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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십 길더"
주인이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은 동전을 내밀었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이제 내게는 설명할수 없는 오 길더가 더 있는 셈이었다.
나는 동전 다섯개를 빼내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
피터와 아이들이 볼수 없는 곳에 숨겨두리라.
오직 나만이 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그런 장소에.
나는 이 다섯개의 동전을 결코 쓰지 못할 것이다.
피터는 나머지 돈을 보면 기뻐하겠지. 빚이 깨끗이 청산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피터에게 더는 치를 것이 없었다.
한 하녀가 비로소 자유를 얻은 것이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진주 귀고리 소녀>
루시모드 몽고메리나 루이자 올코트가 제인에어를 썼다면
분명 이렇게 사랑스러운 느낌이었으리라.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어쩐지 제인에어를 생각하게 만들었던
"진주 귀고리 소녀"는, 제인에어처럼 우울하고 음침한 느낌없이,
파스텔 빛깔의 상큼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었다.
집안 사정으로 화가 베르메르의 화실을 청소하는 하녀가 된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그림에 빠져들면서 그 역시 짝사랑을 하게되지만,
까탈스러운 부인과 여러명의 아이를 부양하고 있는 그에게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그리트에게는 있을수 없는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베르메르와의 추억이 그저 짝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이미 저택을 떠나 10년이 흐른 후,
푸줏간의 아낙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그리트에게
베르메르가 죽으며 그녀에게 진주 귀고리를 남겼을 때였다.
원래는 베르메르의 아내의 것이었던 그 진주 귀고리는,
그간의 사건과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는,
그리트에게는 분명 아주 커다란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으리라.
그녀는 저택에서 진주 귀고리를 받아서 나와 즉시 진주귀고리를 팔아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남은 20길드중 15길드를 저택에서
남편의 푸줏간에 빚진 돈으로 갚기로 하고,
남은 5길드를 갖기로 한다.
어찌보면 참 멋대가리 없는 결말일지도 모른다.
아마 좀더 감상에 넘치는 소설이었다면 진주귀고리를 받아서 한바탕 울거나,
어디 안보이는 보석함에 넣어서 영원히 간직한다거나 했겠지만,
만약 그랬더라면 나는 이 소설을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말초적인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싫어한다.)
화가 베르메르와 하녀 그리트는 분명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이에는 넘을수 없는 장벽과,
넘을수 없는 신분과, 넘을수 없는 가족이라는 그늘이 있었다.
처음부터 이루어질수 없는 사이라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떠나도 잡지 않고, 다른 이성과 함께 있어도 말릴수도없다.
그들의 관계는 영원한 미스테리에 잠길, 아주 개인적인 비밀이었고,
그리트는 그에게 받은 마지막 유산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정확히는 그 특별한 비밀을 누군가와 나누어갖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돈으로 바꾸어 간직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결국 그리트는 그 20길드로, 하녀의 신분에서 벗어나온 것이다.
그 진주 귀고리를 판 20길드는 그에게 그녀가 단순한 하녀가 아니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동전 다섯개로,
소녀시절의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와의 추억은 영원히, 단둘만이 아는 비밀로 남겠지.
전체적으로 재밌는 소설이었지만,
결말은 희미하게 슬픈 느낌과 모든 것이 완결된 느낌을 전해주어서 특히 좋았다.
아직 영화를 못봤는데, 기회가 되는대로 한번 봐야겠다.
유혹당했으며 유혹하는 "진주 귀고리 소녀"....
책을 다 보고 나니 진주 귀고리 소녀를 왜 그렇게 평하는지 알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