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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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말 영상 혁명이더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거침없이 보여주는 기술력과 자본, 상상력은 거의 혁명급이더라.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 영상 혁명이었을지는 모르나, 영화 혁명이 되기에는 무척 아쉬운 영화이다.
물론,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스토리를 논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고, 이런 말을 한다고 이 영화의 스토리가 봐줄수 없을 정도로 거지같았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지 영상 하나로, 이 영화를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보기에는 뭣하다는 얘기이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의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연출.
"늑대와 춤을"에서도 봤던 것 같고, "포카혼타스"에서도 봤던 것 같으며, 심지어 "미션"같은 영화도 생각난다.
그러니까 이른 바, 새로운 세계에 떨어진 주인공이 그 세계에 동화되어 그들의 세상에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을 저지하러 나선다- 이런 이야기로 요약하면 딱 되겠다.

가끔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미국인들이 자성을 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그냥 별 뜻없이 역사를 다시 한번 얘기해보고 싶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여느모로 보나, 이 이야기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동네를 침략한 유럽인들의 이야기로 밖에 볼 수 없다.
스머프처럼 파란 피부에 인간보다 키나 등치가 약 1.5배 큰 나비족의 신비롭고 자연에 가까운 모습들과 여러 기계 문명으로 처들어오려는 지구인들의 전투를 또 달리 볼수 있겠나.
그래서, 자신들의 자연친화적인 문명을 지키며 살아가던 인디언을 그렇게 몰아낸 것에 대해, 미국사람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만약 다음에 또 그런 기회가 온다면, 자연과 원주민을 위해 순순히 물러서겠는가?)
또 영화 "미션"이나 "늑대와 춤을"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서양인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다분히 기독교적이고 이기적인 선교 의식을 이 영화에서도 보게된다.
결국 세계를 구하는 히어로는 나비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바타를 통해 나비족으로 잠입하게 된 "인간"이니까 말이다.
미국놈들이 죄다 나쁜 놈들이라도 딱 한사람, 선한 미국인은 다른 세계도 구할수 있다는....그런식으로 보이는 것은 내가 삐뚤어져서 일까. 


좀 다른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몇달전 보았던 <디스트릭트 9>과 비교해 볼수도 있겠다.
<아바타>의 주인공은 아바타라는 매개체를 통해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에게 흡수되어 그들의 문명과 자연에 동화된다. 그리하야 여기서 사랑에도 빠지고, 나비족의 문명에 흡수되어 가는 도중, 인간들이 나비족의 세계를 뺏으려 하자, 전설의 존재가 되어 나타나 나비족을 위해 그들을 처단한다.
<디스트릭트 9>의 주인공은 어떨까. <디스트릭트 9>의 주인공 역시 어떤 사건으로 인해 외계인이 되어가는 운명에 처한다. 정체모를 물질에 감염되어 점점 몸이 변해가는 주인공. <디스트릭트 9>에도 역시 인간에게 저항하는 외계인들이 등장하고, 어쩌다보니 주인공은 그들의 편에 서서 싸우게 된다.
왜냐면, 그래야 자신이 인간으로 돌아갈수 있는 방법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 동화되어 그 자신이 히어로가 되어 세계를 구하는 <아바타>와
잃어버리게 될 운명에 처한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외계인의 편에 서는 <디스트릭트 9>.
외계인이 된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표현방식과 저변에 깔린 의식은 서로가 너무 다르다.
굳이 고르자면, 나는 <디스트릭트 9>이 더 좋았다고 하겠다.
내러티브가 이 정도는 되어야 (적어도 외계인 영화중에서는) 혁명적인 이야기도 될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우월감과 선민의식에 넘치는 히어로의 위대한 자기 희생보다는, 더 단순할지라도 더 개인적이고 더 인간적인 <디스트릭트 9>의 이기심이 더 와닿는다.

아무튼 이래저래 삐뚤어진 상념들을 털어놓기는 했지만,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화자체로는 무척 괜찮다.
돈을 쓰려면 이정도는 써야 영상혁명이 나오는구나 싶다.
제임스 카메론은 그닥 취향이 맞는 감독은 아니라 기대한 바도 없어서, 내러티브 자체의 뻔함을 제외하고는 이정도면 얘기도 충실하다고 생각된다.
영상미도 반짝반짝 아름답고, 초반에 다소 징그럽게 보이던 나비족도 가만히 보고 있다보면 무척 신비롭고 우아하다.
초대형 자본과 기술력이 만들어낸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호화찬란한 영상미로 마음껏 눈호강 하고 싶어서 극장을 찾는다면, 후회하지 않을 영화이다.
그래도 연말이라면, 이런 영화 하나쯤은 봐줘야하지 않겠나? 아하하하하하


p.s 3D 입체 안경을 끼고 보면 이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 일반 영화로 관람해서 그게 좀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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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시민 - Law Abiding Citize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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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웃겨서 안보려고 했는데, 감독이 <이탈리안 잡>의 게리 그레이 감독이란다.
그래서 보기로 했다.(단순하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지만, 꽤 흥미진진하게 얘기를 풀고 나갈줄 아는 감독이 아닐까 싶다. 너무 가볍지도 않지만, 너무 무겁지도 않다. 스릴러 특유의 호화찬란한 폭팔에 기대지 않고도 적당한 무게로 적당히 선을 지키는 감독이라서, 내게는 호감인 감독이다. <이탈리안 잡>이 그랬듯, 약간 모자른 <모범시민>의 느낌 또한 그랬다.

어느날 집에 강도가 들어 딸과 아내를 잃은 주인공.
이 파렴치한 범인은 잡혔으나, 그가 야구방망이에 얻어맞고 쓰러져 의식을 잃어가는 동안 목격한 사실은 법정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의기양양한 범인은 고작 3년형을 선도받고 만다.
항의하는 주인공에게 검사는 냉혹한 법정의 현실을 말해준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입증하는게 중요한 거라고.

그래? 그렇다면, 내가 아주 기가 막힌 범죄를 저질러주지.
너희들이 내가 범인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어도,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입증해야 할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니까.
발명가이자, 한때 스파이 두뇌 역활도 했던 주인공은 복수를 계획한다.
범죄는 뻔뻔하게 일어나고, 범인인 그도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건 입증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가 어떤 방법으로, 앞으로 어떻게 범죄를 저지르게 될지, 반드시 입증해야 할것이다.

<모범시민>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법의 무력감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매일매일 신문에서, 거리에서, 소문에서 발견할수 있는 사회적 불합리함과 다르지 않다.
모두가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최소한의 도덕. 인간이 하는 일이니 헛점이 없을래야 없겠지만, 그 헛점의 구멍은 사실 너무도 커서 그 구멍에 빠져 버리는 무고한 사람들의 숫자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법과 공권력의 무력함에 자가응징을 하러 나서는 안티 히어로들은 현실에서는 보기 힘들어도 영화에서는 종종 볼수 있다.
그들은 범죄를 막기위해, 자신이 범죄자가 되는 것을 서슴치 않거나, 사회적인 모순을 꼬집고 비틀어버린다.
영화속의 안티히어로들의 사회로의 복수는 거대하고 냉혹한 현실에 내버려진 평범한 소시민들 나름의 로망이라면 로망이겠다.
영화속에서나마 우리는 이 무력한 사회에 대한 복수를 행하고 싶다.
범죄를 저지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만큼, 영화속에서나마 대리적인 통쾌함을 얻고 싶은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데 있어서, 초점을 거기에 맞춘다면 결말에서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으니..)
천재적인 두뇌, 가공할만한 추진력을 가진 이런 주인공이 사회의 모순을 더 비틀어버리기를 바랬건만, 영화는 결국 권선징악이라고 하기도 뭣한, 당연히 그리로 가야할 귀결점으로 다시 돌아가버린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범죄가 밝혀지는 지점의 이야기들이 약간 설득력이 떨어지기도 하고, 어설픈 자기 반성도 조금 거슬리긴 했다.)
초반부터 시간 낭비를 전혀 하지 않고 원인들이 돌격해 나가는 점도 좋고, 주인공들의 대사, 움직임들, 내러티브, 메시지, 적당한 액션 다 좋아서 스릴러 영화로써의 본분은 충실하지만, 영화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결말에서 뭉게져버렸다.
아쉬운 점이라면 아쉬운 점이겠지만, 나는 이 역시 고작 영화 하나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끼칠수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헐리우드 영화이니 어쩔수 없다-는 식으로 가볍게 받아들여버렸다.

어쩌면 이렇게 맥빠지는 것이 현실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허무하게 결말나버리는 현실이 진짜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두근두근 흥미진진하게 결말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이
그런 맥빠지는 현실을 맞딱뜨리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악랄하지만 통쾌한 사회로의 복수였을까?
어느 쪽에 초첨을 맞추는지에 따라서, 결말을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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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의미
마이클 콕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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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남자가 길에서 누군가를 죽인다. 그 살인이 너무 쉽고 가벼워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살인자의 이름은 에드워드 글랩손. 처절한 복수를 꿰하면서 그 복수에 대한 예행연습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
에드워드가 복수하려는 그의 적의 이름은 포이보스 돈트라고 한다.
에드워드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도 여전히 그를 붕괘시키려고 하고 있는 자.
이들의 악연의 시작은 어쩌면 탄생에서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에드워드의 본명은 에드워드 글리버였었다.
어린 시절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자랐지만, 혼자 몸으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소설을 써내려가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직업을 닮아 에드워드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사랑했다.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충만하지도 않았던 소박한 어린 시절, 어느날 어머니는 그를 이튼 칼리지에 보내고자 한다고 했다.
알려지지 않은 독지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이튼 칼리지에 다니게 된 책을 사랑하는 지적인 소년 에드워드 글리버의 미래은 그가 들어간 명문 학교의 명성만큼이나 밝은 것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그의 숙명의 적이 될 포이보스 돈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포이보스 돈트는 두 얼굴을 가진 인간이다. 이튼 칼리지에서 만난 동창이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지적이고 영리한 모습과는 다른 교활한 악인이었던 것이다.
포이보스 돈트의 악랄한 장난으로 에드워드 글리버는 이튼 칼리지에서 퇴학당하고 만다.
그에게 주어져있었을지도 모르는 풍족한 미래와 명성을 빼앗겨버리고, 에드워드 글리버는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
급기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에게서 받을 유산 같은 것도 없었던 에드워드의 현실은 막막하기만 할 뿐이다.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기만 했다면, 쉽게 들어왔을 직장들이 하나둘씩 그에게서 멀어지고, 지식인도, 노동자도 아닌 어중간한 에드워드가 세상에 낄 곳은 아무데도 없는 듯 했다.
이 모든 것이 포이보스 돈트의 생각없는 장난에서 비롯된 일.
더이상 어쩔수 없는 무기력과 절망에 빠진 에드워드와는 달리, 포이보스 돈트는 떠오르는 신인 작가로 명성을 얻게된다.
어쩌면 에드워드가 가졌어야 했을 그 자리를, 그를 모함해 인생을 파멸시킨 포이보스 돈트가 가지게 된 것이다.
결코 포이보스 돈트에게 호의를 가질수 없는 상태에서 에드워드는 더더욱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알게된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중 그녀의 일기장을 읽게된 후, 에드워드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된다.
친모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어머니는 자신의 양모였을 뿐, 자신의 진짜 가족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의 가족은 영국에서 가장 명망높은 귀족중 하나인 텐저경이었다.
명예와 돈, 세상 모든 것을 거머쥔 텐저경에게는 자식이 없다. 그는 자신의 숨겨진 자식이 (그것도 정통혈통의) 어디선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가문의 명예와 존속을 위해 후계자를 반드시 만들어놓아야 했던 텐저경은 자신의 교구 목사의 아들 포이보스 돈트를 마음에 들어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지위를 넘겨줄 생각까지 한다.
교활하게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포이보스 돈트의 계략들.
그리고 그 포이보스 돈트에 의해 자신에게 보장되어있던 미래를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진짜 아버지마저 빼앗길 위치에 처한 에드워드 글리버.
이제부터 두 남자의 치밀하고 처절한 복수극이 막을 열었다.


포이보스 돈트의 말처럼 "복수는 기억력이 좋다".
한 사람의 인생에 오로지 행복뿐이거나 오로지 불행뿐인 것만은 아니지만, 유독 불행은 더더욱 기억력이 좋다.
한 여자의 잔인한 복수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에드워드 글리버의 기억속에서, 그의 양모는 항상 좋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소설을 쓰다 지쳐 잠이 든 모습, 자신에게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던 모습, 그를 걱정해주던 양모의 따스한 눈길.
그런 것들이 분명 기억속에 켜켜히 남아있을텐데도, 욕망이라는 것은,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복수에 목숨을 바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리석으면서도, 다분히 인간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부처가 될수 없으니, 내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에 대단한 부와 명예가 걸려있다면 어떻게서든 밝혀내고 앞으로 나서고 싶을 것이다.

마이클 콕스의 <밤의 의미>에 등장하는 두 청년 에드워드 글리버와 포이보스 돈트는 서로를 증오하고 경계하면서도 무척 닮아있는 인물이다. 부와 명예, 그리고 비밀로 한없이 끌려들어가는 나방처럼 그들은 위험도 잊은 채 비밀을 파고들거나 비밀을 은폐하려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다른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와 명예와 복수.
모든 것은 욕망에서 비롯된 일. 두 세대를 뛰어넘어서까지 이어지는 욕망과 배신과 복수들의 핵에는 사랑과 믿음이 존재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배신을 참을수 없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깜빡 속아 넘어가버릴수 밖에 없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간악한 짓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욕망이 현실적인 욕망과 결부되었을 때, 그것이 어찌나 추하고 잔인하게 서로를 망가뜨리던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아직까지도 효력을 얻는 것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에 대한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복수와 배신이 판을 치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복수가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책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은 거의 소극적이던, 적극적이던 자기만의 복수를 하면서 살아간다.
에드워드 글리버는 포이보스 돈트에게, 포이보스 돈트는 에드워드 글리버에게, 미스 카터릿은 에드워드 글리버와 자신의 아버지에게, 레이디 텐저는 자신의 남편에게, 레이디 텐저의 변호사였던 트레드골드는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어쩌면 사랑하는 레이디 텐저를 가진 텐저경에게 그 나름대로의 복수를 행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복수와 배신의 끝에서, 작가는 그들에게 나름의 죄값을 치루게 만든다.
그들의 복수는 거의 모두 성공적으로 실행되었으나, 그들중 어느 누구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행복이라는 것의 바탕에 오차없이 깨끗한 부와 명예가 깔려있다면, 더이상 바랄 나위 없이 복받은 인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삶이 그렇게 쉽게 무언가를 내어주던가.
삶이라는 악마는 하나를 내어주면 하나를 빼앗아가버리는 잔악한 존재인 것이다.
부와 명예가 있으면 소박한 행복을 잃게 마련이고, 소박함속에 남겨진 사람은 부와 명예를 헛되이 꿈꾸게 된다.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는 현명한 사람이 될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부처도 공자도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근래 보기힘든 걸작에 가까운 소설로, 읽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소설은 아니었다. 어떤 소설들은 읽다가 지루해진다 싶으면 더이상의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기도 하는데, 희한하게 이 책은 초반부부터 중반부까지가 무척 지루한데도 계속 읽게 되더라.
그리고 책의 말미에 가서야 진정한 이 책의 재미와 이 책이 이렇게까지 두꺼운 이유를 비로소 알게된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깔려있는 배경지식이었다는 사실. 이렇게 방대한 분량에 녹아들어가 있는 어떤 정보도 헛된 것은 없더라.
마이클 콕스는 이 책을 30년간 집필했다고 한다. 과연 그 노력이 눈부신 결실로 맺어진 것 같다.
오랜 세월 연구하고 책을 써낸 보람이 있게, 책은 몹시 장엄하고 중후하며, 이야기는 통속적인 동시에 처절하고 아름답다.
책밖으로 흘러넘치던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어마어마한 정보와 입체적인 캐릭터들, 통속적인 드라마인 동시에 한 가문의 이야기까지 다루는 깊이감 또한 훌륭하다.
빅토리아 시대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거부할수 없는 책이 되리라고 장담하고 싶다.
빅토리아조 소설을 워낙 좋아하는 나로써는 정신없이 빨려들어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삼켜버리고, 에드워드가 마지막으로 흘렸던 눈물에서 거대한 감동을 받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꽤 짠한 후폭풍속에서 한동안 잠이 들지 못했으니, 적어도 내게만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매력적인 소설이라고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마이클 콕스는 <밤의 의미>의 속편격의 이야기를 구상중이라고 한다.
비록 이 책은 초반부의 지루함덕에 천천히 읽었지만, 속편격의 작품은 열렬히 기다릴수 있을 것 같다.
이 후에, 이 매력적인 주인공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될까.
그들의 인생에는 또 어떤 폭풍같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지.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행위인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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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 파 - Evangelion 2.0: You Can (Not) Adv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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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나오는 극장판. 극장판부터인지, TV판부터인지, 어느장단에 맞춰야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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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사각 - 201호실의 여자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2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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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을 좋아하는 작가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시리즈 2편이다.
제목의 "도착"은 어딘가 도달한다는 뜻의 단어가 아니라 왜곡되고 변형된 것의 의미, 그리고 뒤에 붙은 "사각"은 사각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범위를 뜻하는 말이다. ("사각"이 그 사각인지 몰랐다. 사각형이 이어져있는 표지때문이기도 하리라.)
똑같은 뜻의 두가지 단어로 제목부터 혼란시키고, 전작 <도착의 론도>가 그랬듯, 이 책역시 막판에 가면 빙글빙글 뭐가 뭔지 모르겠는 어지럽고 화려한 텍스트 반전이 이어지는데, 사람 어지럽게 하는데 있어서는 최고의 작가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말장난도 마음에 들고 말이다.)

<도착의 론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딘가 불안정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처음부터 뭔가 수상한 낌새가 보이더니, 알고보니 이 남자는 알콜중독자여서 재활원에 들어갔다가 나온 상태였다.
다시 재활원에 들어가면 그떄부터 끝장이라는 주인공의 독백이 이어지는 가운데 술을 마실지 안마실지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맞은 편 연립주택에 사는 여자가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그의 방과 마주보고 있는 201호 여자.
언젠가 그 방에 있던 여자가 살해당해 죽어있는 것을 목격한 남자는 괜시리 두려움에 떤다.
이 남자의 취미는 엿보기이다. 소심하고 어두운 성격에 드러내놓고 뭐라 말 할 수도 없으면서, 안보는 척 몰래 몰래 타인의 사생활을 지켜보면서 욕구를 해결하는 사람. 그런 취미에 걸맞게 밖에서 보이면 누가 지켜보는지도 모르는 다락방도 하나 가지고 있다.
안그래야지 안그래야지 하면서도 계속 눈이 갈수 밖에 없는 스물 두 살 젊고 아리따운 여자의 방.
보자 보자하니, 야한 비키니를 사와서 입어보질 않나, 목욕후에 수건 한장만 걸치고 돌아다니질 않나, 무방비한 상태로 잠들어있질 않나.... 고개만 돌리면 맞은 편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어떤 남자라도 엿보기 욕망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한 남자. 주인공과 같은 재활원 출신의 도둑이 하나 등장하고, 우연히 발딛게 된 201호실 여자의 집에서 이 도둑은 그녀의 일기를 훔쳐보게 된다.
여러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알수 없는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오리하라 이치의 "~자"시리즈는 반전을 너무 화려하게 넣으려던 나머지 다소 실망스러운 감이 있었는데, 역시 도착시리즈는 마음에 든다. 여러가지 각도에서 바라본 사건의 사각-죽은 지대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소설을 보면서 찾고 또 찾았는데도, 나는 그 사각의 일부만 예측할 수 있었다.
변화무쌍한 시점변화와 감각적인 반전이 멋진 소설이었다.
역시 도착 시리즈는 퍼즐 맞추는 재미로 보면 딱 좋을 흥미진진한 시리즈이다.

책을 다 보고 나니, "엿보기"라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주인공 남자의 엿보기 취미는 어쩌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도 앞집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꽤 자극적인 장면들이 자주 노출되고 있는데 그쪽에서 누군가 보고 있다는 의심도하지 않고,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것같다면, 몰래 훔쳐볼 것 같기도 하다.
그 예로, 소설에 등장하는 도둑이 우연히 읽게 된 201호실 여자의 일기가 궁금해 틈날 때마다 방에 숨어들어가 일기를 "훔쳐보지" 않는가. 또 그 사각(死角)에 존재하는 또다른 주인공 역시 이 혼란스러운 상황들을 총체적으로 훔쳐보고 있다.
<도착의 론도>에서 "도착"과 "도작"이 어지럽게 반복되면서 혼란을 주었던 것처럼, <도착의 사각>에서는 엿보기 속의 엿보기같은 형식을 취하면서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다.
참 재밌는 뇌구조를 가진 소설가이다.
감각과 기억의 왜곡만으로 이런 어지러운 반전이 계속되는 소설을 쓸수 있는 것도 엄청난 재능임에 틀림없다.

책, 영화, 드라마, 만화, 미술, 음악... 모든 예술이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갔던 이야기, 또는 환상속에서 벌어진 이야기, 상상하다보니 재밌어져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등등,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그저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손끝을 통해 배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은 예술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켜보고 즐기는 독자나 청중, 관람객은 타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 예술들을 통해 어쩌면 그 관음증적인 욕망을 다소 건전한 방법으로 해소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사람은 얼마나 엿보기를 좋아하는 동물인가?
모두가 관음증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가?
당신 바로 옆에 있는 사람, 앞에 있는 사람, 길에서 그냥 스쳐지나간 사람 모두 그 "엿보기"욕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인 이상, 살아있는 이상은 어쩔수 없는 것 같다.
호기심을 버리는 순간, 그 사람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 되어버릴테니...

p.s 책은 무척 재밌었는데, 책 말미에 가니까 엄청나게 짜증이 났다.
아...빌벨린저의 몇몇 소설에서 보던 그 봉인형태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제발 다음권부터는 봉인하지 말고 그냥 내달라고 출판사에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뜯는 동안 책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왠만하면 책을 깨끗이 보관하려는 나같은 독자에게는 성가신 일이 아닐수가 없다.
그나마 종이 하나를 덧대어 완전히 감싼 빌 벨린저판 봉인보다 더 심하게, 책장이 한장 한장 붙어있는 바람에
 지하철에서 마지막 읽다가 살살 뗀다고 떼어도 페이지가 이상하게 뜯겨져 나가더라. 흐흑....
간간히 마지막부터 확인하는 독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뜻하지 않게 반전이며 범인이며 다 알게되는 독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읽는 재미를 포기한 그 사람들의 실수이지 출판사의 실수는 아니지 않는가.
제발!!! 봉인본은 다시는 안볼수 있기를 바란다!!!!!
(게다가 이건 빌 벨린저 소설보다 더 지저분하게 뜯긴다고!!!!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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