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느슨한 주말, 나를 황홀한 충격속에서 허우적대게 만든 이 작가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17세에 데뷔했으며, 일본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요상한 이름의 작가 오츠이치.
단조롭고 건조한 문체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이야기를 써내려가면서도 그 짧은 문장안에서
독자의 감수성을 한껏 자극한다.
그 감수성은 낯섬, 공포, 기이함, 애수, 쓸쓸함이 모두 혼합되어 있어 뒤숭숭한 기분에 들게 한다.
두려우면서도 궁금하고, 궁금하면서도 슬퍼져버리는 감성을 제대로 집어내는 이 작가.
대단한 상상력, 대단한 감수성을 가졌다.
정말로 멋진 작가를 만나버렸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소설이 앞으로도 만날수 있다고 하고, 현재 나와있는 것도 몇개 있어서
진심으로 기쁘다.
 
어느날 불시에 습격을 당해 정신을 차려보니, 어두침침한 감옥에 갖혀있게 되는 두 남매의 이야기
 <SEVEN ROOMS>를 시작으로, 독자는 이 무시무시한 작가의 정체를 정면으로 맞딱뜨리게 된다.
어두운 감옥속에서 어린 동생은 화장실 대용으로 놓여있는 작은 도랑을 타고,
그곳에 존재하는 7개의 방의 존재를 알게되고, 그 방들에 자신들과 똑같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고독과 두려움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자들을 만난다.
잡혀들어온 이유?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유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이유없음의 불쾌함과 알수 없음의 불안함이 아주 조금씩 꾸물꾸물 꿈틀거려
마음을 아주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들어버는 단편이다.
 
<SOㅡfar>에서는 예상치못한 낯선 현실로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어느 날 엄마의 눈에 아빠가 보이지 않게 되고, 아빠의 눈에 엄마가 보이지 않게된다.
아들은 서로가 보이지 않는 엄마와 아빠사이에 껴서, 어느 쪽이 죽어있는지조차 모른 채
그냥 그대로 부모님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부터인가, 엄마가 보일때는 아빠가 보이지 않게 되고,
아빠가 보일때는 엄마가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다.
소통의 단절에 대한 뼈아픈 이야기. 내내 낯설고 기분나쁜 느낌이 드는데,
속내를 알수 없는 기이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작가 특유의 느낌이 잘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표제작 <ZOO> 역시 불쾌하기는 매한가지이다.
함께 동물원으로 놀러가기도 했던 여자친구가 어느날 살해된다.
그리고 남자의 집에는 여자친구의 시체가 조금씩 조금씩 부폐해져가는 과정을 담은 사진이
하루에 한장씩 배달되어 온다.
이 단편은 무척 섬뜩하면서도 공허한 상실감으로 가득차있다.
이 단편이 표제작이 된 이유는 이 단편집에 줄곧 흐르는 공포와 상실감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의 이름 오츠이치(乙一)와 잘 어울리는 제목이기도 하다. 오츠(乙)-Zoo)
 
<양지의 시>는 이 소설집이 가진 공통적인 느낌과 가장 상반되는 단편이다.
오츠이치의 소설들은 다크계열과 퓨어계열이 있다는데, 이 단편은 퓨어 계열일 것이다.
인류가 멸망한 시대를 알수 없는 SF의 느낌이 풍기는 만화같은 이야기.
어느날 자신을 창조한 인조인간이 창조자와 함께 살아간다.
병에 걸린 창조자는 자신의 집안일을 해주고, 죽은 후에 자신을 뭍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었다.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인조인간. 죽음의 의미를 가르쳐줘야하는 창조자.
그들 사이의 이야기인데, 무척 따뜻하면서도 아주 많이 슬프다.
아아, 나는 이런 이야기를 너무 좋아한다. 너무너무....
읽는 내내, 알수 없는 노스텔지아와 슬픈 기분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이한 상상력을 어김없이 발휘하는 <신의 말>은 또 얼마나 절망적인지.
어린시절부터 목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운 아이가, 어느날 자신의 목소리가 가진 힘을 알게된다.
의지를 실어 달콤한 목소리로 원하는 것을 속삭이면 무엇이든 현실이 된다.
잔혹하고 절망적인 이야기. 소설 내내 흐르는 자학이 불안할 정도이다.
 
또 하나의 불쾌하기 짝이없는 <카자리와 요코>는 콩쥐팥쥐류의 이야기의 변형이랄까.
쌍둥이로 태어나 하나는 엄마와 주위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카자리로 자라고,
하나는 부엌 쓰레기통 옆이 자기 방이 되어버린 요코로 자란다.
자학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하찮음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버리는 요코는
어느 날 잃어버린 개를 찾아준 댓가로 어느 할머니의 집을 드나들게 되면서 내면이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한다.
이 단편집중에서 가장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이야기이다.
자학이 당연시되어버린 요코의 일상은 얼마나 잔혹하던지.
 
<Closet>은 가장 추리소설다운 면모를 갖춘 단편이다.
어느날 살해되어버린 시동생. 범인은 분명 집안에 존재할 터인데, 시동생의 죽음을 둘러싸고,
시누이와 올케가 한바탕 심리전을 펼친다.
과연 범인은 어디 있단 말인가.

<혈액을 찾아라>와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는 불쾌함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블랙코미디이다.
<혈액을 찾아라>는 한때 사고를 당해 뇌에서 고통을 느끼는 부분이 사라져버린 남자가
어느날 피투성이가 된 채로 깨어나지만, 고통을 느낄수가 없어 어디가 다쳤는지 알지 못한다.
옆구리에 칼을 꽂은 채, 살려달라고 외치는 남자의 옆에서
그의 유산을 노리는 맞아들과 새마누라, 너무 착한 나머지 멍청한 막내아들은
누구도 그의 목숨을 살리려 하지 않고, 대놓고 죽으면 유산을 받을수 있지 않냐는 얘기를 해댄다.
집안에서 사라진 혈액의 행방은?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에서는 5번을 재수를 했는데도 도쿄대에 가지 못해 삶을 비관한 젊은 남자가
총을 가지고 비행기안에서 사람들에게 함께 죽어버리자고 협박한다.
도쿄대로 날아가는 비행기안에서 두 남녀는 협상을 벌이고 있다.
죽는 순간의 고통이 너무나 두려운 여자에게 세일즈맨인 남자는 자신이 쓰려고 했던 안락사약을 팔고자
생애 마지막 세일즈를 벌이게 된다.
두 단편 모두 죽음을 담보로 깔고 우스운 상황을 진행시키는 소설들이다.
진지했더라면 무척 섬뜩했을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데,
블랙코미디 특유의 씁쓸한 웃음이 묻어나는 단편들이었다.
 
초반부 <SEVEN ROOMS>에서 느꼈던 낯선 불쾌함을 소설 막바지에 <차가운 숲의 하얀 집>에서 느낄수 있다.
백부집 마굿간에서 동물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 남자가 어느날 쫓겨나 자신만의 '하얀 집'을 갖게 된다.
섬뜩한 잔혹함과 알수없는 공허하고 신비로운 이미지가 가득찬 잔혹동화같은 이야기이다.
 
 

오츠이치의 10가지 짧은 단편들을 모은 <Zoo>라는 이 소설집에는 공통적으로 불쾌함의 미학이 흐른다.
시종일관 낯설고 확인하기 두렵고 잔혹하다.
이것 뿐이었더라면, 오츠이치는 평범한 공포소설작가였을텐데,
더더욱이 대단한 것은 이야기 전체에 무겁고 우울하고 쓸쓸한 감상들이 흩뿌려져 있다는 점이다.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같은, 아름답고 잔학하고 불쾌하지만, 그립고 슬픈 느낌들이
뭐라 말할수 없는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견딜수 없이 모순뿐인 현실과 자학, 고독과 절망감.
이 낯설고 불쾌한 세계속에서도 쓸쓸함이 내내 맴맴돈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꼭 확인해야 하는 마음속의 호기심과 공포와 욕망을 들춰본 것 같아서,
꾸다말은 악몽처럼 내내 찝찝하고 슬펐다. 
 

오랜만에 완전히 반해버린 소설가 오츠이치-
차갑지만 따뜻하고 슬픈, 너무너무 내 취향과 딱 들어맞는 책이어서 격하게 추천해본다.
특히 기리노 나쓰오의 불쾌한 감성을 사랑하거나, 박찬욱의 복수시리즈를 감명깊게 보았던 사람들은
반드시 볼 것!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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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 파일
헤럴드 셰터 지음, 김진석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빨간 모자와 늑대의 이야기.
인적이 드문 숲속에 숨어 잠복하고 있다가, 어린 소녀가 지나가면 잡아먹으려 기다리는 늑대.
옛날 사람들은 과연 이 늑대를 동물로써의 늑대를 얘기했던 것일까.
늑대를 조심하라 경고하는 빨간 모자의 어머니. 주로 어린 여자아이나 할머니를 노리는 늑대.
신문도 TV도 없던 시절, 마을에서 마을로 소식을 전하는 방법이라고는 소문을 통해 이야기될수 있는
이야기나 구전노래가 다 였던 시절에 전해진 이야기를 묶은 그림동화에는 끔찍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어느 마을 누군가가 살해된 이야기, 어느 마을 누군가가 계모에게 쫓겨난 이야기-
다소 환상적인 요소를 가미해 뭉뚱그려 표현이 되긴 했겠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름답게만 보았던 동화들은 무척 끔찍한 생각이 든다.
숲속에서 잠복해 빨간모자를 기다리고 있던 늑대는, 사실 연쇄살인범이었을지도 모른다.
 
'연쇄살인'이라는 말이 생겨난지는 1980년대에나 들어서이지만, 연쇄살인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다.
한때 잔다르크와 함께 행동하던 영웅이었으나, 후에 초엽기변태살인마가 되어버린 질드레의 이야기도 그렇고,
(질드레의 이야기는 동화 '푸른 수염'의 모티브가 된다.)
네로 황제 또한 자신안의 악마에 갖혀 간악한 짓을 저질렀다.
이렇게 역사속에 전해지는 사람들-대부분 귀족이었거나 기록할만한 사건으로
후세에도 전해진 살인마들뿐만이 아니라,
기록되어있지 않은 평범한 역사속의 연쇄살인범들은 대체 얼마나 많았다는 얘기인가.
 
연쇄살인의 역사부터 최근에 들어서 연쇄살인에 영감을 받은 예술까지 이야기하는 <연쇄살인범 파일>은
대량학살과 연쇄살인의 차이점부터 짚어나가고 시작한다.
최근 버지니아 공대사건같이, 한 개인이 정신적인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한번에 여러사람을 학살하고 자폭해버리는 것을 '대량학살'이라 부르고,
두번 이상의 살인 사건이 의미있는 기간동안 차례차례 이루어지는 것을 '연쇄살인'이라 부른다.
대량학살이 정신병에 기초가 있다면, 연쇄살인은 성범죄에 가깝다.
대부분의 연쇄살인자들은 살인을 섹시하다 여긴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삐뚤어진 욕망속에 자라났고, 죽은 사람에게 성욕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유년시절까지의 부모나 주위 사람들의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통해
자신을 받아들일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연쇄살인범의 이미지- 20세에서 30세 사이의 백인남성이며,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는 이미지는 이 책을 보는 내내 무참히 깨질것이다.
13세에 열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꼬마아이가 있는가 하면,
60세가 넘은 나이에 아이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사체를 훼손한 악마같은 남자도 있다.
백인이 있는가 하면 흑인도 있고 동양인도 있다.
연쇄살인범들중에 백인이 많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통계가 이루어지는 곳이 주로 영미권이기 때문이다.
숫자적으로 우세한 백인이 많은 지역에서, 백인 연쇄살인범들이 많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연쇄살인범들중에는 흑인이 많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여자들도 많다.
남성 연쇄살인범들처럼 시체를 훼손하는 경우는 드물지만,(있긴 있다.)
가장 친한 사람을 독약으로 몇시간, 몇일에 걸쳐 서서히 죽여가면서 죽어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여자 연쇄살인범들은 또 얼마나 간악하단 말인가.
언론에서 주목하듯 슬래셔 무비라던지, 메탈음악이 연쇄살인범의 폭력성을 일깨우는 것도 아니다.
연쇄살인범들이 가장 즐겨읽고 열광하는 책은 바로 성경이고,
그들은 성경에서 자신을 정당화 시킬수 있는 부분을 집어내서 교활하게 이용한다.
 
연쇄살인범들의 대부분은 사이코패스로 미친 것과 거리가 멀다.
보통사람들에게도 정신병은 있듯이, 그들에게도 정신병은 있으나,
정상적인 판단력이 없을 정도의 정신병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더 삐뚤어진 방법으로 표출이 되고,
인간으로써 저지를수 없는 끔찍한 짓을 저질러 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들은 미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양심과 감정이 없는 것이다.
그들중에는 평균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꽤 되고,
정신병자와는 달리 계산적이고 판단력이 있으므로, 수사망을 잘도 피해간다.
대부분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며 학대받은 인생을 살았던 사이코패스들이 많지만,
더러는 아무 문제 없이 유복하고 행복하게 자라와 멀쩡한 직장과 명성을 가지고
연쇄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떤 연쇄살인자들은, 마을의 유지였고, 의사였으며, 간호사였고, 경찰이었고, 교사였다.
간혹, 그들은 주위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거나, 친절한 이웃이자 자애로운 지도자였지만
아무도 몰래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강간하고, 토막내고 먹는다.

책속에는 수많은 연쇄살인범들이 등장한다.
이렇게까지 많은줄 몰랐지만,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또 아직도 감옥에서 살아있는 연쇄살인범들의 숫자도 꽤 된다.
더러는 스타 연쇄살인범 잭더리퍼처럼 잡히지 않고 사건이 끝나버리기도 한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천재적인 수사관이 나타나 사건을 해결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들이 검거된 경우중 대부분은, 범인이 실수를 했거나, 우연한 사건이 일어나 잡혔거나
(연쇄살인범이 속도위반으로 잡혔는데, 옆에 시체가 타고 있었다는 식..)
동조자의 배신내지는 밀고로 정체가 밝혀진다.
 
참 무서운 세상이다.
현실에는 소설이나 영화속의 영웅도 없고,
다정한 친구라 믿고 있던 사람이 어느날 내 목에 칼을 들이대기도 한다.
세상에는 인간이 너무나 많고, 그 인간이 모두다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를 내기 어렵다는 점-
그래서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해도 전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는 점이 참 무섭다.
비참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모두 연쇄살인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체 인간의 뇌에는 무엇이 들어있길래, 악마보다도 못한 인간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는지
알수가 없다는 것도 참 무섭다.
 
보는 내내 너무 무서워서 치를 떨면서 보긴 했지만, 참 재밌는 책이다.
케이스도 다양하게 보여주고, 풀이도 친절하며, 내용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있어서
지금까지 읽었던 범죄심리학서중에서는 가장 재밌었다.
다만, 책을 다 보고나니 세상과 인간이 너무 무서워졌다.
 
여기에, 지옥이 있다. 인간이 만든 지옥.
상상초월의 욕망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한편에서는 선정적인 범죄 행각에 열광하며 그런 악마들을 찬양하는 보통 사람들이 있고,
또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악마들의 악행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아, 신이시여. 당신은 대체 뭘 만든 겁니까.
여기가 바로 지옥이고, 우리가 바로 악마입니다..

p.s. 그나저나 이 책을 낸 출판사, 은근히 웃기다.
번역자나 교정자나, 분량이 너무 많아서 번역하고 교정보다가 지쳤나.
초반에는 오타가 거의 없다가, 중반 넘어가기 시작하니까 오타가 쏟아져나온다.
오타, 띄어쓰기 실수, 잘못된 조사 사용, 빠트린 글자- 이런 걸 적어도 50개쯤 본 것 같다.
작년 "용의자 X의 헌신" 이후로 최대 오타작!! 짝짝짝!!!!
오타도 리콜이 되나요.....?오타 좀 신경 써주세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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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브 디거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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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상궂은 외모에 사기, 절도등의 전과도 만만치 않은 야가미,
그가 병원에 전화하고 두근거리는 이유는 얼마후 그가 골수이식수술을 하려고 준비중이기 때문이다.
평생 단 한번 누군가와 자신을 위한 선행을 하기로 한 친절한 야가미씨,
이 일로 지난 죄값을 치룰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하루하루 수술날만을 기다리는데,
수술을 앞두고 돈을 빌리러 찾아간 친구집에서 욕조에 몸이 끓여진 채로 죽어있는 친구의 시신을 발견하고,
불현듯 이 선행이 제대로 이루어질수 없다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곧이어 뛰어들어온 세 남자에게 쫓기며 야가미는 자신의 골수를 병원에 전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같은 시간 도쿄에서는 비슷한 형식의 정체모를 연쇄살인이 벌어져,
야가미는 졸지에 용의자로 몰린다.
경찰과 자신을 뒤쫓는 남자들, 이중으로 쫓기는 야가미- 과연 골수를 안전하게 운반할수 있을것인가.
야가미는 골수이식수술을 위해 병원으로 이동하면서 이중으로 쫓기게 되고,
밤새 헤엄쳐 강을 건너고, 버려진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철로 위를 달리고, 뛰고 뛰어내리면서
책에도 나와있듯이 "철인 3종경기" 저리가라의 험난한 모험을 강행한다.
야가미는 왜 이렇게 힘든 여정까지 해가면서 자신의 골수를 전달하려 하는것일까.
선행이 이 정도로 귀찮은 일이라면, 뛰고 달리고 쫓기면서 이미 의미가 상실될 법도 한데 말이다.
그는 세상에 속죄하고 싶은 것이다.
한때 가짜 연예기획사를 차려 꿈에 가득찼던 어린 소녀들의 마음을 짓밟았던 자신의 사기 행위가
죽어가는 백혈병 소녀를 살림으로써 속죄가 되기를, 그는 바랬던 것이다.
 


<13계단>이라는 싱숭생숭한 추리소설로 평단과 독자를 함께 사로잡았던 다카노 가즈아키의 <그레이브 디거>는
<13계단>과는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면서도 작가 특유의 의식은 살아있는 소설이다.
쫓고 쫓기는 숨박히는 추격전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하는 스릴러 소설이라는 점에서
추격전 보다는 반전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무겁고 애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13계단>과 다소 다르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에게 한없이 애정과 동정을 느끼게 하는 면이 <13계단>과 무척 닮아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세 소설, <13계단>과 <유령인명 구조대>, 그리고 <그레이브 디거>에서는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대한 속죄 의식이 줄곧 흐른다.
 
<13계단>에서 교도관으로써 두번의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죄값을 무고한 사람의 누명을 벗기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점,
<유령인명 구조대>에서 자살자들이 100명의 자살자를 구해야 천국행 티켓을 얻을수 있는 점,
그리고 <그레이브 디거>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의 범죄에 대한 속죄 의식으로써
골수 이식이라는 선행을 택해 끝없이 들고 뛰는 점,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속 사람들은 무언가를 속죄 받아야 발뻗고 잘수 있는 인생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들을 편히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 조용히 앉아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땀이 뒤범벅 되어 들고 뛰고 고생시키고, 그제서야 속죄행위를 할수 있게 만든다는 점이
두번째 공통점이 되겠다.
 
이 소설들에서 어떤 성격, 어떤 직업, 어떤 죄를 저지른 주인공이라도 필사적으로 속죄를 하려는 의식만으로도
독자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주인공들을 매력적으로 빛나게 한다.
근본적으로는 착한 사람들-<그레이브 디거>의 주인공 야가미 역시 한 때 누군가를 등처먹고
도둑질을 하고살아온 험상궂은 전과자이지만, 미워하거나 냉정히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야가미의 험난한 골수이식 여정을 보며  "힘내, 야가미씨!"하고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근본적으로 착하고 정많은 사람, 환경이 그렇지만 않았더라도
훨씬 다정하고 정의바른 사람이 되었을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어지는 착한 마음이 든다.
 
숨막히는 속도감, 후반부로 치닿을수록 명확해져가는 범인과 여러 이해관계들,
그리고 또하나의 매력적인 주인공-더할나위 없이 박진감 넘치는 재밌고 짜임새좋은 소설이다.
불쾌지수높은 여름에 시원시원하게 볼수 있는 웰메이드 스릴러 소설,
올 여름 휴가는 <그레이브 디거>와 함께 하는 건 어떨까!!!아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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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 들고 달리기
어거스텐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시공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열세살 어거스텐의 부모는 지나치게 사이가 나빠서 만나면 즉시 싸우기 시작하는데,
이 싸움의 강도라는 것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부부싸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개..."라던가 "쌍..."라던가 하는 욕이 난무하고 집안이 부숴질 것 같으며, 정신적으로 나약한 어머니는
급기야 미쳐버려서 양초에 불을 켜는 대신 먹어버리지 않나, 남편이 자신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득차게 된다.
아들을 꽤나 생각하는 듯 하지만 책임질 생각은 전혀 없는 정신병자 어머니,
애초에 책임감 같은 건 없다는 듯, 자식에게 냉담한 알콜중독자 아버지.
얼마나 대단한 환경인가.
이런 환경에 비하면, 어거스텐이 학교를 가고싶어하지 않는 13살짜리 게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평범하기마저 하다.
 
아버지가 자신과 아들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과대망상에 부푼 어머니는
어거스텐을 평소 의존하고 있는 정신과의사 핀치 박사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리고 후에는, 자식도 물건처럼 누군가에게 양도할수 있는 것처럼 핀치 박사에게 아들을 버린다.)
정신병자인 어머니 보다 더 정신이 나가있는 정신과의사 핀치 박사.
갈 곳 없는 정신병자들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무척 관대한 의사로 보이지만,
그건 허울일 뿐이고, 그렇게 양자로 받아들인 정신병자들에게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방치한다.
핀치박사는 건강한 분노 표출이 정신병 예방에 좋다면서,
딸들이 서로 험악한 말을 내뱉으며 죽일듯이 싸워도 내버려두고.
집안은 온통 쓰레기장에, 집안 사람들은 "개...."라던가 "쌍..."라던가 "ㅈ같은..."같은 말이 붙지않으면
대화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누구도 어거스텐에게 무언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 곳의 어른들은 열세살짜리아이보다 미쳐있으며, 자신을 책임지기에도 벅차
어거스텐은 열세살 어린 나이부터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며, 서른살이 넘은 남자와 연애를 하고,
애초에 모든 것을 갖춘 백인으로 태어난 것같은 (빌) 코스비의 딸에게 심한 열등감을 느끼고
학교가 가기 싫어져서 휴학을 하기위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물론 죽을 마음은 없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어거스텐의 성장기를 다룬 <가위 들고 달리기>.
작가의 이름을 눈여겨봐두는 센스가 있는 독자라면 알겠지만, 주인공 어거스텐은 소설가 자신이다.
자신의 지난 과거를 바탕으로 써내려간 자전적인 소설이란다.
소설이라면 웃을수 있지만, 현실이라면 결코 웃을수 없는 상황과 인간들이 속출한다.
과연 이 소설의 어디가 픽션이고, 어디가 논픽션일까. 어디를 보든 거짓말같은 현실이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가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으나, 외면하고 싶어하는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온통 충격적인 이야기뿐이라 거의 두들겨 맞거나 한바탕 욕설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지만,
책을 보는 내내 키득대면서 많이도 웃었다.
폭력적이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쿨함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소설이라,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쾌하며 밝다.
그러니까-밝으면서 암울하다.
악질적인 것, 기분나쁜 것, 상처받을 만한 것을 대놓고 우스꽝스러운 연출을 하거나 비웃어버리는
블랙코미디를 영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 농담이 지나치게 독기넘쳐 불편할만한 소설이지만,
나는 착한 농담보다는 삐뚤어진 농담을 좋아하므로 소설속의 악질적인 농담을 공감하며 웃을수 있었다.
주인공 어거스텐의 일어난 사건에 뛰어들기보다는 멀리서 지켜보는 방관주의자적인 면모와
내면의 삐뚤어짐이 나와 매우 닮아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엉망진창인 세상을 살아왔던 어거스텐이 더 나쁜 길에 빠질수 있는데도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 노력했고 꿈을 꾸고자 했고, 뉴욕으로 가 소설가로 성공할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책임감없고 변덕스러운 레즈비언에, 자식을 버리기까지 하는 얄미운 엄마 때문도,
자유방임이 최고라 생각해 지나치게 자유방임해버린 나머지,
대책없는 분노덩어리를 양산해 내는 핀치 박사 때문도 아니다.
핀치 박사의 집에서 어거스텐이 얻은 유일한 교훈은 "내일은 내가 알아서-"였을 뿐이었다.
어거스텐은 비록 굴절된 내면을 가졌어도, 자기파괴를 일삼거나 비관주의에 빠져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태어난 것을 어떻해-세상이 이런 걸 어떻해-어쩔수 없잖아-하고 태생적인 불행은 포기하고
미래를 꿈꾸었고, 자신을 단련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정신은 똑바른 아이였기 때문이다.
만약 무언가를 고치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면 어거스텐 역시 망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종종 냉소적인 것과 비관주의를 같은 것으로 본다.
두개는 완전히 다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냉소적인 사람은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비관주의에 빠질만큼 성의있게 세상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깊이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고, 슬쩍 비웃고 방조해버리는 게으름이
상황에 감정적으로 빠져들어 자신을 소진하고 망가뜨리는 것과 어떻게 닮을수가 있단 말인가.
종종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비관적이라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어거스텐을 비관주의자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사에 그다지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방조하는 편이 더 잘 어울린다.
우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멀쩡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사람들이 어떻게 미쳐가든, 무엇이 우리를 찢어 할퀴든-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의 인생과 꿈이 있으니까 앞으로도 살아나갈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인생은 어두운 암흑이지만,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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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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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슬슬 몰려오고 있어서 공기가 온통 끈적끈적한 불쾌감으로 가득찬 가운데,
권여선의 단편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을 읽었다.
달착지근한 제목과 달리 엄청나게 불쾌한, 어쩌면 너무 달착지근한 나머지 끈적끈적해져버린 불쾌함을 느끼며.
문체는 너무나 건조한 나머지 살이 배일 것 같고, 이야기는 너무 집요한 나머지 짜증이 나버린다.
그리고 그건 현실과 현실의 인간의 집요함과 참 많이 닮아있다.
 
"가을이 오면"에서 못생기게 낳아놓고, 예쁜 이름을 지어주며 집요하게 고상함을 강요하는 어머니.
"분홍 리본의 시절"에서 같은 동네 사는 선배 부부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선배의 외도를 오히려 도와주고,
친하게 지내는 선배부인에게 아무런 언지조차 해줄 생각없는, 지나치게  무심한 나머지
악질적인 인간으로 보이기까지하는 주인공.
"약콩이 끊는 동안"에서 한 여자를 둘러싸고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음란하게 그녀를 모욕하면서
은밀한 쾌감을 느끼는 세 남자.
"솔숲 사이로"에서 홀연히 나타난 젊은이를 바라보며 그 젊음이 질투나 자신의 악을 대물림 해주려는 아저씨.
"반죽의 형상"에서 이미 오래 전에 끝나버린 끈끈한 우정을 붙들고, 무심함인지 경멸인지
또는 그것이 한때는 사랑이었는지, 자신들도 깨닫지 못한 채 마음속의 끈적한 불만들을 꾹 누르고,
그들 사이에는 애초에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 서서히 멀어지려는 두 여자.
"문상"에서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살의가 느껴지는 번들거리는 눈동자의 우정미라는 여자.
"위험한 산책"에서 남편이 잠든 새에 외출했다가 어디론가 끌려가버린 여자-
 
현실에 늘 있어왔지만, 눈여겨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인물들.
우리 모두 늘 가지고 있지만, 꺼내어 내색하기 싫어하는 추하고 집요한 집착과 악의와 환멸.
비정상으로 보이면서도, 아주 정상적인 인간의 창피한 감정들이 이 소설안에 가득차있다.
늪에 빠진듯 질척대기만 하는 감정들과 사소한 것에 화가 나버리는 일상과 사람에의 짜증스러움,
예의 "집요"하다는 소설속의 묘사처럼 집요하고 또 집요해 무섭기마저 하다

독특한 것은, 이 소설이 특별한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인데,
상황은 있지만, 뭐라 정리해서 말해줄만한 정확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무척이나 잘 읽힌다.

나는 잘난척하느라 길게 늘여쓰고,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어려운, 그러나 고상해보이는 단어를 나열해놓고
잡히지 않는 메시지를 잡으라 강요하는 작가를 싫어하는데,
표현하기 모호한 것을 정확히 집어내는 작가의 문장력도 무척 좋고, 
사유도 깊으며, 집요하게 짜증나는 심리묘사에 있어서는 너무나 공감이 되는 나머지
읽는 나 자신도 어느새 화를 내게 되어버렸다.
이렇게나 건조하고 냉랭한데도, 그렇다.
 
"위험한 산책"의 이 갑작스러운 엔딩은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이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은 소설 바깥에서는 이런 진행으로 이루어질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 끌려가는 것."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대단한 낙천주의자가 아닌 이상 마냥 밝을거라 희망을 품을수 없는 것처럼,
곧 현실이 될 보이지 않는 미래도, 과거에 끝나버린 관계나 미래에 시작될 관계들도,
불안하고, 이상하고, 찝찝하고, 불쾌하다.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수 없는 은밀하고 질퍽대는 이야기들-.
대단할 정도로 냉랭하고 삭막한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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