틀맨을 보면서 게이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나뿐일까?
잠옷을 입고 누워있는 여자를 보고도, 심지어는 오늘 결혼한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돈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 심리는 무엇일까.......=_=
성에 대해 엄격했던 그 시절에 레즈비언을 보고도 별생각하지 않는 그 심리는 또 무엇......?
BBC 드라마판 "핑거스미스"를 보면 그런 생각이 더더욱 드는데,
순진한 찰스를 바라보며 던지던 그 시선, 나른한 몸짓, 다정한 말투.....
나만 그런 의혹이 들었나....
어쨌거나, 책속에서도 미남인 젠틀맨은 영화에서도 초미남이다.ㅠ ㅠ으윽....
p.s 3. 궁금한 것 하나. 시골에서 올라와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수를 도와주었던
착하고 멍청하며 세상물정 모르는 찰스의 미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제일 불쌍하다.
뒷이야기가 언급도 되지 않을 정도로 천대받고 있다.ㅠ ㅠ
p.s 4. 책을 보자마자 드라마판 핑거스미스를 봐서 그런지, 하나 하나 다른 점을 집어가며 보게되었다.
TV 드라마에서 이 정도 수위까지가 나올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단 놀라우며,
드라마도 꽤 잘 만들어진 것 같지만, 책이 주는 재미에 비해서 드라마판은 좀 많이 실망스럽다.
책 전반에 흐르는 긴박감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쩐지 줄거리 요약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책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3부작으로는 디테일을 표현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좋아하는 대목의 대사가 다른 것도 불만의 요인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