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의미
마이클 콕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한 남자가 길에서 누군가를 죽인다. 그 살인이 너무 쉽고 가벼워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살인자의 이름은 에드워드 글랩손. 처절한 복수를 꿰하면서 그 복수에 대한 예행연습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
에드워드가 복수하려는 그의 적의 이름은 포이보스 돈트라고 한다.
에드워드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도 여전히 그를 붕괘시키려고 하고 있는 자.
이들의 악연의 시작은 어쩌면 탄생에서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에드워드의 본명은 에드워드 글리버였었다.
어린 시절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자랐지만, 혼자 몸으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소설을 써내려가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직업을 닮아 에드워드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사랑했다.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충만하지도 않았던 소박한 어린 시절, 어느날 어머니는 그를 이튼 칼리지에 보내고자 한다고 했다.
알려지지 않은 독지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이튼 칼리지에 다니게 된 책을 사랑하는 지적인 소년 에드워드 글리버의 미래은 그가 들어간 명문 학교의 명성만큼이나 밝은 것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그의 숙명의 적이 될 포이보스 돈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포이보스 돈트는 두 얼굴을 가진 인간이다. 이튼 칼리지에서 만난 동창이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지적이고 영리한 모습과는 다른 교활한 악인이었던 것이다.
포이보스 돈트의 악랄한 장난으로 에드워드 글리버는 이튼 칼리지에서 퇴학당하고 만다.
그에게 주어져있었을지도 모르는 풍족한 미래와 명성을 빼앗겨버리고, 에드워드 글리버는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
급기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에게서 받을 유산 같은 것도 없었던 에드워드의 현실은 막막하기만 할 뿐이다.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기만 했다면, 쉽게 들어왔을 직장들이 하나둘씩 그에게서 멀어지고, 지식인도, 노동자도 아닌 어중간한 에드워드가 세상에 낄 곳은 아무데도 없는 듯 했다.
이 모든 것이 포이보스 돈트의 생각없는 장난에서 비롯된 일.
더이상 어쩔수 없는 무기력과 절망에 빠진 에드워드와는 달리, 포이보스 돈트는 떠오르는 신인 작가로 명성을 얻게된다.
어쩌면 에드워드가 가졌어야 했을 그 자리를, 그를 모함해 인생을 파멸시킨 포이보스 돈트가 가지게 된 것이다.
결코 포이보스 돈트에게 호의를 가질수 없는 상태에서 에드워드는 더더욱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알게된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중 그녀의 일기장을 읽게된 후, 에드워드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된다.
친모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어머니는 자신의 양모였을 뿐, 자신의 진짜 가족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의 가족은 영국에서 가장 명망높은 귀족중 하나인 텐저경이었다.
명예와 돈, 세상 모든 것을 거머쥔 텐저경에게는 자식이 없다. 그는 자신의 숨겨진 자식이 (그것도 정통혈통의) 어디선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가문의 명예와 존속을 위해 후계자를 반드시 만들어놓아야 했던 텐저경은 자신의 교구 목사의 아들 포이보스 돈트를 마음에 들어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지위를 넘겨줄 생각까지 한다.
교활하게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포이보스 돈트의 계략들.
그리고 그 포이보스 돈트에 의해 자신에게 보장되어있던 미래를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진짜 아버지마저 빼앗길 위치에 처한 에드워드 글리버.
이제부터 두 남자의 치밀하고 처절한 복수극이 막을 열었다.


포이보스 돈트의 말처럼 "복수는 기억력이 좋다".
한 사람의 인생에 오로지 행복뿐이거나 오로지 불행뿐인 것만은 아니지만, 유독 불행은 더더욱 기억력이 좋다.
한 여자의 잔인한 복수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에드워드 글리버의 기억속에서, 그의 양모는 항상 좋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소설을 쓰다 지쳐 잠이 든 모습, 자신에게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던 모습, 그를 걱정해주던 양모의 따스한 눈길.
그런 것들이 분명 기억속에 켜켜히 남아있을텐데도, 욕망이라는 것은,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복수에 목숨을 바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리석으면서도, 다분히 인간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부처가 될수 없으니, 내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에 대단한 부와 명예가 걸려있다면 어떻게서든 밝혀내고 앞으로 나서고 싶을 것이다.

마이클 콕스의 <밤의 의미>에 등장하는 두 청년 에드워드 글리버와 포이보스 돈트는 서로를 증오하고 경계하면서도 무척 닮아있는 인물이다. 부와 명예, 그리고 비밀로 한없이 끌려들어가는 나방처럼 그들은 위험도 잊은 채 비밀을 파고들거나 비밀을 은폐하려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다른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와 명예와 복수.
모든 것은 욕망에서 비롯된 일. 두 세대를 뛰어넘어서까지 이어지는 욕망과 배신과 복수들의 핵에는 사랑과 믿음이 존재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배신을 참을수 없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깜빡 속아 넘어가버릴수 밖에 없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간악한 짓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욕망이 현실적인 욕망과 결부되었을 때, 그것이 어찌나 추하고 잔인하게 서로를 망가뜨리던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아직까지도 효력을 얻는 것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에 대한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복수와 배신이 판을 치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복수가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책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은 거의 소극적이던, 적극적이던 자기만의 복수를 하면서 살아간다.
에드워드 글리버는 포이보스 돈트에게, 포이보스 돈트는 에드워드 글리버에게, 미스 카터릿은 에드워드 글리버와 자신의 아버지에게, 레이디 텐저는 자신의 남편에게, 레이디 텐저의 변호사였던 트레드골드는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어쩌면 사랑하는 레이디 텐저를 가진 텐저경에게 그 나름대로의 복수를 행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복수와 배신의 끝에서, 작가는 그들에게 나름의 죄값을 치루게 만든다.
그들의 복수는 거의 모두 성공적으로 실행되었으나, 그들중 어느 누구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행복이라는 것의 바탕에 오차없이 깨끗한 부와 명예가 깔려있다면, 더이상 바랄 나위 없이 복받은 인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삶이 그렇게 쉽게 무언가를 내어주던가.
삶이라는 악마는 하나를 내어주면 하나를 빼앗아가버리는 잔악한 존재인 것이다.
부와 명예가 있으면 소박한 행복을 잃게 마련이고, 소박함속에 남겨진 사람은 부와 명예를 헛되이 꿈꾸게 된다.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는 현명한 사람이 될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부처도 공자도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근래 보기힘든 걸작에 가까운 소설로, 읽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소설은 아니었다. 어떤 소설들은 읽다가 지루해진다 싶으면 더이상의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기도 하는데, 희한하게 이 책은 초반부부터 중반부까지가 무척 지루한데도 계속 읽게 되더라.
그리고 책의 말미에 가서야 진정한 이 책의 재미와 이 책이 이렇게까지 두꺼운 이유를 비로소 알게된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깔려있는 배경지식이었다는 사실. 이렇게 방대한 분량에 녹아들어가 있는 어떤 정보도 헛된 것은 없더라.
마이클 콕스는 이 책을 30년간 집필했다고 한다. 과연 그 노력이 눈부신 결실로 맺어진 것 같다.
오랜 세월 연구하고 책을 써낸 보람이 있게, 책은 몹시 장엄하고 중후하며, 이야기는 통속적인 동시에 처절하고 아름답다.
책밖으로 흘러넘치던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어마어마한 정보와 입체적인 캐릭터들, 통속적인 드라마인 동시에 한 가문의 이야기까지 다루는 깊이감 또한 훌륭하다.
빅토리아 시대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거부할수 없는 책이 되리라고 장담하고 싶다.
빅토리아조 소설을 워낙 좋아하는 나로써는 정신없이 빨려들어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삼켜버리고, 에드워드가 마지막으로 흘렸던 눈물에서 거대한 감동을 받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꽤 짠한 후폭풍속에서 한동안 잠이 들지 못했으니, 적어도 내게만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매력적인 소설이라고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마이클 콕스는 <밤의 의미>의 속편격의 이야기를 구상중이라고 한다.
비록 이 책은 초반부의 지루함덕에 천천히 읽었지만, 속편격의 작품은 열렬히 기다릴수 있을 것 같다.
이 후에, 이 매력적인 주인공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될까.
그들의 인생에는 또 어떤 폭풍같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지.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행위인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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