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사이코 - 상 밀리언셀러 클럽 15
브렛 이스턴 엘리스 지음, 이옥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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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는 여피족이다. 젊고, 잘생긴데다가 부유하고 학력높고 능력도 좋고, 언변도 훌륭하며, 옷차림은 누구보다도 세련되어서 어딜가나 눈에 띄며, 여자들은 이 남자를 보면 데이트 하고 싶어 온몸을 베베 꼴 지경이다.
그리고 이 남자는 그 여자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지루하거나, 하룻밤 데리고 놀기 좋거나, 또는 오늘밤의 희생량으로 삼기 좋겠다고.
완벽한 외향을 입고 매순간 살인을 꿈꾸는 남자 패트릭 베이트먼이 그렇다.

베이트먼의 과거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작가가 얘기 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 같다.
단지 독자가 알수 있는 것은, 베이트먼이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점과, 그 태생적인 부유함으로 지금까지도 부유하다는 것, 무척 보기 좋은 직업을 가졌다는 것 쯤이다.
혹여, 그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말도 못할 상처를 입어서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던지, 또는 청소년기의 어떤 중요한 사건으로 인해 피에 집착하게 되었다든지, 그런 것은 조금도 알수 없다. 그리고 그 알수 없음은 대단한 공포이다.
그 어떤 가능성중에서도 살인의 이유중에 "아무 이유 없이 그러고 싶어서."라는 대답이 나온다는 것만큼 끔찍한 공포가 또 있을까.
무엇 때문에 미쳤어? 그냥 미쳤어, 그냥.

영화를 생각하고 본다면 큰 코 다칠 정도로 고어한 <아메리칸 사이코>. 19금을 달고 나온 것도 모자라, 판매금지까지 당한 문제작이다. 그러한 조치가 잘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어쩌면 이 책을 고를 독자를 위해 책장을 펼치기전, 왜 이 책이 그런 대우를 받아야만 했을까 생각해보시라고, 마음 단단히 먹는게 좋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어떤 책들보다도 잔혹한데, 이건 정말 상상 초월이어서, 고어물에 꽤 담담한 편인데도 읽다가 구토가 밀려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가치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읽는데 이런 점 쯤은 염두해두고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주인공 베이트먼과 그의 친구들은 긴 두권의 책 내내 시종일관 두서없는 잡담들을 늘어놓는다. 자기 말을 못해 죽을 것 같은 사람처럼. 어떨 때는 (아니, 꽤 자주-) 그들에게 대화란 남의 말을 듣기 위해서가 내 말을 늘어놓기 위한 것 같다. 책속의 모든 대화들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
끊임없이 온갖 명품들과 상품들의 상표를 나열하고, 넥타이를 어떻게 메느냐, 이런 바지에는 어떤 양말을 신어야 하느냐가 업무보다 중요하고, 그닥 재밌게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매일매일 하루 일과중 하나인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오늘 "패티 윈터스 쇼" 얘기, 사장님이라고는 부르나 대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수 없는 주인공(회사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이 저녁식사를 할 식당을 예약하는 전화같다.).
별 필요도 없는 얘기로 독자를 갑갑함에 미쳐버리게 하는 강박증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더욱 심해져, 패트릭 베이트먼이 "더" 미쳐가는 과정을 좀더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모든 행위의 공회전과 모든 가치의 상품화. 그리고 인간도 상품도 되지 못해 괴물이 되어버는 남자.
이 책이 극명하게 드러내는 두가지 사실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미치도록 공허해진다.

패트릭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드러내는 것은 순간적인 감정일뿐, 자신의 진짜 내면의 무언가에 대해서는 책에서 털어놓지 않는다. 왜 살인이 하고싶어졌는지, 왜 이렇게 망가져버렸는지, 그냥 함구해버리는 가운데, 딱 한장면, 패트릭이 울부짖으면서 "나도 사랑받고 싶었다고."라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어쩌면 이 기나긴 이야기속에 감추어진 유일한 "진짜" 감정은 그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가 느끼는 그 모든 감정이 어떤 것을 갈구하고 있는지, 그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쉴세없이 나불대는 입 달린 명품 옷걸이같은 친구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보물상자 보 듯 자신을 활홀하게 바라보는 여자들.
패트릭이 그들을 옷 소재와 브랜드 이름으로 바라보듯, 그들 역시 패트릭을 그렇게 바라본다.
걸치고 있는 옷이 내가 되어버리는 기이한 현상.
패트릭의 어떤 친구가 말했듯이, "외형이 진짜 너"인 것이 되어버리는 지나친 상품화의 시대.
어떤 생각을 하고, 진짜 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피상적이고 매정한 사람들.
패트릭은 이런 세상에 점점 더 미쳐가기도 했고, 이 세상을 더 미치게 만드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왜 인지 모르게,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몹시 슬퍼진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썰고 먹기까지 한 사이코 살인마인데도, 그가 밉고 죽여버리고 싶다기보다는 이런 쓰레기같은 인간조차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삶이 슬픈 것처럼. 누구에게나 세상이 가혹한 것처럼.
이 무지막지한 잔인한 행위들 속에 거대한 공허의 우물이 있었다.
어쩌다 빠져들었는데, 다시 위로 올라갈수도, 구해줄 사람도 없이, 계속 깊어지기만 하는 행위의 거대한 공허함이.

지나치게 잔인한 장면들이 있어서 힘겹기는 했지만, 책 자체는 무척 재밌었다.
아니, 그보다는 무척 잘 쓰여졌다고 보는 편이 좋겠다.
패트릭 베이트먼의 강박증을 보고있으려니 나도 코리안 사이코가 될 뻔했으니.
책을 읽고나니 여러가지 상념에 빠져들었는데, 그 어느 것도 답을 얻을수가 없었다. 아마 누구도 그 답을 알수는 없으리라.
초반에 작가가 첨부해놓은 토킹해즈의 노래 가삿말이 어쩌면 그 모든 상념들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산산히 부서지는데 아무도 신경 쓰질 않네."

패트릭은 정말 살인이 좋아서 사이코 살인마가 된 것일까.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흥분되기 때문이었을까.
왜 나는 그의 잔인무도한 살인 행위에서 욕망은 찾을수 있을 지언정, 성취감을 찾을수는 없었던 것일까. 왜 이 살인 행위들이 어떤 쇼핑 중독 여자가 마구잡이로 카드를 긁어놓고도 공허함에 시달리는 것과 비슷하게 보일까.
왜 이 모두가 삶의 무지막지한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행위처럼 보였을까.
무섭다. 소설도 무섭고, 이런 인간의 갚아룰 알 수 없는 감정의 늪이 무섭다.

p.s 1. 패트릭 베이트먼에게 어떤 여자가 "배트맨같은 호색한"이라고 부르던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영화를 이미 봤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패트릭은 자꾸 크리스찬 베일의 얼굴과 겹쳐보이더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화와는 많이 다르다. 소설쪽이 훨씬 더 깊다. 무서울 정도로.

p.s 2. 그놈의 "양모 소재의"는 아마 책속에 적어도 100번은 등장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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