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의미
마이클 콕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한 남자가 길에서 누군가를 죽인다. 그 살인이 너무 쉽고 가벼워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살인자의 이름은 에드워드 글랩손. 처절한 복수를 꿰하면서 그 복수에 대한 예행연습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
에드워드가 복수하려는 그의 적의 이름은 포이보스 돈트라고 한다.
에드워드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도 여전히 그를 붕괘시키려고 하고 있는 자.
이들의 악연의 시작은 어쩌면 탄생에서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에드워드의 본명은 에드워드 글리버였었다.
어린 시절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자랐지만, 혼자 몸으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소설을 써내려가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직업을 닮아 에드워드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사랑했다.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충만하지도 않았던 소박한 어린 시절, 어느날 어머니는 그를 이튼 칼리지에 보내고자 한다고 했다.
알려지지 않은 독지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이튼 칼리지에 다니게 된 책을 사랑하는 지적인 소년 에드워드 글리버의 미래은 그가 들어간 명문 학교의 명성만큼이나 밝은 것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그의 숙명의 적이 될 포이보스 돈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포이보스 돈트는 두 얼굴을 가진 인간이다. 이튼 칼리지에서 만난 동창이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지적이고 영리한 모습과는 다른 교활한 악인이었던 것이다.
포이보스 돈트의 악랄한 장난으로 에드워드 글리버는 이튼 칼리지에서 퇴학당하고 만다.
그에게 주어져있었을지도 모르는 풍족한 미래와 명성을 빼앗겨버리고, 에드워드 글리버는 한없이 추락하고 만다.
급기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에게서 받을 유산 같은 것도 없었던 에드워드의 현실은 막막하기만 할 뿐이다.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기만 했다면, 쉽게 들어왔을 직장들이 하나둘씩 그에게서 멀어지고, 지식인도, 노동자도 아닌 어중간한 에드워드가 세상에 낄 곳은 아무데도 없는 듯 했다.
이 모든 것이 포이보스 돈트의 생각없는 장난에서 비롯된 일.
더이상 어쩔수 없는 무기력과 절망에 빠진 에드워드와는 달리, 포이보스 돈트는 떠오르는 신인 작가로 명성을 얻게된다.
어쩌면 에드워드가 가졌어야 했을 그 자리를, 그를 모함해 인생을 파멸시킨 포이보스 돈트가 가지게 된 것이다.
결코 포이보스 돈트에게 호의를 가질수 없는 상태에서 에드워드는 더더욱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알게된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중 그녀의 일기장을 읽게된 후, 에드워드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된다.
친모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어머니는 자신의 양모였을 뿐, 자신의 진짜 가족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의 가족은 영국에서 가장 명망높은 귀족중 하나인 텐저경이었다.
명예와 돈, 세상 모든 것을 거머쥔 텐저경에게는 자식이 없다. 그는 자신의 숨겨진 자식이 (그것도 정통혈통의) 어디선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가문의 명예와 존속을 위해 후계자를 반드시 만들어놓아야 했던 텐저경은 자신의 교구 목사의 아들 포이보스 돈트를 마음에 들어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지위를 넘겨줄 생각까지 한다.
교활하게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포이보스 돈트의 계략들.
그리고 그 포이보스 돈트에 의해 자신에게 보장되어있던 미래를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진짜 아버지마저 빼앗길 위치에 처한 에드워드 글리버.
이제부터 두 남자의 치밀하고 처절한 복수극이 막을 열었다.


포이보스 돈트의 말처럼 "복수는 기억력이 좋다".
한 사람의 인생에 오로지 행복뿐이거나 오로지 불행뿐인 것만은 아니지만, 유독 불행은 더더욱 기억력이 좋다.
한 여자의 잔인한 복수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에드워드 글리버의 기억속에서, 그의 양모는 항상 좋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소설을 쓰다 지쳐 잠이 든 모습, 자신에게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던 모습, 그를 걱정해주던 양모의 따스한 눈길.
그런 것들이 분명 기억속에 켜켜히 남아있을텐데도, 욕망이라는 것은,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복수에 목숨을 바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어리석으면서도, 다분히 인간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부처가 될수 없으니, 내 출생의 비밀이라는 것에 대단한 부와 명예가 걸려있다면 어떻게서든 밝혀내고 앞으로 나서고 싶을 것이다.

마이클 콕스의 <밤의 의미>에 등장하는 두 청년 에드워드 글리버와 포이보스 돈트는 서로를 증오하고 경계하면서도 무척 닮아있는 인물이다. 부와 명예, 그리고 비밀로 한없이 끌려들어가는 나방처럼 그들은 위험도 잊은 채 비밀을 파고들거나 비밀을 은폐하려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다른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와 명예와 복수.
모든 것은 욕망에서 비롯된 일. 두 세대를 뛰어넘어서까지 이어지는 욕망과 배신과 복수들의 핵에는 사랑과 믿음이 존재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배신을 참을수 없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깜빡 속아 넘어가버릴수 밖에 없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간악한 짓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욕망이 현실적인 욕망과 결부되었을 때, 그것이 어찌나 추하고 잔인하게 서로를 망가뜨리던지...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아직까지도 효력을 얻는 것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에 대한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복수와 배신이 판을 치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복수가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책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은 거의 소극적이던, 적극적이던 자기만의 복수를 하면서 살아간다.
에드워드 글리버는 포이보스 돈트에게, 포이보스 돈트는 에드워드 글리버에게, 미스 카터릿은 에드워드 글리버와 자신의 아버지에게, 레이디 텐저는 자신의 남편에게, 레이디 텐저의 변호사였던 트레드골드는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어쩌면 사랑하는 레이디 텐저를 가진 텐저경에게 그 나름대로의 복수를 행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복수와 배신의 끝에서, 작가는 그들에게 나름의 죄값을 치루게 만든다.
그들의 복수는 거의 모두 성공적으로 실행되었으나, 그들중 어느 누구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행복이라는 것의 바탕에 오차없이 깨끗한 부와 명예가 깔려있다면, 더이상 바랄 나위 없이 복받은 인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삶이 그렇게 쉽게 무언가를 내어주던가.
삶이라는 악마는 하나를 내어주면 하나를 빼앗아가버리는 잔악한 존재인 것이다.
부와 명예가 있으면 소박한 행복을 잃게 마련이고, 소박함속에 남겨진 사람은 부와 명예를 헛되이 꿈꾸게 된다.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는 현명한 사람이 될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부처도 공자도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근래 보기힘든 걸작에 가까운 소설로, 읽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소설은 아니었다. 어떤 소설들은 읽다가 지루해진다 싶으면 더이상의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기도 하는데, 희한하게 이 책은 초반부부터 중반부까지가 무척 지루한데도 계속 읽게 되더라.
그리고 책의 말미에 가서야 진정한 이 책의 재미와 이 책이 이렇게까지 두꺼운 이유를 비로소 알게된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깔려있는 배경지식이었다는 사실. 이렇게 방대한 분량에 녹아들어가 있는 어떤 정보도 헛된 것은 없더라.
마이클 콕스는 이 책을 30년간 집필했다고 한다. 과연 그 노력이 눈부신 결실로 맺어진 것 같다.
오랜 세월 연구하고 책을 써낸 보람이 있게, 책은 몹시 장엄하고 중후하며, 이야기는 통속적인 동시에 처절하고 아름답다.
책밖으로 흘러넘치던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어마어마한 정보와 입체적인 캐릭터들, 통속적인 드라마인 동시에 한 가문의 이야기까지 다루는 깊이감 또한 훌륭하다.
빅토리아 시대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거부할수 없는 책이 되리라고 장담하고 싶다.
빅토리아조 소설을 워낙 좋아하는 나로써는 정신없이 빨려들어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삼켜버리고, 에드워드가 마지막으로 흘렸던 눈물에서 거대한 감동을 받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꽤 짠한 후폭풍속에서 한동안 잠이 들지 못했으니, 적어도 내게만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매력적인 소설이라고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마이클 콕스는 <밤의 의미>의 속편격의 이야기를 구상중이라고 한다.
비록 이 책은 초반부의 지루함덕에 천천히 읽었지만, 속편격의 작품은 열렬히 기다릴수 있을 것 같다.
이 후에, 이 매력적인 주인공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될까.
그들의 인생에는 또 어떤 폭풍같은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지.
오랜만에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행위인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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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사각 - 201호실의 여자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2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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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을 좋아하는 작가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시리즈 2편이다.
제목의 "도착"은 어딘가 도달한다는 뜻의 단어가 아니라 왜곡되고 변형된 것의 의미, 그리고 뒤에 붙은 "사각"은 사각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범위를 뜻하는 말이다. ("사각"이 그 사각인지 몰랐다. 사각형이 이어져있는 표지때문이기도 하리라.)
똑같은 뜻의 두가지 단어로 제목부터 혼란시키고, 전작 <도착의 론도>가 그랬듯, 이 책역시 막판에 가면 빙글빙글 뭐가 뭔지 모르겠는 어지럽고 화려한 텍스트 반전이 이어지는데, 사람 어지럽게 하는데 있어서는 최고의 작가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말장난도 마음에 들고 말이다.)

<도착의 론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딘가 불안정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처음부터 뭔가 수상한 낌새가 보이더니, 알고보니 이 남자는 알콜중독자여서 재활원에 들어갔다가 나온 상태였다.
다시 재활원에 들어가면 그떄부터 끝장이라는 주인공의 독백이 이어지는 가운데 술을 마실지 안마실지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맞은 편 연립주택에 사는 여자가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그의 방과 마주보고 있는 201호 여자.
언젠가 그 방에 있던 여자가 살해당해 죽어있는 것을 목격한 남자는 괜시리 두려움에 떤다.
이 남자의 취미는 엿보기이다. 소심하고 어두운 성격에 드러내놓고 뭐라 말 할 수도 없으면서, 안보는 척 몰래 몰래 타인의 사생활을 지켜보면서 욕구를 해결하는 사람. 그런 취미에 걸맞게 밖에서 보이면 누가 지켜보는지도 모르는 다락방도 하나 가지고 있다.
안그래야지 안그래야지 하면서도 계속 눈이 갈수 밖에 없는 스물 두 살 젊고 아리따운 여자의 방.
보자 보자하니, 야한 비키니를 사와서 입어보질 않나, 목욕후에 수건 한장만 걸치고 돌아다니질 않나, 무방비한 상태로 잠들어있질 않나.... 고개만 돌리면 맞은 편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어떤 남자라도 엿보기 욕망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한 남자. 주인공과 같은 재활원 출신의 도둑이 하나 등장하고, 우연히 발딛게 된 201호실 여자의 집에서 이 도둑은 그녀의 일기를 훔쳐보게 된다.
여러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본 알수 없는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

오리하라 이치의 "~자"시리즈는 반전을 너무 화려하게 넣으려던 나머지 다소 실망스러운 감이 있었는데, 역시 도착시리즈는 마음에 든다. 여러가지 각도에서 바라본 사건의 사각-죽은 지대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소설을 보면서 찾고 또 찾았는데도, 나는 그 사각의 일부만 예측할 수 있었다.
변화무쌍한 시점변화와 감각적인 반전이 멋진 소설이었다.
역시 도착 시리즈는 퍼즐 맞추는 재미로 보면 딱 좋을 흥미진진한 시리즈이다.

책을 다 보고 나니, "엿보기"라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주인공 남자의 엿보기 취미는 어쩌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도 앞집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꽤 자극적인 장면들이 자주 노출되고 있는데 그쪽에서 누군가 보고 있다는 의심도하지 않고,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 것같다면, 몰래 훔쳐볼 것 같기도 하다.
그 예로, 소설에 등장하는 도둑이 우연히 읽게 된 201호실 여자의 일기가 궁금해 틈날 때마다 방에 숨어들어가 일기를 "훔쳐보지" 않는가. 또 그 사각(死角)에 존재하는 또다른 주인공 역시 이 혼란스러운 상황들을 총체적으로 훔쳐보고 있다.
<도착의 론도>에서 "도착"과 "도작"이 어지럽게 반복되면서 혼란을 주었던 것처럼, <도착의 사각>에서는 엿보기 속의 엿보기같은 형식을 취하면서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다.
참 재밌는 뇌구조를 가진 소설가이다.
감각과 기억의 왜곡만으로 이런 어지러운 반전이 계속되는 소설을 쓸수 있는 것도 엄청난 재능임에 틀림없다.

책, 영화, 드라마, 만화, 미술, 음악... 모든 예술이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갔던 이야기, 또는 환상속에서 벌어진 이야기, 상상하다보니 재밌어져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등등,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그저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손끝을 통해 배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은 예술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켜보고 즐기는 독자나 청중, 관람객은 타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 예술들을 통해 어쩌면 그 관음증적인 욕망을 다소 건전한 방법으로 해소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사람은 얼마나 엿보기를 좋아하는 동물인가?
모두가 관음증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가?
당신 바로 옆에 있는 사람, 앞에 있는 사람, 길에서 그냥 스쳐지나간 사람 모두 그 "엿보기"욕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인 이상, 살아있는 이상은 어쩔수 없는 것 같다.
호기심을 버리는 순간, 그 사람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 되어버릴테니...

p.s 책은 무척 재밌었는데, 책 말미에 가니까 엄청나게 짜증이 났다.
아...빌벨린저의 몇몇 소설에서 보던 그 봉인형태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제발 다음권부터는 봉인하지 말고 그냥 내달라고 출판사에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다.
뜯는 동안 책이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왠만하면 책을 깨끗이 보관하려는 나같은 독자에게는 성가신 일이 아닐수가 없다.
그나마 종이 하나를 덧대어 완전히 감싼 빌 벨린저판 봉인보다 더 심하게, 책장이 한장 한장 붙어있는 바람에
 지하철에서 마지막 읽다가 살살 뗀다고 떼어도 페이지가 이상하게 뜯겨져 나가더라. 흐흑....
간간히 마지막부터 확인하는 독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뜻하지 않게 반전이며 범인이며 다 알게되는 독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읽는 재미를 포기한 그 사람들의 실수이지 출판사의 실수는 아니지 않는가.
제발!!! 봉인본은 다시는 안볼수 있기를 바란다!!!!!
(게다가 이건 빌 벨린저 소설보다 더 지저분하게 뜯긴다고!!!!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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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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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살 짜리 꼬마아이가 한 중학교 수영장에 빠져 익사해서 죽는다. 이 꼬마아이는 그 학교의 과학선생님의 딸아이이고, 이 선생님은 결혼하기 직전 남편이 될 사람이 에이즈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미혼모로 살아가기로 한 여자이다.
아이는 익사된 걸로 세상에 알려졌지만, 곧이어 과학선생은 딸아이의 죽음이 익사가 아니라 살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것도 열세살, 중학교 1학년 두명이 저지른 살해라는 것을.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이 정해져 있는 사실을 사건과 관계된 각기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소설이다.
처음부터 범인의 존재를 드러내고 시작하는 셈이기 때문에 범인의 존재를 두근거려 가며 읽어야하는 소설은 아니지만,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백들이 하나 하나 저 나름의 충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서늘한 기분으로 신나게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소설이다.
구성의 참신함과 술술 읽히는 극강의 가독성 때문에 쉽게 쉽게 읽을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중반부까지는 재밌었던 이야기가 거의 마지막, 살인자 소년 슈야의 고백으로 오면서부터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시시해져버리는 점이 아쉽다.
소설의 첫번째 이야기 <성직자>는 미나토 가나에의 첫 단편이었다던데, 그 이야기를 좀더 넓은 시각으로 여러각도에서 풀이해낸 것까지는 좋으나, 살인을 저지르는데 필요한 이유 부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터무니 없는 상상력을 발휘해버린 것이 이야기 자체의 밀도를 떨어뜨려 버린다. (어쩌면 소스가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이 작가는 캐릭터의 상세한 이력서같은 것을 먼저 만들어놓고 소설을 시작한다던데, 어떤 캐릭터들은 설득력을 갖고 있는 반면에, 어떤 캐릭터들은 그들이 이런 행동을 저지르는 배경에 대한 연구가 얕아져 버려서, 상식적으로 이해할수 없는 캐릭터들이 되어버린다.

물론 추리소설에서 어떤 범인들은 꽤나 처절한 살인 이유를 갖고 있기도 하고, 어떤 범인들은 "아무 이유 없어. 그저 살인이 좋을 뿐."이라는 식의 비상식적으로 무절제한 욕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 되어도 독자를 설득하게 하는 힘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수를 할 거라면 확실하게, 구멍뚫려 있는 마음의 암흑을 얘기할거라면 그것도 그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소설이 조금 더 슬프게, 조금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소설에 등장하는 슈야라는 살인자는 불우한 가정환경+천재+타인을 낮춰보는 선민의식+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똘똘 뭉쳐있는 학생인데,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그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기 까지의 과정이 너무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거라면 그냥 심심해서 죽였다고 하는 편이 훨씬 잔인하고 설득력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인지.
한사람 한사람의 사정 설명을 들으며, 이 얘기를 들으니 이쪽이 옳고 저 얘기를 들으니 저쪽이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다가, 슈야의 이야기에서 소설이 갑자기 변명과 자기변호 일색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건 나뿐만의 생각이었을까.
거의 마지막 슈야의 이야기에서 맥이 풀려 버리는 바람에, 다시 과학선생의 이야기로 돌아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지막 한방을 노린 작가의 술수가 빤히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책을 다 보고 나서도 잘 모르겠다.
살인자의 심경고백이 주된 이야기일지, 아니면 법의 보호를 받아 어떤 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열세살 소년들의 청소년 범죄에 대한 경각심인지, 아니면 한 어머니의 복수극인지.
뭔가 중간중간 "당신이 누구라고 살인자를 단죄하려 드는가. 그러는 당신은 깨끗한가."라는 답없는 질문들이 여러번 등장하긴 하지만,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 어떤 답이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썼는지는 알수 없을 정도로 그 화두들의 존재감이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희미해진다.

마음에 안드는 점들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적당히 재밌었다.
일본 소설들이 그렇듯, 쉽게 읽히고 재미도 어느 정도 있다. 그렇지만 그냥 그 정도에서 멈춰버린 것 같아서 다 보고나니 여러모로 아쉬웠다.
아마 이 소설은 오래도록 기억남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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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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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안개가 껴있는 가상의 도시 무진시.
한 가족의 무능력한 아버지 강인호는 아내의 알선으로, 청각장애인 학교 자애학원의 임시교사로 채용되었다. 흐릿한 안개속에서 들리는 비명소리, 멍하게 과자를 먹으며 길을 묻는 목소리에 놀라 달아나던 여자아이. 어딘가 그로테스크하기마저한 자애학원의 첫인상은 교장의 말 한마디에 정체를 드러낸다.
채용된 교사에게 돈을 내라는 교장의 말에 순간적으로 역한 증오감이 몰려오면서도, 서울에 두고온 아내와 딸 생각에 섣불리 반항을 할 수도 없다.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는 그렇게 시작해서, 마무리도 그렇게 끝난다.
누가 봐도 분명한 죄와 들끓는 증오감은 여기에 있는데, 그 마음속의 진심과 진실들은 현실에 발이 묶여버리게 된다.
첫 시작과 더불어, 이 소설이 풀어놓고자하는 이야기들을 대충 눈치챘기 때문에 다소 차분하고 담담한 심상으로 읽어가려고 했다.
현실이라면 감정부터 앞설 일이지만, 물론 현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기는 하나, 소설은 어디까지나 가상이라는 전제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상황을 조금 더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말 못하는 청각장애인들에게 일어난 끔찍하게도 비인간적인 범죄들을 저지른 것은 학교의 교장과 행정실장과 교사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묵인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묵인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두 사람만이 죄를 저질렀을 뿐만이 아니라 관련된 인간 모두 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교회 사람이기 때문에, 지역의 유지이기 때문에,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동창이고, 내 고향 사람이고, 내 학교 선배이며 후배이기 때문에 명백한 죄앞에서도 "한번 봐주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리고 당장 집에 아픈 사람이 있고, 병원비는 턱도 없이 모자라고, 아이 하나만 희생해주면 가족의 미래가 어느정도 보장 되기 때문에.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는 것이 못견디게 싫은 아내의 투정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당장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묵인하면 내가 편하기 때문에.
방송국으로, 인터넷으로, 온 세상으로 퍼져버린 교육자들의 끔찍한 강간과 폭행들에 저마다 하나 둘씩의 이유로 발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점점 세상에서의 존재감이 희미해져버린다.

이것을 전적으로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마음이 편해지는지 모르겠다.
조금씩 모두 죄를 저질렀고, 그 방관과 묵인의 죄들이 모이고 모여서 이런 커다란 죄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불편한 이야기를 바라보면서 보고있기가 괴롭고 짜증나서 책장을 덮어버리는 것 또한 나 편하고자하는 어쩔수 없는 이기심인 동시에, 또다른 방관과 묵인의 죄를 저지르는 셈이 되는 것 아닐까.
이 세상은 나만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방관한 모든 것이 언젠가 내게 또 돌아올지도 모를 일인데, 내가 그 장애인이 아니라고 안심하고,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 안심한다면 이런 일은 언제까지고 되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내가 어쩔 수 없어도, 적어도 정확히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것부터가 이 개같은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만드는 첫 걸음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드는데, 그것조차 외면해 버리는 사람은 이 세상을 욕할 자격마저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책을 보는 내내 적어도 내게는 상식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잊어가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주 기본적인 상식,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누구의 마음에나 다 있을 법한 양심같은 건 동화속에나 등장하는 건지, 분명하게 돈으로 귀결되는 현실앞에서 거의 모두가 무너져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씁쓸하고 역겨워진다.
아이들에게 저질러진 죄는 그렇다치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려는 노력조차 돈에 팔려가는 것이 과연 현실인지.
왜 이런 인간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고, 왜 이런 세상을 만든거냐고 물어봐도, 내게 신은 없기 때문에 대답해줄 사람이 없다.
금새 잊혀지고, 결국 돈많은 사람이 이겨버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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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미스테리 소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 꼭 만나게 되는 코스같은 소설가들은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이다.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서 일본 미스테리 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가들이니까.
개인적으로는 두 작가 모두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필력이 나쁘다거나 얘기 자체가 시시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 작가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은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그다지 끌리지 않아도 읽게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예전 한창 인기를 끌었던 <비밀>도, 일본 미스테리 중에서는 나름 열풍이었던 <용의자 X의 헌신>을 보아도 뭔가 마뜩치 않은 점이 많은 작가였었다. (그 외에 혹평도 하고싶지 않은 진짜 별로였던 소설들도 있고....)
그러나 영화를 보기전에 뒤늦게 보게된 <백야행>은 꽤 만족스러운 소설이라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읽게 되었다.
그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느꼈던 물체나 다름없는 희미한 여자주인공의 비중이 <백야행>에서는 그닥 느껴지지 않았고, 미스테리라고 해야할지, 멜로 드라마라고 해야할지, 애매모호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잘 한 느낌이었다.

유키호와 료지. 빛과 그림자.
과거의 일들로 인해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면서도 서로에게 인조 태양이 되어주었던 존재들.
그들의 관계가 단지 사랑에 묶여있지 않았기 떄문에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사건을 똑같이 벌이게된 동료의식과 서로에게 품고 있을 죄의식, 서로의 인생을 연민으로 보듬어 안는 인간애같은 것들.
단지 사랑이었기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에 19년- 그 오랜 세월동안 완벽한 타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런지 모른다.
료지가 유키호를 사랑하고만 있었더라면, 유키호를 다른 남자들에게 절대 빌려주지도 않았을 터.
소설 속에서 유키호와 료지가 만나는 장면은 단 한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철저히 그들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고, 그들의 인생 역시 타인의 시선으로 비춰지기만 한다.
이 냉정한 객관성속에서, 독자는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과연 유키호와 료지는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행복해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라고.

희미한 안개속을 걷는 듯한 이야기였다. 손에 잡히지는 않는데, 막연히 상상할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 상상은 왠지 모르게 고통스럽고 왠지 모르게 애달팠다.
그 상상의 자유와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이 소설 최대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의 모든 단서는 제공하되, 인물의 감정을 비워두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유추하고 막연히 짚어볼수 있었다.
독자를 자연스럽게 고민에 빠뜨리는 추리소설로는 참으로 똑똑한 진행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중에서도 여러가지 장르가 있고, 추리, 스릴러, 공포 문학들은 철저한 장르소설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나는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설은 추리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책을 바라보고 소설속의 인물을 따라가는 것, 그들의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 바로 추리라고 생각하니까.
처음 만난 모든 사람의 인생이 내게는 미스테리이듯이, 첫 책장을 펼치는 책은 처음에는 모두 미스테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애매모호한 장르의 소설 역시 추리소설임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키호와 료지의 인생을 쫓는 것 자체가 미스테리이고 추리였다.

도무지 어떻게 할수 없었던 어둠속에서 도망쳐나온 아이들은, 여전히 어둠속을 헤매인다.
처음에는 타의로, 그후에는 자의로, 그들은 빛의 세계보다 어둠의 세계를 택했다.
줄곧 하얀 밤을 걷고 있었던 기분이라고. 언젠가 낮에 걸어보고 싶다고 쓸쓸히 투정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자신의 감정들이란 단지 그것뿐이지만, 왜 이렇게 처절하고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마지막장, 모르는 척 냉정히 뒤돌아선 유키호는 어떤 표정으로 머나먼 길을 또 걸어갔을까.
눈물을 흘렸을지, 아니면 냉혹한 포커페이스였을지, 또는 후련한 기분이었을지.
분명한 것은, 이제 그녀는 인조 태양조차 사라진 온전한 어둠속을 걷고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독하고, 냉혹한 그녀에게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닐까.
철저히 혼자 내버려진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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