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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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살 짜리 꼬마아이가 한 중학교 수영장에 빠져 익사해서 죽는다. 이 꼬마아이는 그 학교의 과학선생님의 딸아이이고, 이 선생님은 결혼하기 직전 남편이 될 사람이 에이즈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미혼모로 살아가기로 한 여자이다.
아이는 익사된 걸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곧이어 과학선생은 딸아이의 죽음이 익사가 아니라 살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것도 열세살, 중학교 1학년 두명이 저지른 살해라는 것을.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이 정해져 있는 사실을 사건과 관계된 각기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소설이다.
처음부터 범인의 존재를 드러내고 시작하는 셈이기 때문에 범인의 존재를 두근거려 가며 읽어야하는 소설은 아니지만,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백들이 하나 하나 저 나름의 충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서늘한 기분으로 신나게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소설이다.
구성의 참신함과 술술 읽히는 극강의 가독성 때문에 쉽게 쉽게 읽을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중반부까지는 재밌었던 이야기가 거의 마지막, 살인자 소년 슈야의 고백으로 오면서부터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시시해져버리는 점이 아쉽다.
소설의 첫번째 이야기 <성직자>는 미나토 가나에의 첫 단편이었다던데, 그 이야기를 좀더 넓은 시각으로 여러각도에서 풀이해낸 것까지는 좋으나, 살인을 저지르는데 필요한 이유 부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터무니 없는 상상력을 발휘해버린 것이 이야기 자체의 밀도를 떨어뜨려 버린다. (어쩌면 소스가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이 작가는 캐릭터의 상세한 이력서같은 것을 먼저 만들어놓고 소설을 시작한다던데, 어떤 캐릭터들은 설득력을 갖고 있는 반면에, 어떤 캐릭터들은 그들이 이런 행동을 저지르는 배경에 대한 연구가 얕아져 버려서, 상식적으로 이해할수 없는 캐릭터들이 되어버린다.

물론 추리소설에서 어떤 범인들은 꽤나 처절한 살인 이유를 갖고 있기도 하고, 어떤 범인들은 "아무 이유 없어. 그저 살인이 좋을 뿐."이라는 식의 비상식적으로 무절제한 욕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 되어도 독자를 설득하게 하는 힘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수를 할 거라면 확실하게, 구멍뚫려 있는 마음의 암흑을 얘기할거라면 그것도 그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소설이 조금 더 슬프게, 조금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소설에 등장하는 슈야라는 살인자는 불우한 가정환경+천재+타인을 낮춰보는 선민의식+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똘똘 뭉쳐있는 학생인데,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그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기 까지의 과정이 너무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거라면 그냥 심심해서 죽였다고 하는 편이 훨씬 잔인하고 설득력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인지.
한사람 한사람의 사정 설명을 들으며, 이 얘기를 들으니 이쪽이 옳고 저 얘기를 들으니 저쪽이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다가, 슈야의 이야기에서 소설이 갑자기 변명과 자기변호 일색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건 나뿐만의 생각이었을까.
거의 마지막 슈야의 이야기에서 맥이 풀려 버리는 바람에, 다시 과학선생의 이야기로 돌아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지막 한방을 노린 작가의 술수가 빤히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책을 다 보고 나서도 잘 모르겠다.
살인자의 심경고백이 주된 이야기일지, 아니면 법의 보호를 받아 어떤 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열세살 소년들의 청소년 범죄에 대한 경각심인지, 아니면 한 어머니의 복수극인지.
뭔가 중간중간 "당신이 누구라고 살인자를 단죄하려 드는가. 그러는 당신은 깨끗한가."라는 답없는 질문들이 여러번 등장하긴 하지만,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 어떤 답이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썼는지는 알수 없을 정도로 그 화두들의 존재감이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희미해진다.

마음에 안드는 점들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적당히 재밌었다.
일본 소설들이 그렇듯, 쉽게 읽히고 재미도 어느 정도 있다. 그렇지만 그냥 그 정도에서 멈춰버린 것 같아서 다 보고나니 여러모로 아쉬웠다.
아마 이 소설은 오래도록 기억남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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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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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기 위해, 소설 백야행을 뒤늦게 보았고, 드라마 백야행도 뒤늦게 보았다.
바로 얼마전에 보았기 때문에 원작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이것저것 비교하면서 보게되었다.
소설 백야행, 드라마 백야행, 그리고 영화 백야행. 모두 같은 얘기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소설에서 드라마, 영화로 가면서 점점 내 취향과는 멀어졌다. 그리고 이 영화 백야행, 소설을 어떻게 요약한 건지 머리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내가 보기엔 꽤 중요한 에피소드가 과감히 생략되고, 빼먹어도 될 만한 에피소드는 삽입되어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고있는 것이 소설 <백야행>이었는지, 드라마 <백야행>이었는지 참으로 헷갈리더라. 어디선가 원작에 가깝게 각색했다고 들었는데, 원작의 느낌보다도 드라마 <백야행>에 등장하는 씬들이 많이 겹치는 것을 보니 분명 드라마를 보지 않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인데, 왜 소설쪽으로 비중을 둔 것처럼 말했을까.
내가 보기엔 소설과 드라마를 비등비등하게 섞어놓은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말이다.
그리고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와 영화, 둘다 영상물인 관계로 이렇게 비슷한 에피소드와 소품을 넣는다는 것이 고무적인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텍스트를 영상으로 옮기면서 당연히 거쳐야할 각색과정에서 다른 영상물의 이미지와 에피소드를 가져 온다는 것은 참으로 안일한 행동이 아닐까.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만 있을 뿐, 가장 중요한 "어떻게"라는 과정의 부분이 생략되어서 전체적으로 스토리를 끌어가기 급급했던 영화였다. 물론 원작이 꽤나 긴 얘기이고, 드라마로도 11부작으로 만들어진 복잡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2시간동안 다 풀어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영화 <백야행>은 이 소설이 풍기고 있는 멜로드라마+스릴러 적인 요소가 이상하게 배합되어버렸다.
범인을 모두 가르쳐 주고, 반전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은 원작인지라 오히려 감정을 고조시키는 편이 훨씬 나았을텐데 일어난 사건들만 쭉 나열하다가 2시간이 넘는 런닝타임을 낭비해버린 느낌이다.
감정적 고조가 없다보니, 고수는 손예진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손예진은 동정할 가치없이 고수를 이용하기만 하는 캐릭터가 되어버린다.
모든 인물에게 감정이입이 되지 않고, 그에 따라서 주인공들의 행동도 설득력을 잃는다.
또, 원작을 읽고 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영화가 무척 불친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회상씬과 현재씬의 구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섞여 있기 때문에, 관객으로써는 그것이 헷갈릴수도 있지 않을까.

드라마에 비해서 영화쪽이 비주얼은 훨씬 원작과 잘 어울리긴 했었다.
고수, 손예진, 두 배우 다 원작의 캐릭터들과 이미지가 무척 흡사했으니까.
그러나 몇몇 조연들의 쓸데없고 난감한 등장과 발연기가 거슬리기도 했고, 문어체같은 대사들은 소설에서 보면 모를까 영화에서보기엔 손발이 조금 오그라 들더라.
그렇다고 보기 짜증날 정도로 이상한 영화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원작보다 못하다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갔는데도,
이런 여러가지 점들이 살짝씩 신경이 쓰이긴 했다.
영화관에서 보낸 시간이 아깝다며 이 영화를 본 걸 후회하게 될 정도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아마 두번 보라면 안 보는 게 나을거고, 누군가 물어보면 별로 추천은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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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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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떤 술자리에서 어떤 친구는 사랑에 고통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일부러 고통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고, 막연하게나마 동감할 수 밖에 없더라.
고통없이 다정함만이 넘쳐나는 관계가 있다면 그걸로 완벽할까.
자꾸 그 사람이 눈에 밟히고,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과 상처와 상실감이 신경쓰이면서, 타인들 보다 조금 더 마음쓰게 되고, 때로는 그 사람의 상처에 내가 데이고, 그러한 모든 힘겨운 점까지도 끌어안을수 밖에 없는게 사랑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에게는 마냥 편안한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때때로 불편해지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래왔던 것 같다.
마냥 편안하고 다정한 관계에서 정착은 할수 있되, 장기체류는 하기 힘들었었다.
김연수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린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를 읽으면서, 꼭 이런 기분을 읽어낸 것 같았다. 일상의 어떤 순간, 이전에 했던 사랑을 다시 마주친 그녀의 입으로 비슷한 말을 마주하고서는 그냥 그렇게 인정하게 되어버렸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이 독특하고 미스테리한 제목을 보고 나는 이 제목을 "세계 끝의 여자친구"라고 잘 못 읽기도 했고, 하루키의 "세계의 끝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떠올리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작가의 말을 보고 나서야 이 제목이 일본밴드 World's End Girlfriend에서 따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World's End Girlfriend의 노래와 다르면서도 은근히 흡사한 부분들이 있다. 적어도 이 책에 실린 표제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단편에서는 그랬다. 현실의 이야기이면서도 어딘지 아스라히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느낌은 이 책에 수록된 9개의 단편 모두에서 읽어낼 수 있는데, 아마도 그 아스라한 느낌들은 내가 살아온 기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뻔할지도 모르는 이야기.
이 책에 실려있는 이야기들은 내가 겪었고, 다른 사람이 겪었는데, 그런데도 완전히 내것같지는 않았던 이야기들이어서 낯선 기분과 정체모를 노스텔지아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의 "끝"이기 때문에 절망적인 느낌을 줄수 있지만, 그 끝에는 또다른 시작이 있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시간들과 기억들, 그 속에서 소통하고 때로는 소통하지 못하는 것들과 그 치유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을 읽어냈다면 제대로 읽어낸 걸까.

온 인생을 완전히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성장은, 성장통은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항상 타인에게서 튕겨져 나온다.
누군가를 좋아했고, 그 사람을 잃어가는 과정을 되풀이 하면서, 살아오면서 마주하고 스쳐지나갔던 모든 인연들이 나를 또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게 만든다. 그 모든 변한 모습들이 결국 나이면서,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게 마련이지만, 이렇게 이기적인 개개인을 자신 아닌 상태로 변해가게 만드는 것 또한 사랑이라는 기적이 아닐까.
과거에도, 미래에도 만났고 만나게 될 모든 인연들이, 좋건 나쁘건 어떤 형식으로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이 커다란 세상에 내가 홀로 남겨져있지만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할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얼기설기 얽혀져있는 이 인연들 속에서도 때로 막막한 외로움에 시달릴 때가 있다.
왜냐면,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닮아있어도 타인은 결국 타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나와 네가 한 몸인 것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메꿀수 없는 틈같은 것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사랑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인생도 내 인생만큼이나 힘겨웠음을 알고 토닥여주는 연민이 있기 때문에, 결코 이해할수 없는 타인과 타의 틈조차 이해할수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또 무엇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해하는 척 할 뿐이 아닐까.
여전히 이해할수 없는 부분들은 남아있겠지만, 그것을 못마땅히 여기기보다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그 자체가 사랑이고 배려가 아닐까.
그래서 결국 중요한 건 소통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너를 이해한다 생색내는 거짓말보다는 내가 너를 이해하려고 한다는 "최선"이 훨씬 사랑스럽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충돌같은 사랑과 사랑을 묶어두려던 노력과 이별까지 모두 합쳐서 우리는 성장하게 된다.
가끔 사는 건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를 버스를 타고 무작정 어디론가 가는 것같을 때가 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내 옆으로 사람들이 오고, 또 떠나가고, 나는 막연한 목적지를 향해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별이 있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 남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대할 때의 나와 저 사람을 대할 때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지만, 결국 그 다른 모습들까지 나였다.
거울에 비춰진 여러가지 모습의 나. 그들이 남기고 간 그 여러가지 모습의 나는 그렇게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인 것만 같다.

<세상의 끝 여자친구>에 수록된 아홉가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일상의 균열들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인생을 아주 약간씩 바꾸어나가듯이, 사랑이라는 충돌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되풀이하는 사람들. 비록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이었으리라.
끝이지만, 절망하지는 말기를. 애썼다면 그걸로 충분해.-라고 작가가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
다소 쿨해보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촌스러운, 그리고 어쩔수 없는 것은 그대로 놓아두는 초연함 같은 것에 책을 읽으면서 공감했다.
어떤 때에는 레이먼드 카버를 읽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것 같았는데,
사실은 내 기억속 어떤 순간들을 읽어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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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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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안개가 껴있는 가상의 도시 무진시.
한 가족의 무능력한 아버지 강인호는 아내의 알선으로, 청각장애인 학교 자애학원의 임시교사로 채용되었다. 흐릿한 안개속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멍하게 과자를 먹으며 길을 묻는 목소리에 놀라 달아나던 여자아이. 어딘가 그로테스크하기마저한 자애학원의 첫인상은 교장의 말 한마디에 정체를 드러낸다.
채용된 교사에게 돈을 내라는 교장의 말에 순간적으로 역한 증오감이 몰려오면서도, 서울에 두고온 아내와 딸 생각에 섣불리 반항을 할 수도 없다.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는 그렇게 시작해서, 마무리도 그렇게 끝난다.
누가 봐도 분명한 죄와 들끓는 증오감은 여기에 있는데, 그 마음속의 진심과 진실들은 현실에 발이 묶여버리게 된다.
첫 시작과 더불어, 이 소설이 풀어놓고자하는 이야기들을 대충 눈치챘기 때문에 다소 차분하고 담담한 심상으로 읽어가려고 했다.
현실이라면 감정부터 앞설 일이지만, 물론 현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기는 하나, 소설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상황을 조금 더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말 못하는 청각장애인들에게 일어난 끔찍하게도 비인간적인 범죄들을 저지른 것은 학교의 교장과 행정실장과 교사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묵인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묵인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두 사람만이 죄를 저질렀을 뿐만이 아니라 관련된 인간 모두 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교회 사람이기 때문에, 지역의 유지이기 때문에,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동창이고, 내 고향 사람이고, 내 학교 선배이며 후배이기 때문에 명백한 죄앞에서도 "한번 봐주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리고 당장 집에 아픈 사람이 있고, 병원비는 턱도 없이 모자라고, 아이 하나만 희생해주면 가족의 미래가 어느정도 보장 되기 때문에.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는 것이 못견디게 싫은 아내의 투정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당장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묵인하면 내가 편하기 때문에.
방송국으로, 인터넷으로, 온 세상으로 퍼져버린 교육자들의 끔찍한 강간과 폭행들에 저마다 하나 둘씩의 이유로 발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점점 세상에서의 존재감이 희미해져버린다.

이것을 전적으로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마음이 편해지는지 모르겠다.
조금씩 모두 죄를 저질렀고, 그 방관과 묵인의 죄들이 모이고 모여서 이런 커다란 죄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불편한 이야기를 바라보면서 보고있기가 괴롭고 짜증나서 책장을 덮어버리는 것 또한 나 편하고자하는 어쩔수 없는 이기심인 동시에, 또다른 방관과 묵인의 죄를 저지르는 셈이 되는 것 아닐까.
이 세상은 나만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방관한 모든 것이 언젠가 내게 또 돌아올지도 모를 일인데, 내가 그 장애인이 아니라고 안심하고,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 안심한다면 이런 일은 언제까지고 되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내가 어쩔 수 없어도, 적어도 정확히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것부터가 이 개같은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만드는 첫 걸음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드는데, 그것조차 외면해 버리는 사람은 이 세상을 욕할 자격마저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책을 보는 내내 적어도 내게는 상식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잊어가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주 기본적인 상식,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누구의 마음에나 다 있을 법한 양심같은 건 동화속에나 등장하는 건지, 분명하게 돈으로 귀결되는 현실앞에서 거의 모두가 무너져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씁쓸하고 역겨워진다.
아이들에게 저질러진 죄는 그렇다치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려는 노력조차 돈에 팔려가는 것이 과연 현실인지.
왜 이런 인간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고, 왜 이런 세상을 만든거냐고 물어봐도, 내게 신은 없기 때문에 대답해줄 사람이 없다.
금새 잊혀지고, 결국 돈많은 사람이 이겨버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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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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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테리 소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꼭 만나게 되는 코스같은 소설가들은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이다.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일본 미스테리 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가들이니까.
개인적으로는 두 작가 모두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필력이 나쁘다거나 얘기 자체가 시시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 작가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은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그다지 끌리지 않아도 읽게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예전 한창 인기를 끌었던 <비밀>도, 일본 미스테리 중에서는 나름 열풍이었던 <용의자 X의 헌신>을 보아도 뭔가 마뜩치 않은 점이 많은 작가였었다. (그 외에 혹평도 하고싶지 않은 진짜 별로였던 소설들도 있고....)
그러나 영화를 보기전에 뒤늦게 보게된 <백야행>은 꽤 만족스러운 소설이라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읽게 되었다.
그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느꼈던 물체나 다름없는 희미한 여자주인공의 비중이 <백야행>에서는 그닥 느껴지지 않았고, 미스테리라고 해야할지, 멜로 드라마라고 해야할지, 애매모호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잘 한 느낌이었다.

유키호와 료지. 빛과 그림자.
과거의 일들로 인해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면서도 서로에게 인조 태양이 되어주었던 존재들.
그들의 관계가 단지 사랑에 묶여있지 않았기 떄문에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사건을 똑같이 벌이게된 동료의식과 서로에게 품고 있을 죄의식, 서로의 인생을 연민으로 보듬어 안는 인간애같은 것들.
단지 사랑이었기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에 19년- 그 오랜 세월동안 완벽한 타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런지 모른다.
료지가 유키호를 사랑하고만 있었더라면, 유키호를 다른 남자들에게 절대 빌려주지도 않았을 터.
소설 속에서 유키호와 료지가 만나는 장면은 단 한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히 그들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고, 그들의 인생 역시 타인의 시선으로 비춰지기만 한다.
이 냉정한 객관성속에서, 독자는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과연 유키호와 료지는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행복해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라고.

희미한 안개속을 걷는 듯한 이야기였다. 손에 잡히지는 않는데, 막연히 상상할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 상상은 왠지 모르게 고통스럽고 왠지 모르게 애달팠다.
그 상상의 자유와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이 소설 최대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의 모든 단서는 제공하되, 인물의 감정을 비워두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유추하고 막연히 짚어볼수 있었다.
독자를 자연스럽게 고민에 빠뜨리는 추리소설로는 참으로 똑똑한 진행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중에서도 여러가지 장르가 있고, 추리, 스릴러, 공포 문학들은 철저한 장르소설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나는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설은 추리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책을 바라보고 소설속의 인물을 따라가는 것, 그들의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 바로 추리라고 생각하니까.
처음 만난 모든 사람의 인생이 내게는 미스테리이듯이, 첫 책장을 펼치는 책은 처음에는 모두 미스테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애매모호한 장르의 소설 역시 추리소설임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키호와 료지의 인생을 쫓는 것 자체가 미스테리이고 추리였다.

도무지 어떻게 할수 없었던 어둠속에서 도망쳐나온 아이들은, 여전히 어둠속을 헤매인다.
처음에는 타의로, 그후에는 자의로, 그들은 빛의 세계보다 어둠의 세계를 택했다.
줄곧 하얀 밤을 걷고 있었던 기분이라고. 언젠가 낮에 걸어보고 싶다고 쓸쓸히 투정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자신의 감정들이란 단지 그것뿐이지만, 왜 이렇게 처절하고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마지막장, 모르는 척 냉정히 뒤돌아선 유키호는 어떤 표정으로 머나먼 길을 또 걸어갔을까.
눈물을 흘렸을지, 아니면 냉혹한 포커페이스였을지, 또는 후련한 기분이었을지.
분명한 것은, 이제 그녀는 인조 태양조차 사라진 온전한 어둠속을 걷고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독하고, 냉혹한 그녀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닐까.
철저히 혼자 내버려진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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