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를 갔을 때 일이다.
단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무척 바쁜 일정인지라 버스에서 다들 늘어져 있을 때,
차에 누군가가 탔다.
그사람이 주섬주섬 내놓던 것은 일명 건강보조 식품.
열심히 팔아보려는 의지는 대단하나,
도대체 고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애들에게 왜 이런 것을 팔려는지 이해를 할수가 없어서
나는 나 나름대로 정말 개념없는 아저씨라고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게 그 아저씨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생각할수 없게도, 몇몇 아이들이 그걸 샀다.
상식적으로 터무니 없이 헤픈 가격에, 아무리 봐도 슈퍼에서 파는 건강 음료보다 못할 듯한
그런 건강보조 식품을 사는 아이들이 정말로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님에게 가져다 드리겠다고 샀던 것 같다.
나는 그 아이들이 참 바보같다고 생각했다.
그 가격이면 서울에 가서 더 좋은 것을 살수 있을텐데,
수학 여행온 고등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저런 쓸데없는 것을 살까.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나같은 생각을 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때의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첫째는, 아무리 쓸데없어 보이는 물건이라도 수학여행 다녀온 딸이 돈을 아껴서
부모님을 위해 무언가 사왔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부모님 쪽에서는 상당히 사랑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
둘째는,
그렇게까지라도 해서 무언가를 지켜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어쩌면 그 아이들의 부모님 중 한분은 건강이 매우 안좋은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뭐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서 샀을지도 모른다.
그 때의 어린 나는, 더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바보같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어렸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설이 길었지만, 만약 누군가가 이 소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본다면,
왜 내가 이런 얘기를 하게되었는지 알것이다.
순정만화같은 표지와 시집같은 제목의 소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얼핏 제목과도, 표지 그림과도 매치되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소설을 다 읽는다면, 아마도 모두들 이런 감상적인 제목이 주는
슬픔 어린 의미를 가슴깊이 알수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아주 대단한 반전을 가진 소설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속으로 다짐하면서 보았다.
"나만은 속지 않을거야!!!!"라고-.
아마도 반전 이야기가 나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겠지만,
이 반전은 너무도 급작스럽고 모든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
독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 처음부터의 이야기를 되돌이켜 보게 하기 때문에,
아마도 쉽게 눈치채는 사람은 없을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책을 펴는 순간 제목과는 상반되게 여자들의 관념을 비웃어버리고 깔아뭉게는 마초적인 남자의
투덜거림부터가 엽기적으로 상식을 깬다.
 
주인공 나루세는 프리터(프리 아르바이터의 준말이란다.)로,
이것저것 안하는 일이 없는 남자이다.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자기계발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남자이다.
부지런히 운동하고, 부지런히 일하며, 부지런히 돈을 쓰고, 부지런히 여자도 만난다.

그는 할일없이 시간을 떼우며 낭비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고, 밤낮이 바뀐 야간 생활자를 바보라 비웃는다.
(야간 생활자로써 정말 쑥쓰럽기 그지없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살인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부탁을 해온다.
경력이라고는, 열아홉시절 잠깐 탐정사무소에서 일을 한것 뿐인데 말이다.
어느 할아버지가 죽었다.
그 나이의 할아버지 치고는 많이 배운 지식인인데도 불구하고 건강이 나빠지자,
할아버지는 건강 보조식품을 판매하는 피라미드에 빠지게 된다.
가족들은 모두 그런 할아버지를 말리지만, 결국 자신도 깨닫고 자중해 가고있던 중,
어느날 교통사고로 죽었다.
여느 교통사고와 다를바 없지만, 할아버지의 죽음에서 이상한 점이 발견되고나서부터,
나루세가 의뢰를 받아 할아버지가 빠져있던 피라미드 회사 "호라이 센터"를 조사하게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설은 주인공 나루세가 우연히 자살하려던 여자 사쿠라를 구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악덕 피라미드 회사 "호라이 센터"의 뒤를 캐내는 과정,
열아홉시절 탐정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야쿠자 집단에 들어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할아버지가 오래전 헤어진 딸의 최근 모습을 알아봐달라고 해서,
딸의 근황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나뉘어진다.
전혀 연관성없어 보이고, 그저 주인공이 자기 무용담을 두서없이 털어놓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재밌게 읽으면서도 왜 이런 이야기가 한꺼번에 등장해야하는지 의아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은 이어져있다.
어느 순간 점층적으로 이어져 있는 이 사건들을 풀이해가는 과정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머릿속이 하얘지게 만들며 앞의 얘기를 한참 떠올리며 아귀를 맞춰보아야 하는
충격적인 반전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 반전 부분을 나는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정말이지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느낌표만 무한대로 찍혔다.
한참 그러고 나서는 소리 죽여 혼자서 실실대면서 웃었다.
그래, 나는 속았다. 작가가 아니라 내 고정관념이 나를 속였다.
수많은 고정관념속에 살고 있는 주제에,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개방적이고 비교적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우긴다.
나도, 그런 사람들중 하나였다.
충분히 그럴수 있는 일인데도, 그 점은 전혀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 역시 인간 차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나 소설속의 주인공들의 범죄는 돈이나 명예, 또는 여자를 위해서거나,
또는 피맺힌 복수의 해결을 위해서거나, 또는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이코의 범죄인 경우가 많다.
영화나 소설속의 범죄는 일단 어느 정도 드라마틱하게도 폼이 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래서 그런 범죄는 현실적이지 않다.
물론 세상에는 그런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좀더 쉽게 다가오는 범죄들, 우리 도처에 깔려있어 언제 잡아먹을지 모르겠는 범죄들은
따로 있다.
 
노후를 위해 평생 벌어온 돈을 피라미드 회사에 몽땅 날려버리는 노인들,
어딘가에 흠잡혀서 죽기 전까지 평생 지고가야할 고통을 받는 사람들.
이런 범죄들은 현실이다. 우리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다.
현실의 범죄는 조금도 멋지지 않다. 오히려 초라하고 궁색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소설을 보는 내내, 치사하게 건강이 나빠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가련한 노인들을 가지고
사기치는 인간들에 대한 분노가 저절로 들끓었다.
뉴스나 신문에 등장하는 피라미드 회사의 범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참 무서운 세상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도대체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호라이 센터"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위는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나는 귀신보다 이런 범죄가 더 무섭다.
더 가깝기 때문에, 언젠가 나도 내게 목숨같은 것을 지키다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버려서
그런 일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무척 무서운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좀더 쉽게 공감할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마치 호라이 센터에서 일하는 상품 판매원처럼 요점이 쏙쏙 흡수되게 재밌게 풀이해 나가는 소설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반전은 충격적이기 이를데 없으며,
힘이 나는 한편 나이든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 몰려오는 작가의 주제의식이나 사고방식도 아주 마음에 든다.
마초적인 남자는 싫어하는 편이지만,
주인공 나루세는 자기의 그런 단점과 모순을 너무도 뻔뻔스럽게 인정하고
배째라며 드루눕는 스타일이라 사실 좀 귀여웠다.
 
벚꽃이 진다고 벚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숨쉬며 살아있다. 다만 주목받지 못할 뿐.
인간은 나이를 먹어가며 죽음으로 가까워져 가지만, 그렇다고 당장 죽지는 않는다.
언제 죽을지 몰라도, 죽기 직전까지 인생을 한껏 즐기며 하루를 소중히 여겨라.
살아서 원하는 것을 모두 가져라.
그것이 즐거운 인생이다- 라고 말하는 이 소설의 교훈은 가슴벅찰정도로 기운차게 만든다.
호라이 센터의 건강보조식품을 먹기 보다,
이런 소설을 읽는 것이 훨씬 인생을 기운차게 살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p.s 언젠가 피라미드에 빠질 경우를 대비해서 이 책을 읽으며
그 놈들의 수법이 뭔지 알아두는 것도 좋을듯 싶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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