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 The Piano Teach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날 것"이라는 단어의 느낌이 주는 하드코어의 느낌이 가득한 영화 <피아니스트>.
제목만큼 결코 우아하지 않고, 포스터만큼 에로틱하지 않다. 불편한 기묘함과 가공되지 않은 직설적임 속에 숨은 너무 소박해서 안타까운 슬픔이 이 영화를 지배하는 힘이라고 볼수 있다.

여기 안타까운 노처녀 에리카가 있다.
나이 마흔, 나름대로 성공한 부류의 피아노과 교수. 그 나이 성공한 노처녀들이 대게 그렇듯 깐깐하고 완벽주의자적이며, 지적이고 정갈한 느낌이 드는 여자이다. 남자친구도 없고 사생활도 없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어머니만이 있을 뿐이다.
이제 함께 늙어가는 딸의 모든 것을 지켜봐야 직성이 풀리는 의심쟁이 어머니는 딸의 사생활은 철저히 감시할 망정, 딸의 감정에는 귀기울이지 않는다.
연애 한번 해본 적 없이 자신에게 주어지고 어머니가 그러길 바랬던 이미지대로 살았던 딸은 그 과정에서 미쳐갔던 것일까.
누구나 그렇게 사는대로, 남들이 사는대로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그녀는 이런 변태성욕자가 되지는 않았을 터.
완벽한 겉모습뒤에 숨겨진 그녀의 엄청난 욕망들은 평범한 사람의 그것과는 달리 한참 삐뚤어지고 역겨운 방식으로 표출된다. 타인의 카섹스를 훔쳐보거나, 자해하거나, 혼자 포르노 DVD방에 들어가 포르노를 보거나. 섬뜩할 정도로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그녀의 은밀한 욕망들이 그저 그녀 혼자의 것이고 평생 감추어져 있었던 거라면 어쩌면 괜찮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는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고 잔인하게도 그녀를 사랑에 빠뜨려버린다.
아들뻘 되는 공대생 클레메.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그녀를 동경하며 사랑하게 되는 이 건강한 청년은 자신의 사심을 꺼릴길 것 없이 털어놓는다.
어쩌면 클레메가 그녀를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에리카가 클레메를 동경했던 것을 아닐까.
그의 솔직한 욕구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소박한 욕구들이 어찌 클레메에게만 있는 것인지.
그와 똑같은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표현할줄 모르고, 어떤 표현이 올바른 것인지 알지 못하는 이 노처녀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에게 자신을 들어내게 된다.
폭력과 강간. 사랑도 아닌 이상한 관계를 요구하면서, 그 얘기를 듣고 아연실색해 지쳐 나가떨어지는 클레메에게 매저키스트처럼 달라붙어 자신을 모욕해주기를 바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녀의 매저키스트적인 욕망이 그녀의 어머니가 해왔던 억압에서 오는 건지,
매저키스트적인 성질이 그녀를 억압받게 했던 것인지 알수 없다.
누군가의 허락과 매질이 필요한 나약한 여자.
사람으로 태어나 그런 대우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은 있어서는 안되지만, 본인 스스로가 그것을 원할 때는 어떻게 해야하지.
진짜 악이든, 혹은 위악이든, 에리카에게 필요했던 것은 상대방의 악에서오는 자기 위안이 아니었을까.
혼나고 인정받아야 그제서야 안심되는 성향. 학습된 억압에서 오는 무력감과 심리적 쾌락.
끔찍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다.

영화 내내 짜증날 정도로 불쾌하면서도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던 것은 영화에서 뻔뻔히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은밀한 방식으로 표현되던 그녀의 소박한 사랑에 대한 열망이었던 것이다.
에리카가 늘 완벽하게 틀어올리던 머리를 풀던 순간, 자기 나름대로 화사한 색깔의 옷을 골라입기 시작했던 순간,
그것이 사랑에 빠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클레메는 왜 알지 못했을까.
자신을 기형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듯한 에리카의 태도에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시하던 클레메는 그런 사소한 순간들을 놓쳐버리고, 겉으로 보여지는 그녀의 기행에만 관심을 가졌었던 느낌이 든다.
하긴, 완벽주의자 노처녀로 보였던 그녀를 사랑했을 만큼, 그는 내면까지 사랑할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는 젊은이에 불과했는지도 모르지.

참으로 비참하게 잔혹했던 영화이다. 영화는 괜찮게 봤는데, 너무 끔찍하고 비참해서 두번 다시 보고싶지는 않다.
예전부터 괜히 눈에 밟히던 영화라 이번기회에 보게되었는데, 감독이 미하일 하네케였다.
역시 불편한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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