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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신부 1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의 일이다.
"그림 형제의 동화 <도둑신랑>을 읽어줄게."
토니가 양쪽에 쌍둥이들을 거느리고 책을 읽는다.
아름다운 처녀, 남편을 찾는 과정, 순진한 아가씨들을 숲속의 자기 성 안으로 유인해서
토막쳐 먹어버리는 부유하고 잘생긴 낯선 사람의 등장.
"어느날 한 구혼자가 나타났어요. 그는...."
"그녀는! 그녀는!!"
쌍둥이들이 떠들썩하게 외친다.
"좋아, 토니. 네가 이 난국을 어떻게 벗어나는지 좀 보자."
문가에 서서 로즈가 말한다.
"<도둑 신부>로 바꿀수도 있단다.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토니가 말하자 쌍둥이들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그러면 되겠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신부 의상을 좋아해서 바비 인형들에게도 그 옷을 입힌다.
그리고 그 신부들을 층계 난간 너머로 내던지거나 욕조속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신부가 누구를 죽였으면 좋겠니?
남자들을, 아니면 여자들을? 아니면 골고루 섞을까?"
쌍둥이들은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자기들의 원칙을 고수한다.
모든 등장인물에 여자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도둑신부라'. 하고 로즈는 생각한다.
하긴 그것도 안 될 까닭이 없지. 신랑들도 어디 한번 호되게 혼 좀 나보라지.
도둑 신부는 어두운 숲속의 저택에 숨어 살면서 순진한 자들을 노리고 청년들을 유혹하여
흉악한 가마솥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
지니아처럼.
로즈는 또 울고 있다.
그녀가 슬퍼하고 있는 것은 잃어버린 착한 마음씨 때문이다.
힘껏 노력했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려고, 언제나 최선의 판단을 내리려고 정말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그러나 토니와 쌍둥이들이 옳았다.
무슨 일을 해도, 누군가는 꼭 끓는 물에 빠져야 한다.
-마가렛 애트우드 <도둑신부>
누군가에 대한 동경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적은 한번도 없다.
일방적인 동경의 감정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위에 올라서서 마음대로 조종할수 있도록 허락하는 꼴이 되기도 하고,
동경했던 상대이기에 자신에게 배당되는 배신감과 상실감은
다른 누구에게 당하는 것보다 크다.
이책은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
같은 상처로 친해진 세명의 여자와
그들의 남자와 이 세쌍의 커플을 망가뜨려버린 마녀같은 지니아.
그들이 20대부터 중년에 이를때까지 상처를 주고 상처받는 이야기 "도둑 신부".
토니라는 여자가 있다.
마치 쥐와도 같은 작고 볼품없는 토니는, 보기와는 다르게 냉철하며 일면 차갑다.
일평생 누군가와 친해본 적이 없는 적막한 인생을 살아온 토니에게,
지니아가 찾아온다.
지니아는 토니가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여자친구.
감정적으로 싫어할수 밖에 없는 상대이지만,
자기보다 똑똑한 또래 여자아이를 만나본 적 없는 토니는 본능적으로 당당하고 똑똑한 지니아에게 끌린다
자신이 겪었던 불행보다 더한 지니아의 유년시절의 불행을 들으면서,
토니는 안도하면서도 그 불행을 흠모한다.
토니는 지성에서도, 불행에서도, 지니아에게 밀렸던 것이다.
그것이 토니의 눈을 멀게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사람이 친구가 되면서, 토니는 지니아에게 맞춰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지니아의 남자친구 웨스트에 대한 짝사랑을 누를 정도로, 동경은 그녀를 지니아의 노예로 만든다.
지니아에게 버림받고 너덜너덜해진 웨스트를 받아들인 것은 토니.
그리고 수년후 웨스트와의 결혼을 앞두고 다시 나타난 지니아에게로 떠나버린
웨스트가 또다시 버림받고 돌아왔을때 받아들인 것도 토니다.
그는 그녀와 산 수년동안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적이 없다.
마음은 지니아에게로 가있는 껍데기만 "보살피고" 살아온 것이다.
그에게 그녀는 단지 안식처일뿐, 평생을 믿고 사랑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토니 역시 알고 있지만,
그녀는 그 상황을 역전시킬 능력이 없다.
캐리스라는 여자가 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죽은 후에는 이모의 집에서 기거한 캐리스는
여자가 되기 이전부터 이모부에게 강간을 당해왔다.
사실을 알면서도 캐리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짓는 이모때문에,
그녀는 더이상 갈곳도 없는 궁지에 몰린 어린시절을 보낸다.
캐리스는 지극히 여리고, 소심하며, 자연주의자이다.
그녀가 육식을 하지 않는것도, 남자들과의 섹스에서 흥미를 찾지 못하는 것도,
그런 억압적인 어린시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섬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캐리스에게, 병역기피자인 빌리가 찾아온다.
그저 그를 숨겨주는 것이 일이었지만, 캐리스는 자신의 일상으로 "침입"해온 빌리를 사랑하게 된다.
결혼과 아이와 안정을 꿈꾸는 캐리스와는 달리 빌리에게 그녀는 단지 아쉬워서 어쩔수 없는 분출구일뿐이다.
그는 캐리스에게 언제나 원치않는 것을 강요하고, 캐리스는 받아들인다.
그녀는 순종적인 여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앞에 상처입고 병든 지니아가 찾아온다.
암에 걸려있는 여자를 도저히 모르는 척 할수 없는 캐리스는 지니아를 보살피며,
건강을 되찾아가는 그녀를 보며 행복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도 원하던 아이가 생겼고.
그러나 빌리는 아이가 생긴 캐리스를 두고 지니아와 떠나버린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녀의 닭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로즈라는 여자가 있다.
어린시절 어느날 갑자기 갑부가 되었다.
누군가와 섞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광대가 될수 밖에 없는 사실을 알고난후에,
로즈는 애써 쾌활한 척 했고, 그것이 성격으로 굳어져 버렸다.
그녀에게 나타난 잘생긴 변호사 미치가 그녀의 돈을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믿고 싶어한다.
그가 그녀의 돈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수많은 매력중에 존재하는 "돈"이라는 일부분 역시 사랑한거라고.
바람둥이인 남편과 살면서, 그녀는 그가 헌신짝 처럼 내다버리는 소모품인 여자들을 정리해야만 했고,
가난하게 살아온 남편이 기가죽을까봐, 자신의 성공을 남편에게 부끄러워해야한다.
그의 여성편력을 그녀가 견뎌내야했던 이유는, 그녀가 그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앞에 지니아가 나타난다.
로즈에게는 자신의 부와 명성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다.
사실 아버지는 더러운 방식으로 돈을 벌었고,
그것을 견딜수 없는 로즈는 아버지의 잘못을 사죄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회에 환원하려 한다.
지니아는 로즈의 이런 컴플렉스를 파고 들어온다.
사실은 비열한 밀수업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을 상쇄시킬 기발한 기획을 가지고.
지니아의 계략에 넘어가 다시한번 아버지를 믿을 용기가 생긴 로즈는,
지니아에게 자신의 회사에 일자리를 구해주고, 아낌없는 애정을 준다.
그러나 결국 로즈의 바람둥이 남편은 지니아와 떠나버린다.
로즈는 그가 다시 돌아올거라고 확신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걸려버린 것이다.
지니아의 가짜 죽음 소식을 들은 남편은 자살을 하고 만다.
대학시절 동기였으나 전혀 친하지 않았던 세명의 여자는,
지니아에게 당한 "피해자"로써의 동류의식으로 서로를 대한다.
우정이라기보다는 알콜중독자 모임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듯이,
그들의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고,
죽을듯이 무너지고 있을때 묵묵히 나타나서 상처받은 서로의 뒷치닥거리를 해주면서,
위로한다.
여자들이 가장 쉽게 친해지는 법은, 서로의 상처를 나누고 누군가를 욕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든, 자기와 똑같은 사람인 것처럼
상대방을 어루만지고 돌봐주고싶다.
이 세명의 여자는 서로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 친해지고 있었고,
그런 방식으로 지니아에게 당했다.
마치 질병처럼 토니, 캐리스,로즈의 가장 약한 면을 파고들어와 그들의 인생을 망쳐버린 지니아.
목적이 뭔지도 모르고, 정체로 모르고, 과거도 모른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거짓이기 때문에.
남자를 홀리는 매력적인 외모와 더불어, 간교한 잔머리와 대담성까지 갖춘 지니아.
토니, 캐리스,로즈는 그녀를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한다.
그들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도 지니아였지만,
그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받아줄수 밖에 없는 그녀들의 남자를
그녀들 대신 뻥 차주고 괴롭히고, 혼내주고, 상처받게 만든 것도 지니아였다.
그들은 그녀를 증오하는 동시에 동경한다.
언젠가 단 한 순간쯤은 자신도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며 애정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지니아가 되길 바라면서.
지니아 자신이 왜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괴롭혀야하는지는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 역시 컴플렉스의 일종은 아니었을까.
지독히 외로운 인생에, 내가 보기에 별것도 아닌 일들로 고민하고 있는
착하고 평탄한 인생을 사는 여자들을 발견했을때, 배알이 뒤틀리고 괴롭혀주고 망가뜨리고 싶은.
사실은, 나도 외롭다고, 나도 괴롭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흔히 그런 얘기를 접할때가 있다.
어떤 아줌마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을때,
바람피운 남편보다, 상대방 여자를 더더욱 증오하는 얘기를.
마치, 순진한 남편을 사악한 상대방여자가 억지로 꼬득여낸 것처럼.
그것이 여자이다.
그래서 여자의 적은 여자이다.
내 옆에 있다면 정말 죽여버렸을 얄미운 지니아지만,
그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약삭빠름과 사랑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정신은,
모든 여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이상향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보면서, 나는 토니이기도 했고, 캐리스나 로즈이기도했고, 지니아이기도 했다.
어떤 여자의 마음속에나 다 들어있는 양파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또 나오는 다중성.
어떤 때는 연약했다가, 어떤 때는 독했다가, 어떤 때는 죽을듯이 슬프다가도,
어떤때는 사악한.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를 알수 없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전세계 공통의 여자들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는 마가렛 애트우드의 아주 치밀하고 정확한 단어로 표현된다.
그녀는 여자에 대해서 너무나 빠삭히 알고 있고,
여자들이 가진 복잡다난한 감정을 아주 정확히 표현할 줄 안다.
마가렛 애트우드의 책을 읽으면서 이 여자가 얼마나 단어의 정의에 명확한지 경탄하게 되었다.
누구도 뭐라 부를수 없는 감정상의 문제를, 정확한 단어와, 정확한 비유로 얘기한다.
전혀 성격이 다른 세 주인공에 맞춰져서 문체조차 성격에 맞게 바뀌어지는 구성도 참 마음에 들었다.
책이 꽤 옛날 책으로, 내가 고등학교때 초판이 나온 것 같은데,
영어와 한글에서 오는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애매모호한 문장에 역주를 달아 뜻을 풀어놓은 섬세한 번역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시녀이야기"는 올해 읽은 가장 재밌는 책중 하나였고,
이 책으로 나는 마가렛 애트우드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재밌는 소설 Best 10"을 뽑는다면,
이 책을 당연히 끼워넣을 것이다.
패미니즘 소설이라는 꼬릿표를 달고 있지만, 꼭 그런 수식을 붙이지 않아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있다.
비슷한 소재의 여자와 여자끼리의 전쟁을 다룬 아멜리 노통의 "앙테크리스타"와 비교했을때,
더더욱 심도깊고, 더더욱 우아하고, 자극적인 독설을 빼고 진실을 건조하게 풀어놓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