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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평점 :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수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거야.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中
누구에게나 청춘은 왔다가 가지만,
유난히도 혹독한 청춘을 보낸자가 있었으니, 이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이다.
알렉스는 길거리의 청소년 깡패.
유난히 사악하며, 유난히 영리하고, 유난히 민첩하고 유난히 음악을 사랑하는 깡패이다.
독재자적인 알렉스는 마약탄 우유를 마시며 친구들을 종부리듯 부리고, 낳아준 부모도 패고 협박하며,
그저 특별한 이유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주고,
예쁜 여자는 예쁘다는 이유만으로도 강간하고,
남의 집에 처들어가서 부수고, 돈을 훔치고, 찌른다.
이 사악한 청소년은 이미 15살의 나이에 소년원도 한번 갔다온 못말리는 비행 청소년이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부모에게 학대당하면서 크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면서 크지도 않았다.
단지, 이런 폭력적인 삶이 재밌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날, 뭔가 훔쳐볼까하고 들어간 집에서 할머니를 죽인다.
친구라고 믿었던,(정확히는 꼬봉-) 3명의 친구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그는 이번에는 소년원이 아니라 진짜 감방으로 직행한다.
워낙 사악하고 비겁한 성격이어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다른 애들이 시켰다고,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발뺌을 한다.
그리고는, 좀더 일찍 출소하기위해 루도비코 연구 실험대상으로 자원하게 된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그동안 저질러온 초강력 폭력과 강간을 매일같이 영화로 보면서,
알렉스는 고통을 느낀다.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해본적도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지 그게 괴로워졌다. 누군가에게 욕설을 퍼붓는 생각만해도 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다.
알렉스가 진짜 착한 아이가 된것은 아니다.
단지 이에는 이, 폭력에는 폭력이라는 루도비코 실험에 희생되서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 뿐.
진정한 의미의 교화도 아닌, 그저 육체적인 교화가 된 것 뿐이다.
이런 실험을 마치고 세상밖으로 나온 알렉스는 더이상 어떠한 폭력도 저지를수 없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심지어는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제대로 항의도 못할 지경이다.
그래도 믿었던 부모에게 배신을 당하고,
길거리에서 떠돌다가 예전에 자기가 강간해서 죽어버린 여자의 남편집에서 보살핌을 받다가도,
자기가 저지른 죄가 들켜버리자 쫓기듯이 도망쳤고,
어떤 사람들에게 도구로써 이용될 뻔했으며,
이런 지겨운 삶, 자살을 하려고 했는데도, 기어코 살아버렸다.
열 다섯부터 열여덟. 긴 인생에서 거의 아기같았던 시절에, 알렉스에게 벌어진 일들이다.
작가는 자유의지를 옹호한다.
아무리 사악한 범죄자라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인권이 있으니까.
억지로 교화당하느니 어느 순간 자기자신이 깨닫는게 낫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알렉스는 이제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루도비코 실험때문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그게 싫어진 것이다.
누구나 매우 심취해있던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시들해지듯이, 알렉스 역시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마약든 우유보다는 우유를 잔뜩 넣은 차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밤거리를 쏘다니며 이유없는 폭력에 에너지를 쏟아붇기 보다는
음향시설이 갖춰진 자기방에서 음악을 듣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길에서 누군가를 협박해 뺏은 돈보다는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강간 대상으로만 보이던 여자가 아름답게 느껴졌고,
나이에 비해 일찍 결혼을 한 옛친구를 보면서 아련한 부러움도 느낀다.
그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불뤼우는 불안정하고 어딘가 정신적으로 병약한 청소년기를 지나,
안정과 밝은 미래를 떠올리면서 하루를 이어가는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닐까.
전체 인생을 통틀어서 그렇게나 쓸데없는 고민과 쾌락에 몸을 맞기는 때는 아마도 사춘기 때일지도 모르니까.
작가는 청춘을 태엽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말한다.
완전히 어른이 되지도 못하고, 결국은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야 살수 있으면서
자기가 조종당하고, 억압받고, 보호받고 있는 줄도 모르고, 세상에 자기 혼자서 태어난 듯이
오만하기 그지없는 시계태엽 오렌지.
두려움을 모르고, 이성을 완전히 사용할줄 모르기 때문에,
불처럼 타올랐다가 얼음처럼 식어버리는 불완전하고도 아름다운,
성인보다 무서운 존재인 소년과 소녀.
처음부터 재밌고, 뒤로 갈수록 더 재밌는 소설이었다.
명작이란 이런데 두고 하는 말이리라.
고전은 재밌다.
하지만 고전이라는 말에서 고루한 느낌이 느껴지는 것은
어떤 고전소설들이 난해한 말과 괴리감 느끼게 만드는 교양을 씨부리면서 독자를 가르치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소설은 정 반대이지만 말이다.
독자를 "여러분"이라고 규정하고 친구에게 말하듯이 진행되고,
어려운 단어 섞지 않고 비속어를 말하면서도 충분히 메세지가 확실히 전달된다.
가끔씩 반드시 어려운 단어나 확실히 와닿지 않는 모호한 표현을 즐겨서 쓰는 사람을 가끔 보는데,
그런 사람들을 볼때마다 나는 "당신이 한말이 무슨 뜻인지 당신은 알아?"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하는 모호하고 교양적인 말이 정확히 뭘 뜻하는지, 본인들은 알까.
개인적으로 나는 모든 예술작품을 고르는데 있어서 그다지 매니악한 취향은 아니기 때문에,
쉬운 말로도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는 쪽을 더 선호한다.
예술작품이 누군가에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면, 이미 가치를 잃어버린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