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 : 파 - Evangelion 2.0: You Can (Not) Advanc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자꾸 나오는 극장판. 극장판부터인지, TV판부터인지, 어느장단에 맞춰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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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2월 2주

 

너와 나의 21세기 

줄거리 : 수영은 이제 곧 지긋지긋한 마트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것이다. 지방흡입수술 비용을 거의 다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거남 상일이 그녀의 수술비를 가지고 잠적하게 되고 마트의 물건을 빼돌린 사실마저 발각되자 수영은 궁지에 몰린다. 결국 수영은 돈을 구하기 위해 마트에 상주하던 카드깡 업자 재범을 찾아간다.

 남자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한 그녀 앞에 사채업을 하는 새로운 남자가 등장한다. 그녀 역시 돈이 필요한 상태. 이 작품은 88만원 세대의 풍경인 동시에 자본주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좌절된 청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암울한 듯 하면서도 쿨하게 묘사하는 교차적인 태도가 21세기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이달 개봉할 영화들을 미리 모두 찜해놓았는데, 그중에 왠지 모르게 별 정보 없이도 보고싶은 영화이다.  
일단 제목에서 끌렸고, 포스터에서 끌렸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아름답고 가장 젊고 잔인한 청춘이라는 계절.
더 나이가 들면 더이상 들지 않을 감상적인 감정들이 빛나는 영화들은 이전에도 보았고, 또 앞으로도 볼테지만,
10대의 치기어리고 극단적인 감상도, 20대의 치열하면서 울적하고, 타오르는 듯 꺼져버리는 감성들도 너무 좋더라.
10대와 20대를 온전히 다 보낸 후에 20대를 대표하는 것이 무엇이었냐 생각해보면, 상실이었던 것 같다.
그 이전의 아주 어렸던 나와 그 어렸던 감성들을 모두 다 버리고 이제 30대 진짜 어른으로 가는 시기.(물론 내가 이제 어른이 되었나 싶으면 또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만....) 아무튼 청춘과 성장을 다룬 영화들은 왠지 치열하고 아련하더라.   

이 영화를 보기전에 생각난 김에 좋아했던 성장영화들을 모아보았다. 

 

고양이를 부탁해 

20대를 다룬 영화들을 보다보면 꿈이라던가, 불안한 미래라던가 하는 주제에 대한 얘기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아마 어느 20대들이나 그런 고민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그런 의미에서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수수하고 평범한데, 묘하게 뭉클하다.
내가 있지 않은 장소, 내가 하지 않았던 대사들에서도, 문득 문득 20살의 나를 떠올리고 내가 만났던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정체모를 아련함에 젖어들었었다.
스무살과 말할 수 없는 느낌들.
20대에는 현실은 차곡히 진행되는데, 나는 현실과 꿈 중간에 끼어있었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키즈리턴

<키즈리턴>은 눈물나게 아름다웠던지, 처절하게 절망적이었던지..
꽤 예전에 보았던 영화같은데, 그때의 불안정하던 내 20대 초반의 이야기와 맞물려서
막판에 어쩌지 못하게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억이 난다.
이제 거의 10년후에 보는 이 영화는 어떨까?
여전히 이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찾을수 있을런지.
그야 말로 짠한 영화.
왠지 요즘 다시 보고싶구나. 

  

 

릴리슈슈의 모든 것 

이와이 슌지 영화를 다 좋아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Black 이와이 슌지 영화는 거의 좋았다. 적어도 이 영화 만큼은, 잊혀지지 않는 이와이 슌지의 나만의 명작이다.
영화보다 OST를 먼저 들어보게 된 영화로 이게 OST인지도 모른 채 음악이 너무 좋아서 한창 빠져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일본가서 CD를 사왔다.) 

이 영화는 볼 때마다 축축한 한기가 들었다. 언젠가 있지도 않았던 내 어두운 어린 시절을 남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이런 청춘이라도 그래도 언젠가는 또다시 기억해낼 만한 기억의 한조각이 될거라는 사실이-
결국 이 모든 게 지나갈 거라는 희망적이고도 막막한 청춘에 대한 회고가 너무 좋아서 한 영화를 되돌려 보는 편은 아닌데도, 이 영화는 정말 여러번 보았던 것 같다. (물론 릴리슈슈의 노래도 너무 좋아하긴 하지만...) 

미스테리어스 스킨 

<릴리슈슈의 모든 것>과 더불어 나이가 다 들어서 보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혼자 방에서 질질 짜면서 보았던 영화 <미스테리어스 스킨>.
성장이란 가혹한 통증은 이렇게 어린 시절의 자신을 버려가며 하게되는 것인지, 그리고 뻔히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결코 고칠수 없는 기이한 버릇, 그리고 정신적인 고통.
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레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보다보니, 이 영화속의 주인공들과 아주 다른 삶을 살아온 나도 묘하게 동화되어서 펑펑 울었다.
영화의 마지막, 두 소년이 끌어안고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이제 어떻게 하지?
나도 모르겠다.
원래대로 되돌리는 법을...
악몽을 끝내는 법을.... 

 스위트 식스틴

제목처럼, 달콤한 열여섯살을 보내면 좋으련만, 이 열여섯살 소년의 삶은 지나칠정도로 가혹하다.
방랑벽이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지칠대로 지친 누나,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그런 어머니라도 붙잡고 함께 하고 싶은 가련한 열여섯 소년.
막막한 현실속에 남겨져있는 소년은 그래도 달콤한 꿈을 꾸는데, 그 꿈은 역시 청춘시절의 거의 모든 꿈처럼 허망하게 깨어진다.
너무 일찍 삶의 무게를 알아버린 소년.
충격적일 정도로 막막하게 끝나버리는 영화의 엔딩에 한참 멍하니 앉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답답하고, 애처롭고, 씁쓸하기만 한 이 소년의 성장....
이런 청춘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은 더 무서운 일일 것이다. 

 

푸줏간 소년

온통 돼지로 가득찬 세상에서 동화되지 못하는 "푸줏간 소년".
소년은 이 갑갑한 현실에 내던져져서 울기는 커녕 칼을 든다.
그렇게 소년은 살아남았지만, 그걸로 행복할까.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성장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잔인하고 가혹한 성장영화였던 기억이 나는데,
꽤 오래전,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 보았던 영화라서, 이제쯤은 그 잔향만 남아버린 영화이다.
DVD도 나오지 않았고, 극장에서 재개봉한다던가 하는 행운도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전 어떤 천사같은 분을 통해 다시 이 영화를 가지게 되었다.
시간나는대로 또 봐야지. 다시 보면 어떤 기분이 들런지 모르겠다.
이런 영화를 보면, 더더욱 결혼을 한다는 것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무서운 일임을 알게된다.
누구나 성장을 거듭하면서 한 단계 한 단계를 깨치고 나와야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주게 될까봐.
그 상처로 아이가 이상한 사람이 되거나, 이렇게 처절하게 소외되어 버릴까봐...
그래서 한 인간의 인생을 책임지고 돌봐준다는 것 자체에 겁이 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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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세계 문학 전집이 나왔다.
흑백을 컨셉으로 한듯한 나름 깡끔하고 시크한 디자인에 적당한 폰트. 좋구나 좋아~
17가지 작품들이 인터넷 서점에 올라왔는데, 지금까지의 작품선정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 문학 전집이 거의 거기서 거기이긴하지만, 생각치 못한 작품들도 껴있고, 다른 세계문학전집에서도 다 껴 있는건데도 왠지 읽고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들도 있다.)
얼마전 영화로 보았던 <피아니스트>의 원작 <피아노 치는 여자>도 포함되어 있어서, 일단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을 시험(?)해볼겸, 사보기로 했다.

보다보니, 지금까지 내게는 디자인으로써는 최고의 세계문학전집이라 생각했던 펭귄 클래식이 생각났다. 

 

 

 

  

 

 

 

 

 

 

 

 

 

 

 

 

 

 

 

 

  

 

 

 

으아...
이 아름다운 표지들....ㅠ ㅠ
<헨리와 준> 같은 경우에는 당장 가지고 싶을 정도.
그렇지만, 뭐랄까. 펭귄 클래식은 이상하게 작품선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시리즈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들겠지만, 딱히 읽고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읽기 싫은 작품들도 꽤 많아서 선뜻 손이 가질 않네. (논어에서 깜짝 놀라기도...)
<위대한 유산>이나 <레미제라블>같은 작품들은 언제 나오나?
오랜만에 프랜시스 버넷 소설을 보니, 프랜시스 버넷의 소설을 다시 읽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봤자 <소공녀> <폰틀로이 공자(소공자>, 비밀의 화원이 다 이겠지만.

그래도 드라큘라는 표지가 너무 하잖아.....ㅠ ㅠ
역시 역대 드라큘라 번역서중에서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이 책이 제일 아름답도다.

 

 

 

 

 


난 있지롱롱롱롱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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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사각 - 201호실의 여자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2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말장난을 좋아하는 작가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시리즈 2편이다.
제목의 "도착"은 어딘가 도달한다는 뜻의 단어가 아니라 왜곡되고 변형된 것의 의미, 그리고 뒤에 붙은 "사각"은 사각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범위를 뜻하는 말이다. ("사각"이 그 사각인지 몰랐다. 사각형이 이어져있는 표지때문이기도 하리라.)
똑같은 뜻의 두가지 단어로 제목부터 혼란시키고, 전작 <도착의 론도>가 그랬듯, 이 책역시 막판에 가면 빙글빙글 뭐가 뭔지 모르겠는 어지럽고 화려한 텍스트 반전이 이어지는데, 사람 어지럽게 하는데 있어서는 최고의 작가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말장난도 마음에 들고 말이다.)

<도착의 론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딘가 불안정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처음부터 뭔가 수상한 낌새가 보이더니, 알고보니 이 남자는 알콜중독자여서 재활원에 들어갔다가 나온 상태였다.
다시 재활원에 들어가면 그떄부터 끝장이라는 주인공의 독백이 이어지는 가운데 술을 마실지 안마실지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맞은 편 연립주택에 사는 여자가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그의 방과 마주보고 있는 201호 여자.
언젠가 그 방에 있던 여자가 살해당해 죽어있는 것을 목격한 남자는 괜시리 두려움에 떤다.
이 남자의 취미는 엿보기이다. 소심하고 어두운 성격에 드러내놓고 뭐라 말 할 수도 없으면서, 안보는 척 몰래 몰래 타인의 사생활을 지켜보면서 욕구를 해결하는 사람. 그런 취미에 걸맞게 밖에서 보이면 누가 지켜보는지도 모르는 다락방도 하나 가지고 있다.
안그래야지 안그래야지 하면서도 계속 눈이 갈수 밖에 없는 스물 두 살 젊고 아리따운 여자의 방.
보자 보자하니, 야한 비키니를 사와서 입어보질 않나, 목욕후에 수건 한장만 걸치고 돌아다니질 않나, 무방비한 상태로 잠들어있질 않나.... 고개만 돌리면 맞은 편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어떤 남자라도 엿보기 욕망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한 남자. 주인공과 같은 재활원 출신의 도둑이 하나 등장하고, 우연히 발딛게 된 201호실 여자의 집에서 이 도둑은 그녀의 일기를 훔쳐보게 된다.
여러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알수 없는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오리하라 이치의 "~자"시리즈는 반전을 너무 화려하게 넣으려던 나머지 다소 실망스러운 감이 있었는데, 역시 도착시리즈는 마음에 든다. 여러가지 각도에서 바라본 사건의 사각-죽은 지대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소설을 보면서 찾고 또 찾았는데도, 나는 그 사각의 일부만 예측할 수 있었다.
변화무쌍한 시점변화와 감각적인 반전이 멋진 소설이었다.
역시 도착 시리즈는 퍼즐 맞추는 재미로 보면 딱 좋을 흥미진진한 시리즈이다.

책을 다 보고 나니, "엿보기"라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주인공 남자의 엿보기 취미는 어쩌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도 앞집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꽤 자극적인 장면들이 자주 노출되고 있는데 그쪽에서 누군가 보고 있다는 의심도하지 않고,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것같다면, 몰래 훔쳐볼 것 같기도 하다.
그 예로, 소설에 등장하는 도둑이 우연히 읽게 된 201호실 여자의 일기가 궁금해 틈날 때마다 방에 숨어들어가 일기를 "훔쳐보지" 않는가. 또 그 사각(死角)에 존재하는 또다른 주인공 역시 이 혼란스러운 상황들을 총체적으로 훔쳐보고 있다.
<도착의 론도>에서 "도착"과 "도작"이 어지럽게 반복되면서 혼란을 주었던 것처럼, <도착의 사각>에서는 엿보기 속의 엿보기같은 형식을 취하면서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다.
참 재밌는 뇌구조를 가진 소설가이다.
감각과 기억의 왜곡만으로 이런 어지러운 반전이 계속되는 소설을 쓸수 있는 것도 엄청난 재능임에 틀림없다.

책, 영화, 드라마, 만화, 미술, 음악... 모든 예술이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갔던 이야기, 또는 환상속에서 벌어진 이야기, 상상하다보니 재밌어져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등등,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그저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손끝을 통해 배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은 예술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켜보고 즐기는 독자나 청중, 관람객은 타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 예술들을 통해 어쩌면 그 관음증적인 욕망을 다소 건전한 방법으로 해소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사람은 얼마나 엿보기를 좋아하는 동물인가?
모두가 관음증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가?
당신 바로 옆에 있는 사람, 앞에 있는 사람, 길에서 그냥 스쳐지나간 사람 모두 그 "엿보기"욕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인 이상, 살아있는 이상은 어쩔수 없는 것 같다.
호기심을 버리는 순간, 그 사람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 되어버릴테니...

p.s 책은 무척 재밌었는데, 책 말미에 가니까 엄청나게 짜증이 났다.
아...빌벨린저의 몇몇 소설에서 보던 그 봉인형태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제발 다음권부터는 봉인하지 말고 그냥 내달라고 출판사에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뜯는 동안 책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왠만하면 책을 깨끗이 보관하려는 나같은 독자에게는 성가신 일이 아닐수가 없다.
그나마 종이 하나를 덧대어 완전히 감싼 빌 벨린저판 봉인보다 더 심하게, 책장이 한장 한장 붙어있는 바람에
 지하철에서 마지막 읽다가 살살 뗀다고 떼어도 페이지가 이상하게 뜯겨져 나가더라. 흐흑....
간간히 마지막부터 확인하는 독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뜻하지 않게 반전이며 범인이며 다 알게되는 독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읽는 재미를 포기한 그 사람들의 실수이지 출판사의 실수는 아니지 않는가.
제발!!! 봉인본은 다시는 안볼수 있기를 바란다!!!!!
(게다가 이건 빌 벨린저 소설보다 더 지저분하게 뜯긴다고!!!!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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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네살 짜리 꼬마아이가 한 중학교 수영장에 빠져 익사해서 죽는다. 이 꼬마아이는 그 학교의 과학선생님의 딸아이이고, 이 선생님은 결혼하기 직전 남편이 될 사람이 에이즈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미혼모로 살아가기로 한 여자이다.
아이는 익사된 걸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곧이어 과학선생은 딸아이의 죽음이 익사가 아니라 살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것도 열세살, 중학교 1학년 두명이 저지른 살해라는 것을.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이 정해져 있는 사실을 사건과 관계된 각기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소설이다.
처음부터 범인의 존재를 드러내고 시작하는 셈이기 때문에 범인의 존재를 두근거려 가며 읽어야하는 소설은 아니지만,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백들이 하나 하나 저 나름의 충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서늘한 기분으로 신나게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소설이다.
구성의 참신함과 술술 읽히는 극강의 가독성 때문에 쉽게 쉽게 읽을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중반부까지는 재밌었던 이야기가 거의 마지막, 살인자 소년 슈야의 고백으로 오면서부터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시시해져버리는 점이 아쉽다.
소설의 첫번째 이야기 <성직자>는 미나토 가나에의 첫 단편이었다던데, 그 이야기를 좀더 넓은 시각으로 여러각도에서 풀이해낸 것까지는 좋으나, 살인을 저지르는데 필요한 이유 부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터무니 없는 상상력을 발휘해버린 것이 이야기 자체의 밀도를 떨어뜨려 버린다. (어쩌면 소스가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이 작가는 캐릭터의 상세한 이력서같은 것을 먼저 만들어놓고 소설을 시작한다던데, 어떤 캐릭터들은 설득력을 갖고 있는 반면에, 어떤 캐릭터들은 그들이 이런 행동을 저지르는 배경에 대한 연구가 얕아져 버려서, 상식적으로 이해할수 없는 캐릭터들이 되어버린다.

물론 추리소설에서 어떤 범인들은 꽤나 처절한 살인 이유를 갖고 있기도 하고, 어떤 범인들은 "아무 이유 없어. 그저 살인이 좋을 뿐."이라는 식의 비상식적으로 무절제한 욕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 되어도 독자를 설득하게 하는 힘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수를 할 거라면 확실하게, 구멍뚫려 있는 마음의 암흑을 얘기할거라면 그것도 그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소설이 조금 더 슬프게, 조금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소설에 등장하는 슈야라는 살인자는 불우한 가정환경+천재+타인을 낮춰보는 선민의식+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똘똘 뭉쳐있는 학생인데,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그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기 까지의 과정이 너무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거라면 그냥 심심해서 죽였다고 하는 편이 훨씬 잔인하고 설득력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인지.
한사람 한사람의 사정 설명을 들으며, 이 얘기를 들으니 이쪽이 옳고 저 얘기를 들으니 저쪽이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다가, 슈야의 이야기에서 소설이 갑자기 변명과 자기변호 일색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건 나뿐만의 생각이었을까.
거의 마지막 슈야의 이야기에서 맥이 풀려 버리는 바람에, 다시 과학선생의 이야기로 돌아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지막 한방을 노린 작가의 술수가 빤히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책을 다 보고 나서도 잘 모르겠다.
살인자의 심경고백이 주된 이야기일지, 아니면 법의 보호를 받아 어떤 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열세살 소년들의 청소년 범죄에 대한 경각심인지, 아니면 한 어머니의 복수극인지.
뭔가 중간중간 "당신이 누구라고 살인자를 단죄하려 드는가. 그러는 당신은 깨끗한가."라는 답없는 질문들이 여러번 등장하긴 하지만,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 어떤 답이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썼는지는 알수 없을 정도로 그 화두들의 존재감이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희미해진다.

마음에 안드는 점들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적당히 재밌었다.
일본 소설들이 그렇듯, 쉽게 읽히고 재미도 어느 정도 있다. 그렇지만 그냥 그 정도에서 멈춰버린 것 같아서 다 보고나니 여러모로 아쉬웠다.
아마 이 소설은 오래도록 기억남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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