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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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비해 고리타분한 사고와 고정된 보수주의로 가득찬 재미없는 젊은 남녀 데이비드와 헤리엇이
마치 동류의식이라도 느낀듯 첫눈에 반해 결혼한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무척 행복하고 기름진 가족주의를 바탕에 둔 행복이다.
친인척들과의 화합, 그리고 집안에 넘쳐나는 아이들, 커다란 집, 아주 화목한 가정.
 
결혼하자마자 그들은 아이갖기에 힘쓰고,
친인척들의 걱정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아이를 가진다.
첫번째 아이, 두번째 아이, 세번째 아이, 네번째 아이를 낳으면서
온 집안은 축복과 행복, 그리고 주위의 걱정스러운 눈길로 넘쳐난다.
 
그리고 다섯째 아이가 태어난다.
선천적인 파괴본능을 지닌 소악마. 타고난 살인자.
아이를 가진 순간부터 해리엇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다섯째 아이 벤은
착상이 된 순간부터, 태어난 후까지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괴물이다.
아이를 가진 몸에서 그래서는 안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해리엇은 다섯째 아이 벤을 가진 8개월동안 약물에 의지하며 아이가 발길질을 해대는 배를 때려대고,
죽도록 뛴다.
어쩌면, 태어나기전에 그 아이가 죽기를 바라며-
 
다른 네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조금도 사랑스럽지 못한 아이 벤은
엄청난 식욕으로 엄마의 젖을 멍들게 하고, 3살이 되기 이전에 두마리의 동물을 목졸라 죽이고,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사람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아이답지 않은 괴성을 지르며 발광한다.
무작정 뛰쳐나간 벤이 도로를 달릴때 해리엇은 생각한다.
차라리 저 애가 차에 치어 죽어버렸으면-
창문가에 위태롭게 서있는 벤을 바라보며 해리엇은 생각한다.
차라리 저 애가 저리로 뛰어내려서 죽어버렸으면-
차라리 이 아이가 장애아 였다면 이다지도 힘들지 않았을 거라고  해리엇은 생각한다.
말썽장이 벤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히스테릭해져가는 엄마 해리엇,
점점 벤을 포기해가며 자기자식으로 여기지 않는 아버지 데이비드.
벤에게 엄마를 빼았겼다고 생각하며 벤을 경멸하고 두려워하는 네 아이들.
벤은 결국 가정을 파탄내는 소악마가 되어버린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가족주의와 보수주의에 가득찬 두 남녀가 꿈꾸는 안정적인 가정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위선인가를 보여준다.
어떤 아이들은 가진 순간부터 부모 속 썩이는 일 없이 순조롭게 태어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10달 내내 엄마와 아빠를 괴롭히며 태어나기도 한다.
비단, 이 소설의 가정뿐만이 아니라, 10달 내내 입덧과 고통으로 고생을 하며 아이를 낳는 엄마들은
현실에서도 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낳다가 죽는 여자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 가정을 파탄내 버린 것은 모두 벤의 책임일까.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한 이 다섯째 아이 벤이 단 한순간이라도 사랑을 받았던 적이 있나.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아이, 차라리 멀쩡한 몸이 아니었으면 하는 아이.
뱃속에 있을때 부터 엄마의 주먹질을 받아가며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부모의 증오가 서린 눈길을 받아가며 큰 아이가
소악마가 되거나, 또는 심각할 정도로 주눅이 들어 자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복잡한 사고는 하지 못하지만, 본능적인 사고는 어른들보다 뛰어나다.
원망이 섞인 엄마의 눈길과 자식이기를 부정하는 아빠의 눈길을 받으면서 자란 벤이,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공포와 경멸을 몰랐을까.
벤을 악마로 만들어버린 것은 그런 주위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구제불능인 아이라해도, 부모이기를 포기하고 정체를 알수 없는 단체에 보내버리는
(정확히는 버린 것이다.) 장면에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벤이 불쌍해졌다.
부모의 눈길, 친인척의 태도, 형제들의 공포로 언제나 갈기갈기 찢겨져 자라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벤이 아니었을까.
벤은 태어날때부터 악마가 아니라, 그냥 그런 성격의 아이였는데
사람들은 그 애를 악마로 만들어버린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여긴다.
평생 교육되어온 사고방식에 어긋나는 사람의 태도를 바라보며
그것이 죄인 것도 아닌데, 마치 돌연변이를 바라보듯 이상야릇한 시선을 보내며
때로는 두려워하고, 때로는 경멸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화목한 가정안의 다섯째 아이 벤을 바라보며
그런 전체주의와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우리 엄마가 나를 낳을 때에는 거의 해리엇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아이를 가진 내내 입덧으로 아무것도 먹을수가 없었고,
끝없이 발길질을 해대는 통에 제대로 몸을 움직일수도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결국 나는 두달 일찍 이틀을 고생한 끝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태어났다.
태어난 후에도 나는 죽도록 말을 안들어먹는 아기였고,
틈만 나면 또래 아이들을 때리고 다녔으며, 마음대로되지 않으면 뭐든 부수었고,
자존심이 무척 강해 엄마한테 혼나고 나서는 일주일을 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아마도 애정결핍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의 관심이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려워서,
말썽이라도 부려서 시선을 내게 집중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 다섯째 아이 벤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이 책을 보는 내내, 묘하게도 닮은 벤과 나를 보며,
벤처럼 경멸을 받지 않으며 자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도, 벤처럼 자라났다면 악마인 채로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가볍게 읽을수 있는 책인데,
마음은 무거워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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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 공동묘지 - 상 밀리언셀러 클럽 33
스티븐 킹 지음, 황유선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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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킹의 팬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그래서 읽은 거라고는 아주 유명한 소설들 몇개 뿐이지만,
개인적으로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재미있게 읽고 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의 매력은 역시 영화처럼 머릿속에 정확히도 그려지는 이미지일텐데,
어떤 장면에서는 슬로우화면으로, 어떤 장면에서는 에코 가득한 독백으로,
또 어떤 장면에서는 흑백처리로, 이런 식으로 마치 영화를 보듯 머릿속에 구체적인 장면이 그려지기 때문에,
아마도 그래서 스티븐킹의 소설들중에 유난히 영화화 된 소설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는 스티븐킹의 "애완동물 공동묘지"는,
아주 간단히 설정만 정리하자면, 에드가 엘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와 좀비물을 바탕에 깐
가족애가 주요 설정이라고 할수 있겠다.
(뒤 쯤에서는 엑소시스트나 사탄의 인형이 생각나기도 했고...-_-;)
 


화목한 네 식구가 아버지의 직장 이전으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건너편에 사는 묘하게 정이가는 저드 부부와 친해지고,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있는 사이, 딸이 무척이나 아끼는 고양이가 죽고만다.
아직 죽음에 대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해서 두려워하는 딸을 위해,
아버지 루이스는 이웃에 사는 저드의 아이디어로 딸의 고양이를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묻게 되고,
다음날, 고양이는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다.
 

겉모습은 다름없으나, 이전같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좀비 고양이.
다행히 이 일은 루이스와 저드 둘만의 비밀이 되었지만,
죽었다가 살아왔다는 점도 그렇고,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행동들이나,
날이 갈수록 아무리 씻겨도 지워지지 않는 부패의 냄새때문에,
루이스도, 가족들도 암묵하에 그 고양이를 경멸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이 죽는다.
고양이가 그랬듯이, 집앞 도로에서 차에 치여 아버지와 어머니 눈앞에서 두살짜리 아들이 죽은 것이다.
거의 반 미친 상태로 여러번 생각을 고쳐먹어도,
아버지 루이스에게는 한가지 욕망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사람을 묻는다면?
그래도 다시 되살아올까? 
  
 

샤이닝에서 알콜에 대한 그리움(?)때문에 서서히 미쳐가는 아버지가 등장했던 것처럼,
이 소설에서는 부성애로 미쳐가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후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아들을 그리워하며,
절대로 오지 않을 아들의 미래를 혼자 꿈꾸며, 그는 서서히 미쳐가며,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질러버리고 만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이 미신적인 악의 기운이 넘치는 애완동물 공동묘지 때문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의아하기 까지 하고,
호의에서 제안했다고 보기에는, 상대방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애완동물 공동묘지로 데려가버린
일방적인 노인네 저드의 행동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애초에 발단이 된 고양이 처치의 이야기는 잊을만 하면 간간히 등장할 뿐이라 슬슬 의미가 좀 모호해 지기도 해서,
보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보게되었다.

또, 묘하게도 군더더기가 많아서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지나치게 자세한 묘사 또한,
서스펜스를 넘어서 좀 지나치게 이야기를 연장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쩐지 지루하기도 했다.
(<상>권의 중반쯤 가서야 슬슬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아들이 죽고 나서 사흘간의 이야기가 거의 한권분량이 되어서, 더딘 진행에 조금 화가나기도.....)
 
스티븐킹의 아내는 이 소설을 무서워서 끝까지 읽지 못했다고 하던데,
사실 뒤로 가서 루이스가 아들을 되살릴 결심을 하는 부분부터는
으스스한 느낌을 받을수 있다고는 생각되지만, 정확히 어디가 그렇게 무서웠을지는 모르겠다.
스티븐 킹의 아들이 실제로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할 뻔 한 적이 있다던데,
아마 그때를 떠올려서 아내가 무서워했던 것일까.
아니면 서양인과 동양인의 정서상의 차이인가.
하긴, 스티븐킹의 다른 소설들도 진심으로 무서웠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내 취향이 변한 건지, 아니면 원래 이 소설이 이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의 스티븐 킹의 소설들과 비교하자면, 어딘지 뜨뜻미지근한 소설이었다.
그래도 아주 기본적인 미덕(잘 읽히는 편)은 있기 때문에 읽기 어렵지는 않았지만,
매너리즘이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 기분 탓일까.
어떤 장면에서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긴장을 느끼고, 어떻게 해야 불안감을 느끼는 지
작가자체가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잘 말하면 노련함이 느껴지고, 나쁘게 말하면 신선하지 않다.
한권정도 분량으로 줄여서 지독히도 자세한 심리묘사와 장면 묘사를 조금만 더 줄이고,
독자에게 생각해본 여운을 남겼더라면,
더 밀도높고 박진감넘치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p.s 역시 가장 불쌍한 건 고양이....
죄도 없이 죽었는데 죽지도 못하고 되살려놓고 구박당한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인간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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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 가든
이언 매큐언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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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사춘기에 대해 굉장히 흥미를 느꼈다. 그것은 내가 막 거쳐 지나온 바다였다... 나의 소설이 온통 근친상간, 자위행위, 신체적 결함 등만을 묘사한다고 비난하는 독자들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죄와 벌의 문제를 다루는 도덕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인물들의 무의식 세계이며,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구조와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는가, 그리고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 사이의 괴리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이다.

-저자의 말
 


...라는 저자의 쿨한 소견이 마음에 들어서 보게된 소설 "시멘트 가든".
상당히 묘한 소설이었는데, 다 보고 나서 잠이 들었을 때는 정체모호한 꿈을 꾸었다.
이 책은 내가 가끔씩 꾸는 악몽이라고 말하기 뭣한,
꾸고나면 기분이 아주 이상야릇하고 기분이 안좋아지는 꿈과 아주 흡사한 느낌을 받아서,
보는 내내 그런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생경하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어느날 집에 시멘트 푸대들이 도착하고, 아버지는 자신만의 정원을 꾸미기 시작한다.
채 다 완성되기 전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버리고,
뒤 이어 어머니 역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버려서,
이 커다란 집과 미완성의 시멘트 가든에 네 남매가 남겨진다.
 
어른이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린아이들도 아닌, 사춘기의 소년과 소녀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을 무의식중에 정해가기 시작하고, 점점 사회와 벽을 쌓아가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이렇게 고립되는 이유는 자신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당장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있다.
늘 다니던 학교도 있었고, 정상적인 사회도 그 시멘트 가든 밖에는 존재하지만,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자신들을 시멘트 가든에 가두고,
그 안락함에 취해버리고 만다.
 
화자인 둘째인 잭은, 거의 어른에 가까운 누나 줄리를 동경과 사랑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고,
누나는 그런 잭을 모호한 눈길로 응시하며,
셋째인 수는 책의 세상속으로 빠져들며,
막내인 톰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맞는 것이 싫어서 여자가 되기로 한다.
누구도 이것을 비정상적이라 느끼지 않는다.
시멘트가든 안의 네 아이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만든 당연한 사회라고 생각하지만,
누나의 남자친구 데릭이 등장하면서, 이 고립된 사회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근친상간과 어머니의 시체를 시멘트로 덮어버린 지하실.
윗층에서는 어린 동생을 앞에 두고, 동생과 누나가 섹스를 하고 있고,
지하실에서는 데릭이 어머니의 시멘트 무덤을 파해치면서 끝이 나는 결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과연 이 아이들이 후에 보통 사회의 정상적인 규범을 따를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네 남매는 어릴때 부모님이 여행을 가고 넷만 남겨졌을 때를 떠올린다.
부모님이 문밖을 떠나는 순간,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부모님이 다시 돌아오기 30분 전에서야
난장판이 된 집을 치우기 시작한다.
어릴 때는 누구나 이렇다.
나 역시 사춘기 시절, 부모님이 집을 떠나고 혼자 남겨지면, 될수 있는 한 최대한 어질러 놓고,
부모님이 돌아오기 전에 재빨리 수습했었다.
이 아이들의 생활은 내게 이런 식으로 비춰졌다.
어른이 없는 생활. 고립된 채, 누구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명령해주지 않는 극한의 자유.
명령을 하는 사람은 단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누나 뿐.
누나 마저 귀찮아져 버리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된다.
시멘트 가든 안에서, 어른 흉내를 내면서 대게의 사람들이 옳다 믿고 있는 규범을 어겨버리는 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이며 죄일까.
아버지의 만들다 만 시멘트 가든 처럼,
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완성시키지 못하고 떠나버린 미완성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알 듯하면서 알수 없는 비밀스러운 사춘기 소녀다운 누나 줄리를 바라보면서

화자인 잭이 느끼는 감정이 단지 근친상간으로 치부될수 밖에 없는지도 생각해본다.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이기고자 한다.
어린 남자들은 더더욱 그렇다.
자신보다 일찍 커버린 누나를 바라보면서, 자기손으로 그녀의 비밀을 깨부수고 싶고,
자신을 마냥 아기처럼 대하는 누나를 이기고 싶다는 바람은,
보통의 동생들도 가지고 있는 감정이 아닐까.
여자가 되고자 여자옷만 입는 어린 동생 톰의 경우 역시 주위에서 아주 보기힘든 사례는 아니다.
누나들 사이에서 커온 남자들중에서는 간혹 누나들이 여장을 시켜주었다는
경험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어머니의 시체를 지하실에 유기하는 것 역시, 매우 비도덕적인 일이라기 보다는
어머니를 타인의 손에 빼앗기고, 자신들도 뿔뿔히 흩어지는 것이 두려운 어린아이들의 시선에서는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좀 비틀어진 방식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들의 이런 감정이 전혀 생소한 규범의 타도인 동시에 악이라고 말할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들은 단지, 미완성일 뿐, 악도, 비정상도 아니지 않나.
 
소설이 꽤 두꺼울 줄알았는데, 몇 시간이면 읽을수 있을 정도로 가뿐한 무게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묘한 꿈에 내버려져서,
시멘트 가든 어딘가에 숨어서 네 남매를 방관하며 지켜볼수 밖에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당히 묘한 소설. 묘한 결말. 더 충격적인 아주 담담한 태도.
이안 매큐언의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겠다.
 
 
 
p.s 이안 매큐언의 정보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가 검색에 걸려서 보게되었는데,
올드보이의 근친상간적인 모티브는 이 소설에서 받았다고 한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런 사실을 알게되니 사실 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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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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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를 갔을 때 일이다.
단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무척 바쁜 일정인지라 버스에서 다들 늘어져 있을 때,
차에 누군가가 탔다.
그사람이 주섬주섬 내놓던 것은 일명 건강보조 식품.
열심히 팔아보려는 의지는 대단하나,
도대체 고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애들에게 왜 이런 것을 팔려는지 이해를 할수가 없어서
나는 나 나름대로 정말 개념없는 아저씨라고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게 그 아저씨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생각할수 없게도, 몇몇 아이들이 그걸 샀다.
상식적으로 터무니 없이 헤픈 가격에, 아무리 봐도 슈퍼에서 파는 건강 음료보다 못할 듯한
그런 건강보조 식품을 사는 아이들이 정말로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님에게 가져다 드리겠다고 샀던 것 같다.
나는 그 아이들이 참 바보같다고 생각했다.
그 가격이면 서울에 가서 더 좋은 것을 살수 있을텐데,
수학 여행온 고등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저런 쓸데없는 것을 살까.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나같은 생각을 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때의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첫째는, 아무리 쓸데없어 보이는 물건이라도 수학여행 다녀온 딸이 돈을 아껴서
부모님을 위해 무언가 사왔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부모님 쪽에서는 상당히 사랑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
둘째는,
그렇게까지라도 해서 무언가를 지켜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어쩌면 그 아이들의 부모님 중 한분은 건강이 매우 안좋은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뭐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서 샀을지도 모른다.
그 때의 어린 나는, 더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바보같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어렸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설이 길었지만, 만약 누군가가 이 소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본다면,
왜 내가 이런 얘기를 하게되었는지 알것이다.
순정만화같은 표지와 시집같은 제목의 소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얼핏 제목과도, 표지 그림과도 매치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소설을 다 읽는다면, 아마도 모두들 이런 감상적인 제목이 주는
슬픔 어린 의미를 가슴깊이 알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아주 대단한 반전을 가진 소설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속으로 다짐하면서 보았다.
"나만은 속지 않을거야!!!!"라고-.
아마도 반전 이야기가 나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겠지만,
이 반전은 너무도 급작스럽고 모든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
독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 처음부터의 이야기를 되돌이켜 보게 하기 때문에,
아마도 쉽게 눈치채는 사람은 없을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책을 펴는 순간 제목과는 상반되게 여자들의 관념을 비웃어버리고 깔아뭉게는 마초적인 남자의
투덜거림부터가 엽기적으로 상식을 깬다.
 
주인공 나루세는 프리터(프리 아르바이터의 준말이란다.)로,
이것저것 안하는 일이 없는 남자이다.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자기계발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남자이다.
부지런히 운동하고, 부지런히 일하며, 부지런히 돈을 쓰고, 부지런히 여자도 만난다.

그는 할일없이 시간을 떼우며 낭비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고, 밤낮이 바뀐 야간 생활자를 바보라 비웃는다.
(야간 생활자로써 정말 쑥쓰럽기 그지없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살인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부탁을 해온다.
경력이라고는, 열아홉시절 잠깐 탐정사무소에서 일을 한것 뿐인데 말이다.
어느 할아버지가 죽었다.
그 나이의 할아버지 치고는 많이 배운 지식인인데도 불구하고 건강이 나빠지자,
할아버지는 건강 보조식품을 판매하는 피라미드에 빠지게 된다.
가족들은 모두 그런 할아버지를 말리지만, 결국 자신도 깨닫고 자중해 가고있던 중,
어느날 교통사고로 죽었다.
여느 교통사고와 다를바 없지만, 할아버지의 죽음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고나서부터,
나루세가 의뢰를 받아 할아버지가 빠져있던 피라미드 회사 "호라이 센터"를 조사하게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설은 주인공 나루세가 우연히 자살하려던 여자 사쿠라를 구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악덕 피라미드 회사 "호라이 센터"의 뒤를 캐내는 과정,
열아홉시절 탐정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야쿠자 집단에 들어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할아버지가 오래전 헤어진 딸의 최근 모습을 알아봐달라고 해서,
딸의 근황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나뉘어진다.
전혀 연관성없어 보이고, 그저 주인공이 자기 무용담을 두서없이 털어놓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재밌게 읽으면서도 왜 이런 이야기가 한꺼번에 등장해야하는지 의아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은 이어져있다.
어느 순간 점층적으로 이어져 있는 이 사건들을 풀이해가는 과정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머릿속이 하얘지게 만들며 앞의 얘기를 한참 떠올리며 아귀를 맞춰보아야 하는
충격적인 반전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 반전 부분을 나는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정말이지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느낌표만 무한대로 찍혔다.
한참 그러고 나서는 소리 죽여 혼자서 실실대면서 웃었다.
그래, 나는 속았다. 작가가 아니라 내 고정관념이 나를 속였다.
수많은 고정관념속에 살고 있는 주제에,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개방적이고 비교적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우긴다.
나도, 그런 사람들중 하나였다.
충분히 그럴수 있는 일인데도, 그 점은 전혀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 역시 인간 차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나 소설속의 주인공들의 범죄는 돈이나 명예, 또는 여자를 위해서거나,
또는 피맺힌 복수의 해결을 위해서거나, 또는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이코의 범죄인 경우가 많다.
영화나 소설속의 범죄는 일단 어느 정도 드라마틱하게도 폼이 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래서 그런 범죄는 현실적이지 않다.
물론 세상에는 그런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좀더 쉽게 다가오는 범죄들, 우리 도처에 깔려있어 언제 잡아먹을지 모르겠는 범죄들은
따로 있다.
 
노후를 위해 평생 벌어온 돈을 피라미드 회사에 몽땅 날려버리는 노인들,
어딘가에 흠잡혀서 죽기 전까지 평생 지고가야할 고통을 받는 사람들.
이런 범죄들은 현실이다. 우리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다.
현실의 범죄는 조금도 멋지지 않다. 오히려 초라하고 궁색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소설을 보는 내내, 치사하게 건강이 나빠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가련한 노인들을 가지고
사기치는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저절로 들끓었다.
뉴스나 신문에 등장하는 피라미드 회사의 범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참 무서운 세상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도대체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호라이 센터"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위는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나는 귀신보다 이런 범죄가 더 무섭다.
더 가깝기 때문에, 언젠가 나도 내게 목숨같은 것을 지키다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버려서
그런 일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무척 무서운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좀더 쉽게 공감할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마치 호라이 센터에서 일하는 상품 판매원처럼 요점이 쏙쏙 흡수되게 재밌게 풀이해 나가는 소설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반전은 충격적이기 이를데 없으며,
힘이 나는 한편 나이든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 몰려오는 작가의 주제의식이나 사고방식도 아주 마음에 든다.
마초적인 남자는 싫어하는 편이지만,
주인공 나루세는 자기의 그런 단점과 모순을 너무도 뻔뻔스럽게 인정하고
배째라며 드루눕는 스타일이라 사실 좀 귀여웠다.
 
벚꽃이 진다고 벚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숨쉬며 살아있다. 다만 주목받지 못할 뿐.
인간은 나이를 먹어가며 죽음으로 가까워져 가지만, 그렇다고 당장 죽지는 않는다.
언제 죽을지 몰라도, 죽기 직전까지 인생을 한껏 즐기며 하루를 소중히 여겨라.
살아서 원하는 것을 모두 가져라.
그것이 즐거운 인생이다- 라고 말하는 이 소설의 교훈은 가슴벅찰정도로 기운차게 만든다.
호라이 센터의 건강보조식품을 먹기 보다,
이런 소설을 읽는 것이 훨씬 인생을 기운차게 살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p.s 언젠가 피라미드에 빠질 경우를 대비해서 이 책을 읽으며
그 놈들의 수법이 뭔지 알아두는 것도 좋을듯 싶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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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메피스토(Mephisto) 14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처음부터 중반을 넘어설때까지 도저히 이해할수 없었던 책 "다이어리".
번역의 문제나 편집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참으로 헤깔릴수 밖에 없는 스타일이라
도저히 적응이되지 않았지만, 묘하게도 "읽고 싶지 않다"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던 소설이다.
끊임없이 "이게 왜 이렇게 되지?"라던가 "갑자기 이런건 왜 나오지?"라던가,
"이게 무슨 소리지?"라는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며 길들여지지 않는 척 팔라닉의 문장에 난감해하며
마지막장까지 다 읽고 말았다.

척 팔라닉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파이트 클럽"은 몇해전 꽤 재밌게 보았던 영화였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파이트 클럽의 원작도 보고싶어졌다.
내 기억으로 파이트클럽은 꽤 잔인하고 야비하며 폭력적인 피의 냄새를 풍기는 영화였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면? 그것도 이런 난감한 척팔라닉의 문장으로 쓰여졌다면?
아마도 더더욱 선연한 피의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었다.

결코 재밌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
참을성 있게 포기하지 않고 읽다보면 어느새 중독이 되어있어서,
수많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결론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얘기의 정체가 궁금해져서
끝까지 놓치않고 싶어지는 소설이었다.

웨이탠시섬으로 시집간 미스티.
한때는 전도유망한 화가 지망생이었던 그녀는, 피터를 만나 임신을 하고 결국은 결혼을 하면서
그림을 손에서 놓아버린다.
내가 보기에 피터가 미스티와 결혼하기 위해 벌어졌던 사건들은
마치 일부러 미스티의 인생을 망치려는 듯이 보인다.
화가로 성공하는 것만이 꿈인 미스티는 전혀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피터는 야비한 방법으로 미스티를 임신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서 금쪽같은 딸을 얻었고,
평범한 아줌마로써의 삶을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던 미스티인데,
갑자기 사람들이 화가의 꿈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몰락해가는 휴양지 웨이탠시의 꿈은,
미스티가 세기에 남을 화가가 되어 그의 거처로 알려져 다시 영광을 누리게 되는것.
언제부터인가 웨이탠시섬과 가족들은 미스티의 계획에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게 미스티를 위해서 였을까.

아니, 미스티를 이용하기 위해서-.
왜 이용하게 되는지, 어떻게 이용하게 되는지, 미스티의 인생이 어디까지 망가지는지,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인지는 소설의 막바지에 한꺼번에 밝혀지기 때문에,
읽는 내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 소설이 어떤 사람에게는
반도 못읽고 포기하게 만드는 소설이 될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이 작가가 독자에게 길들여지기 바라는게 아니라,
내가 이 작가에게 맞춰야하는 것이다-.


책의 결론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어서 몇시간동안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었다.
이런 소설일지 몰랐다.
아니, 책 뒤의 광고문구를 보고 어느 정도는 예측했으나,
그후에 밝혀지는 거의 전생까지 넘나드는 부분은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아마도 척 팔라닉의 다른 소설을 먼저 읽었었더라면 적응할수 있었을텐데,
이 냉소적이고 야비한 소설은 독자에게 조금도 친절하지 않다.
마치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을 반항아의 몸부림처럼 독자를 자기에게 적응하도록 강요한다.
책을 읽으면서 몇번이나 내가 학대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고통을 받으면서 쾌감을 얻는 메저키스트의 감정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의 폭력은 아프나 매력적이다.


시체의 냄새는 무척 독특하다.
나는 딱 한번 죽은 사람의 냄새를 맡아본적이 있는데, 그 냄새가 너무 독특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음산해서
기억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가 않는다.
내가 맡아본 적 없는 약품의 냄새같기도 하고, 뭐라고 말로 표현할수 없을 정도의 기분나쁜 악취가 풍긴다.
그 냄새는 무척 독특하면서도 다른 세상에 와 있는듯한 이상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을 갖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떠올랐다.
정체를 알수 없다. 독특하나 기분나쁘다. 낯설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스럽다고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새빨간 피로 덧칠을 해놓은 그림처럼 그의 책은 공포스러울 만큼 잔혹하다.
나는 무서움을 잘 타지 않지만, 그래서 사지가 절단나는 영화도 꽤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편이지만,
이 책의 잔인함은 그런 잔인함과는 한참 달라서
읽으면서 무척이나 심기가 예민해지고 가끔은 소름끼칠 정도로 메스꺼워졌다.
가끔씩은 어느 장면 장면이 머릿속에서 영화처럼 그려져서 괴로웠다.
극심한 추위로 다 터진 맨 살을 칼로 자해하는 기분.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느낌.
그리고 감정없는 무표정함과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던져지는 적나라한 냉소와 비난.
그런 느낌의 종잡을수 없으나 신경을 마구 자극하는 공포라 더더욱 그렇다.

다 읽고 났을때는 기분이 서늘했다.
하지만 다시 보고싶다.
척팔라닉의 불편하고 무표정한 폭력의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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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o 2006-01-05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잘 쓰시네요. 님의 리뷰를 퍼가도 될런지요?

Apple 2006-01-05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의 말씀이십니다.^^;;핫...
네...퍼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