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사이코 - 상 밀리언셀러 클럽 15
브렛 이스턴 엘리스 지음, 이옥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남자는 여피족이다. 젊고, 잘생긴데다가 부유하고 학력높고 능력도 좋고, 언변도 훌륭하며, 옷차림은 누구보다도 세련되어서 어딜가나 눈에 띄며, 여자들은 이 남자를 보면 데이트 하고 싶어 온몸을 베베 꼴 지경이다.
그리고 이 남자는 그 여자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지루하거나, 하룻밤 데리고 놀기 좋거나, 또는 오늘밤의 희생량으로 삼기 좋겠다고.
완벽한 외향을 입고 매순간 살인을 꿈꾸는 남자 패트릭 베이트먼이 그렇다.

베이트먼의 과거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작가가 얘기 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
단지 독자가 알수 있는 것은, 베이트먼이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점과, 그 태생적인 부유함으로 지금까지도 부유하다는 것, 무척 보기 좋은 직업을 가졌다는 것 쯤이다.
혹여, 그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말도 못할 상처를 입어서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던지, 또는 청소년기의 어떤 중요한 사건으로 인해 피에 집착하게 되었다든지, 그런 것은 조금도 알수 없다. 그리고 그 알수 없음은 대단한 공포이다.
그 어떤 가능성중에서도 살인의 이유중에 "아무 이유 없이 그러고 싶어서."라는 대답이 나온다는 것만큼 끔찍한 공포가 또 있을까.
무엇 때문에 미쳤어? 그냥 미쳤어, 그냥.

영화를 생각하고 본다면 큰 코 다칠 정도로 고어한 <아메리칸 사이코>. 19금을 달고 나온 것도 모자라, 판매금지까지 당한 문제작이다. 그러한 조치가 잘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어쩌면 이 책을 고를 독자를 위해 책장을 펼치기전, 왜 이 책이 그런 대우를 받아야만 했을까 생각해보시라고, 마음 단단히 먹는게 좋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 책들보다도 잔혹한데, 이건 정말 상상 초월이어서, 고어물에 꽤 담담한 편인데도 읽다가 구토가 밀려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가치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읽는데 이런 점 쯤은 염두해두고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베이트먼과 그의 친구들은 긴 두권의 책 내내 시종일관 두서없는 잡담들을 늘어놓는다. 자기 말을 못해 죽을 것 같은 사람처럼. 어떨 때는 (아니, 꽤 자주-) 그들에게 대화란 남의 말을 듣기 위해서가 내 말을 늘어놓기 위한 것 같다. 책속의 모든 대화들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
끊임없이 온갖 명품들과 상품들의 상표를 나열하고, 넥타이를 어떻게 메느냐, 이런 바지에는 어떤 양말을 신어야 하느냐가 업무보다 중요하고, 그닥 재밌게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매일매일 하루 일과중 하나인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오늘 "패티 윈터스 쇼" 얘기, 사장님이라고는 부르나 대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수 없는 주인공(회사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이 저녁식사를 할 식당을 예약하는 전화같다.).
별 필요도 없는 얘기로 독자를 갑갑함에 미쳐버리게 하는 강박증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더욱 심해져, 패트릭 베이트먼이 "더" 미쳐가는 과정을 좀더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모든 행위의 공회전과 모든 가치의 상품화. 그리고 인간도 상품도 되지 못해 괴물이 되어버는 남자.
이 책이 극명하게 드러내는 두가지 사실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미치도록 공허해진다.

패트릭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드러내는 것은 순간적인 감정일뿐, 자신의 진짜 내면의 무언가에 대해서는 책에서 털어놓지 않는다. 왜 살인이 하고싶어졌는지, 왜 이렇게 망가져버렸는지, 그냥 함구해버리는 가운데, 딱 한장면, 패트릭이 울부짖으면서 "나도 사랑받고 싶었다고."라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어쩌면 이 기나긴 이야기속에 감추어진 유일한 "진짜" 감정은 그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가 느끼는 그 모든 감정이 어떤 것을 갈구하고 있는지, 그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쉴세없이 나불대는 입 달린 명품 옷걸이같은 친구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보물상자 보 듯 자신을 활홀하게 바라보는 여자들.
패트릭이 그들을 옷 소재와 브랜드 이름으로 바라보듯, 그들 역시 패트릭을 그렇게 바라본다.
걸치고 있는 옷이 내가 되어버리는 기이한 현상.
패트릭의 어떤 친구가 말했듯이, "외형이 진짜 너"인 것이 되어버리는 지나친 상품화의 시대.
어떤 생각을 하고, 진짜 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피상적이고 매정한 사람들.
패트릭은 이런 세상에 점점 더 미쳐가기도 했고, 이 세상을 더 미치게 만드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왜 인지 모르게,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몹시 슬퍼진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썰고 먹기까지 한 사이코 살인마인데도, 그가 밉고 죽여버리고 싶다기보다는 이런 쓰레기같은 인간조차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삶이 슬픈 것처럼. 누구에게나 세상이 가혹한 것처럼.
이 무지막지한 잔인한 행위들 속에 거대한 공허의 우물이 있었다.
어쩌다 빠져들었는데, 다시 위로 올라갈수도, 구해줄 사람도 없이, 계속 깊어지기만 하는 행위의 거대한 공허함이.

지나치게 잔인한 장면들이 있어서 힘겹기는 했지만, 책 자체는 무척 재밌었다.
아니, 그보다는 무척 잘 쓰여졌다고 보는 편이 좋겠다.
패트릭 베이트먼의 강박증을 보고있으려니 나도 코리안 사이코가 될 뻔했으니.
책을 읽고나니 여러가지 상념에 빠져들었는데, 그 어느 것도 답을 얻을수가 없었다. 아마 누구도 그 답을 알수는 없으리라.
초반에 작가가 첨부해놓은 토킹해즈의 노래 가삿말이 어쩌면 그 모든 상념들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산산히 부서지는데 아무도 신경 쓰질 않네."

패트릭은 정말 살인이 좋아서 사이코 살인마가 된 것일까.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흥분되기 때문이었을까.
왜 나는 그의 잔인무도한 살인 행위에서 욕망은 찾을수 있을 지언정, 성취감을 찾을수는 없었던 것일까. 왜 이 살인 행위들이 어떤 쇼핑 중독 여자가 마구잡이로 카드를 긁어놓고도 공허함에 시달리는 것과 비슷하게 보일까.
왜 이 모두가 삶의 무지막지한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행위처럼 보였을까.
무섭다. 소설도 무섭고, 이런 인간의 갚아룰 알 수 없는 감정의 늪이 무섭다.

p.s 1. 패트릭 베이트먼에게 어떤 여자가 "배트맨같은 호색한"이라고 부르던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영화를 이미 봤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패트릭은 자꾸 크리스찬 베일의 얼굴과 겹쳐보이더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화와는 많이 다르다. 소설쪽이 훨씬 더 깊다. 무서울 정도로.

p.s 2. 그놈의 "양모 소재의"는 아마 책속에 적어도 100번은 등장할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밀리언셀러 클럽 10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아, 재밌다! 몹시 재밌다!
지하철에서 읽다가 중요한 부분을 놓치기 싫어서, 지하철에서 내려서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벤치에 앉아서 읽고 갔다!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두번째 이야기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는 지금까지 읽어본 켄지-제나로 시리즈 중에서 가장 속력이 붙었던 책이고, <가라, 아이야, 가라> 다음으로 재밌었던 소설이다.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기이한 인연으로 거기에 얽히게된 켄지는 경찰과 협력하여 연쇄살인범을 찾아나서지만, 물론 현실에서도 그렇고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범인을 잡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와중에 사랑하는 여자의 가족이 협박을 당하고, 앤지가 협박을 당하고, 소중한 친구는 죽어나가고....
그래, 여기까지는 여타 다른 연쇄살인범을 다룬 스릴러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수도없이 쏟아져나왔던 연쇄살인범 관련 스릴러 소설들 중에서도 데니스 루헤인 소설이 더 특별했던 이유는 뭔지 아는가?
데니스 루헤인은 끊임없이 고뇌하고 절망하기 때문이다.
켄지-제나로 전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들은 결코 뻔하지 않은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 무엇보다 나 하고 싶은대로가 제일 우선인 뻔뻔하고 잔혹한 범죄자들, 폭력의 대물림에 대한 끝나지 않는 고뇌같은 것들이 되겠다.
아버지로 부터 폭력을 견디고 살아왔던 젊은이 켄지는 왜 폭력에서 자유로울수 없을까.
그 자신은 타인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인간은 되지 못하면서도, 그의 주위는 온통 폭력이다. 가장 친한 친구, 폭력을 옷처럼 걸치고 다니는 부바라던가, 어쩔수 없이 도움을 빌리게되는 온갖 종류의 조폭들, 직업적으로 접하게되는 여러가지 잔혹한 사건들.
이유없는 폭력을 증오하고, 자신이 살아온대로 자신이 보아온대로 행동하려 하지는 않는 남자앞에 펼쳐지는 주먹을 부르는 사건들. 그런데도 켄지는 폭력에서 자유로울수 있을까.

켄지-제나로 시리즈 어떤 책을 보아도 책에 등장하는 범죄자들은 켄지를 도발한다.
"내가 이러는데 니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수가 있을까? 너 역시 폭력적이지 않은 인간이라고 자부할수 있나?"라는 듯 비웃으면서.
이 질문은 켄지가 아니라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틈만 나면 뉴스에 등장하는 잔혹한 범죄자들의 어이없는 범행들을 보면서, 당신은 초연할수 있는가?
내 앞에서 누군가 고문을 당하고 죽어가는데도 당신은 고고하게 인권과 비폭력이나 되세김질 하고 있을수 있을까?
무고한 피해자의 목숨과 야비하기 짝이 없는 범죄자의 목숨은 똑같은 값을 지니고 있을까?
켄지-제나로 시리즈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런 정답없는 고뇌들에 있다.

켄지가 그렇게 말하듯, 평범한 우리들도 무고한 피해자와 잔학한 범죄자의 목숨이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인권을 가차없이 묵사발시켜버리는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굳이 누군가 죽어야한다면, 내게 그 선택권이 있다면 누구라도 범죄자의 목을 매달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폭력에서 자유로울수 있는가.
그래도 인간이라고 태어나 살고 있는 잔학한 범죄자들을 보며 욕을 하고 마음속으로 나마 폭력을 퍼부으면서, 폭력에서 자유로울수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왜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보복성 폭력 역시 폭력이기는 마찬가지 일텐데 말이다.

선과 악은 어떤 잣대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선하다며 살아가고 있는 누구나에게도 악은 있다.
누군가 내게 "악"을 저지르면, 나 역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악"을 저지를 수 밖에 없다.
왜냐면 당하고만 있으면 나는 악에 희생되는 인간이 되어버릴테니까. 누구도 그런 것은 원치 않는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세상을 살아가면서 접하는 수많은 범죄들을 바라보면서 키우게 되는 두려움과 마음속의 폭력들.
우리는 결코 폭력에서 자유로울수도, 폭력에 초연할수도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인간세상은 언제나 그래왔던 느낌이다. 아무리 철학을 논하고 사상을 논해도, 결국 우리는 짐승과 다름없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신의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부모들, 그 폭력을 대물림하거나 그 폭력을 거부했던 아이들, 부모의 눈을 피해 집밖으로 나와 자유를 찾으려던 아이들은 그런데도 그 폭력에서 결코 자유로워질수 없다.
부모가 폭력을 물려주었 듯, 아이들의 암흑은 결코 거치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자리잡아 또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 전염되겠지...
연쇄살인범들이 그랬고, 켄지와 제나로가 그랬듯이.
어둠과 손을 잡느냐, 어둠을 뿌리치느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를 대변하는 가치들이 생겨나게 되겠지만, 그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우리는 어둠에서 완전히 멀어질 수는 없다.
폭력은 두려움이고, 두려움은 어둠을 낳고, 어둠이 또다시 폭력을 낳는다.
우리는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를 끊지 못한 채 바보처럼 살아가고 있다.
참 잔인하고도 쓸쓸한 이야기이다.

켄지-제나로 시리즈 중에서는<가라, 아이야, 가라>와 함께 가장 재밌고 가장 피가 끓고 가장 처절하게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어쩌다보니 이제 켄지-제나로 시리즈는 거의 다 읽어서 <신정한 관계>하나 남았다.
시리즈가 출간되는대로 읽느라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지 않아서 켄지-제나로의 관계들이 헷갈리기도 해서 전 시리즈가 다 출간되면 언젠가 시간내서 차례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정말이지 가슴이 벅찰 정도로 멋진 책이지 않은가?

p.s. 날개에서부터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고 표기되어있는데, 책 내에 오자가 너무나 많아서 아쉽다.
맞춤법 실수부터, 문장기호 실수, 띄어쓰기, 오타까지- 조금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사람의 인생을 (-그것도 좋아하는 작가라던가 배우라던가 화가라던가의-)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은 무척 신비로운 일이다.
지나간 세대의 지나간 역사속에서 언젠가 내가 느꼈을 법한 감정을 읽는다면, 그것도 무척 특별한 일일테고.
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책보다 책 말미에 적혀진 코넬 울리치의 인생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았는지 모르겠다.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은 바로 얼마전에 다 읽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넬 울리치의 책들에 비해서는 다소 재미가 떨어지는 책이긴 했지만, 그래도 코넬 울리치의 책은 어떤 것이든 무조건 기다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실망하게 되는 책은 아니었다.
게다가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라니....제목부터 먹고 들어가지 않는가?

어느 날 형사 숀은 늘 그렇듯 강가를 걷다가, 자살하려는 한 여인을 구하게 된다. 이제 갓 20살된 미모의 여인, 명품으로 치장하고 값비싼 자동차를 타고다니는 이 여자는 왜 자살을 하려고 했을까.
그리고 밤새, 이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저 하늘에 떠있는 별이 두려워 삶을 끊으려고 했던 이유를...
부유한 남자의 외동딸인 진 레이드라는 이 여자는 어느 날 하녀로 부터 불길한 소리를 듣게 된다. 얼마 후 출장을 떠나게 되는 아버지 할란 레이드가 탄 비행기가 큰 사고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무시하면서도 진은 어쩐지 마음이 찜찜해 하녀를 해고하게 되고, 어버지는 출장길에 오른다.
자꾸 이상한 예언이 마음이 밟혀 불안불안해 하던 도중, 아버지가 탄 비행기는 진짜 사고를 당하게 되고, 탑승객 전원이 죽게된다.

비참하고 절망적인 심정으로 해고한 하녀를 찾아간 진은 하녀에게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는 불행한 일은 일어났으나 그는 살아돌아오게 될거라고 또다시 예언한다.
그리고 몇일후, 죽은줄로만 알았던 아버지는 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두 부녀는 불의의 사고를 예측한 예언자를 찾아가게 되고, 그의 능력을 은밀히 비웃고 있던 아버지 할란 레이드는 이 특별한 예언자 제레미야 톰킨스에게 완전히 매혹되고 만다.
그는 대박칠 주식을, 딸의 오래전에 사라졌던 물건을 눈앞에 보여주듯 이야기 해주고,
어느 날, 할란 레이드의 죽음까지 예언하고 만다.

코넬 울리치의 인생은 절망적이고 우울했다. 그가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한 작가여서가 아니라, 어쩌면 태생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예정된 죽음이 있었다고, 어린 시절부터 생각했다는 자, 그가 코넬 울리치였고, "예언"같은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껄이면서도 충분히 스릴감을 주고 있는 이런 소설을 쓰게된 것도 그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에는, 현실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오류가 들어있고, 너무나 환상적인 우연들이 겹겹히 겹친다.
그런데도 진부하지 않은 것, 조작된 트릭처럼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단연코 코넬 울리치의 필력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현실적이나 시적으로 표현되는 환상적인 장면들, 너무 당연하면서도 괜히 마음이 쓰이는 문장들, 아무것도 아닌데서도 아슬아슬한 스릴을 찾는 탁월한 연출, 아름다운 묘사력과 절망적인 표현들. 그 모든 코넬 울리치만의 매력들이 모두 담겨있는 책이다.
메마르지만 안개낀듯한 코넬 울리치의 글속을 헤메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의 절망과 우울을 엿본 기분이 든다.
그게 내가 코넬 울리치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히치콕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코넬 울리치를 꼽았던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뭐라도 좋으니 코넬 울리치 소설이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다. 코넬 울리치 선집은 왜 나오지 않는 걸까?
그래도 어느 정도 매니아층이 있는 소설가임은 분명한데 말이다.
코넬 울리치의 소설은 번역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줏어들은 적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소설의 번역은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코넬 울리치의 소설번역들 중에서도 조금 실망스러운 편이었다.
번역가의 재치와 센스가 조금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의 일
히라야마 유메아키 지음, 윤덕주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유니버셜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고백>을 처음 읽었을 때, 무척 독특한 작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도 그럴것이 광기의 한가운데에 조용히 서서 그 광경을 이야기 해주는 듯한 놀라울 정도의 초연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초연함이라면 오츠이치의 소설에서도 느낄수 있지만, 오츠이치의 소설속의 초연함이 "당연함, 어쩔수 없으니 내버려둘 수 밖에 없는 것"같은 느낌이라면,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소설속의 초연함은 "관망"같은 느낌이다.
그런 관망하는 시선과 딱 잘 어울리는 제목 "남의 일".
히라야마 유메아키는 <유니버셜...>에서보다 더 미친 이야기들을 들려주지만 결코 흥분하거나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그 점이 독특하다면 독특하고,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나도 이 책을 남의 일처럼 읽기로 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읽어야 다 읽어내려갈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첫 단편 두개쯤 읽어봤을때 나는 인간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을 어떤 관점으로 봐야할지 잘 모르겠었다. 악취미적으로 구경하는 듯 봐야하는지, 아니면 감정이입해서 나쁜 놈, 이런 무서운 일이 세상에! 하면서 봐야하는지, 작가는 뭘 의도하면서 이 책을 썼는지, 그런 것은 아무것도 모르겠더라.
그래서 그냥 남의 일처럼 읽기로 했다. 어디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데, 내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그 끔찍함도 잘 모르겠고, 어렴풋이 공포가 느껴지긴 하지만 몇일후면 잊어버릴- 그런 남의 일처럼.
그랬더니 다른 걸 다 떠나서, 그냥 얘기자체의 독특함에 취하게 되더라.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단편들을 모은 <남의 일>은 기본적으로 공포를 깔고 이야기들은 진행된다.
존속살해, 이지매 이야기, 자살소동, 유괴, 폭력 그리고 또 폭력, 폭력.
얘기만 들어도 끔찍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작가가 초연하듯, 주인공들 역시 초연하기 그지 없고, 상황은 불쾌하기 이를데 없다.
그래도 남의 일처럼 읽기로 했으니 남의 일처럼 읽어져서 광고에 써있듯이 "이 책을 읽으면 모든 희망을 잃게된다" 정도의 느낌은 아니고, 소재나 표현방식이 독특해서 불쾌하면서도 재밌었던 단편집 같다.
말 그대로 타인의 불행을 남의 일처럼 관망하는 <남의 일>, 힘들여 낳아놓았더니 히키코모리가 되어서 골치만 썩이는 거구이 아들을 살해하려는 부모가 등장하는 <자식해체>, 이 단편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마지막 한마디에 몸이 차게 식어버리는 <딱 한입에>, 어느 날 고양이가 물어온 손가락에서 "살려줘!"라는 기묘한 말을 발견하게 되는 <전서묘>, 이지메에 대한 나름 독특한 해석과 발상의 전환을 하게만들었던 <레제데는 무서워>, 자살하는 여자의 앞에 나타나서 자살을 막으려는 남자가 등장하는, 그러나 막판의 어이없고 화나는 반전이 존재하는 <인간 실격> 정도가 재밌게 보았던 단편이다.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어머니와 톱니바퀴>이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하는 여자친구의 손을 이끌고 같이 바다를 보러가게된 주인공. 그러나 함께 도피한 여자친구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매시간 썩어가는 그녀를 데리고 그는 여자친구에게 자신도 죽어가고 있다고, 너만 시체일리는 없다고 그렇게 되뇌여도, 자신은 살아있고, 그녀는 사그라 들어져간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떠올리면 무척 끔찍하고 징그럽고 혐오스러울수 없는 상황이 떠올려지는데, 희한하게 애달프고 아련한 기분이 든다. <유니버셜...>에 실린 단편 "Ω의 성찬"과는 소재가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유독 나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나보다.
공포속에 존재하는 쓸쓸함 같은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아니스트 - The Piano Teach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날 것"이라는 단어의 느낌이 주는 하드코어의 느낌이 가득한 영화 <피아니스트>.
제목만큼 결코 우아하지 않고, 포스터만큼 에로틱하지 않다. 불편한 기묘함과 가공되지 않은 직설적임 속에 숨은 너무 소박해서 안타까운 슬픔이 이 영화를 지배하는 힘이라고 볼수 있다.

여기 안타까운 노처녀 에리카가 있다.
나이 마흔, 나름대로 성공한 부류의 피아노과 교수. 그 나이 성공한 노처녀들이 대게 그렇듯 깐깐하고 완벽주의자적이며, 지적이고 정갈한 느낌이 드는 여자이다. 남자친구도 없고 사생활도 없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어머니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함께 늙어가는 딸의 모든 것을 지켜봐야 직성이 풀리는 의심쟁이 어머니는 딸의 사생활은 철저히 감시할 망정, 딸의 감정에는 귀기울이지 않는다.
연애 한번 해본 적 없이 자신에게 주어지고 어머니가 그러길 바랬던 이미지대로 살았던 딸은 그 과정에서 미쳐갔던 것일까.
누구나 그렇게 사는대로, 남들이 사는대로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그녀는 이런 변태성욕자가 되지는 않았을 터.
완벽한 겉모습뒤에 숨겨진 그녀의 엄청난 욕망들은 평범한 사람의 그것과는 달리 한참 삐뚤어지고 역겨운 방식으로 표출된다. 타인의 카섹스를 훔쳐보거나, 자해하거나, 혼자 포르노 DVD방에 들어가 포르노를 보거나. 섬뜩할 정도로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그녀의 은밀한 욕망들이 그저 그녀 혼자의 것이고 평생 감추어져 있었던 거라면 어쩌면 괜찮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는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고 잔인하게도 그녀를 사랑에 빠뜨려버린다.
아들뻘 되는 공대생 클레메.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그녀를 동경하며 사랑하게 되는 이 건강한 청년은 자신의 사심을 꺼릴길 것 없이 털어놓는다.
어쩌면 클레메가 그녀를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에리카가 클레메를 동경했던 것을 아닐까.
그의 솔직한 욕구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소박한 욕구들이 어찌 클레메에게만 있는 것인지.
그와 똑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표현할줄 모르고, 어떤 표현이 올바른 것인지 알지 못하는 이 노처녀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에게 자신을 들어내게 된다.
폭력과 강간. 사랑도 아닌 이상한 관계를 요구하면서, 그 얘기를 듣고 아연실색해 지쳐 나가떨어지는 클레메에게 매저키스트처럼 달라붙어 자신을 모욕해주기를 바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녀의 매저키스트적인 욕망이 그녀의 어머니가 해왔던 억압에서 오는 건지,
매저키스트적인 성질이 그녀를 억압받게 했던 것인지 알수 없다.
누군가의 허락과 매질이 필요한 나약한 여자.
사람으로 태어나 그런 대우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은 있어서는 안되지만, 본인 스스로가 그것을 원할 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진짜 악이든, 혹은 위악이든, 에리카에게 필요했던 것은 상대방의 악에서오는 자기 위안이 아니었을까.
혼나고 인정받아야 그제서야 안심되는 성향. 학습된 억압에서 오는 무력감과 심리적 쾌락.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다.

영화 내내 짜증날 정도로 불쾌하면서도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던 것은 영화에서 뻔뻔히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은밀한 방식으로 표현되던 그녀의 소박한 사랑에 대한 열망이었던 것이다.
에리카가 늘 완벽하게 틀어올리던 머리를 풀던 순간, 자기 나름대로 화사한 색깔의 옷을 골라입기 시작했던 순간,
그것이 사랑에 빠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클레메는 왜 알지 못했을까.
자신을 기형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듯한 에리카의 태도에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시하던 클레메는 그런 사소한 순간들을 놓쳐버리고, 겉으로 보여지는 그녀의 기행에만 관심을 가졌었던 느낌이 든다.
하긴, 완벽주의자 노처녀로 보였던 그녀를 사랑했을 만큼, 그는 내면까지 사랑할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는 젊은이에 불과했는지도 모르지.

참으로 비참하게 잔혹했던 영화이다. 영화는 괜찮게 봤는데, 너무 끔찍하고 비참해서 두번 다시 보고싶지는 않다.
예전부터 괜히 눈에 밟히던 영화라 이번기회에 보게되었는데, 감독이 미하일 하네케였다.
역시 불편한 감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