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콜드 블러드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알고 보면 나쁜 사람 없다는 얘기가 있다.
어떤 악랄한 인간이라도, 자세히 사정을 알고보면 연민을 품을수 밖에 없는 점이 있다는 얘기겠지.
이책을 읽으면서 그런 얘기가 아주 강하게 생각나는 것은,
고작 얼마 안되는 돈때문에, 선량하고 무고한 한 가족을 몰살해버린 두 살인자 딕과 페리를
무작정 싫어할수만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딕은 비록 타인의 고통을 간접적이나마 느낄수 없고 양심의 가책 또한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일지라도
사실 그 인간 자체는 허풍을 좀 떨어서 그렇지, 냉정하지만 쾌활하고 가식이 없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언제나 인기있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페리는 비록 환상속에서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도 제대로 잘 모르는 정신분열증 환자이지만,
언제나 쓸쓸하게 길가에 버려진 개처럼 살아와 사람을 믿지 못하고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묘하게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 한사람의 인생을 진심의 감정을 가지고 파해쳐 보면,
온전히 자기 잘못때문에 악랄해진 사람은 아마도 없다.
그들의 과거에, 또는 그들의 차가운 피에 새겨진 유전자에, 또는 그들의 운명에
그러한 불행의 기운이 서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그런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처럼,
딕과 페리의 모습은 어딘지 위태로워보여서 책을 읽는 내내 이 사람들을 증오해야하는지 좋아해야하는지
애정도 증오도 아닌 애매모호한 감정을 품으면서 보았다.
그들의 모든 행동(특히 범죄에 있어서는)을 모두 이해할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도 언젠가는 아이였고, 상처받았고,
그리고 모두들 그런 것처럼 죽을 운명을 타고난 보통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범죄이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을 네명이나 죽였다.
피맺힌 복수라던가, 아니면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데에서 쾌락을 느낀다던가 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두 전과자는 돈이 없었고,
그래서 부잣집에 처들어가서 돈을 훔치려고 했지만 집에 현금 따위 놓지 않아서
결국 네명이나 죽이고 4,50달러 밖에 훔치지 못했다.

어릴적부터 무척 많이 봤지만 아직까지 무서운 영화 "엑소시스트"가 정말로 무서웠던 이유는,
귀신들린 아이뿐만이 아니라, 아이가 왜 귀신에 들렀는지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무슨 잘못을 한것도,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도 아닌,
잘 살고 있는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이혼으로 마음이 외로워져 버린 한 평범한 어린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아무 죄 없이 귀신에 들렀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범죄가 무서운 것은, 이 범죄에 그럴듯한 "사연"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날 잘 살고 있다가, 아무 죄 없이 그냥 살해당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몰살당한 클리터씨 가족은 그야말로 선량한 사람들이다.
홀컴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 이후에 클리터가족이 살해를 당하는 세상이라면
살해당하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두려움에 떤다.
아무 사연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 운이 나빠서 클리터가족이 이런 불행에 걸렸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의 공포는 더더욱 심각하다.
부자에다가 행복하고, 게다가 착하기 까지 한 완벽한 배경이 죄가 된다면 죄가 되었을까.
이렇게 사연없고 이유없는 범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이 무섭다고들 하나보다.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6년동안 홀컴마을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며 책을 써낼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논픽션.
하지만 완전히 논픽션인 것은 아니고, 딕과 페리의 마음속에 담긴 생각은 어느정도 작가가 창작해놓은 것이라고 봐야겠다.
따라서 이 소설 역시 진실은 아니다.
트루먼 카포티의 시선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는 두 살인자중 페리에게 유독 끌리고 있는 듯, 그를 무척 가련한 영혼으로 그리고 있다.
(그에 비해 딕은 어딘지 비열하게만 그려지고 있다.)
책을 보는 독자가 이 살인자 페리를 싫어할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작가가 진심으로 페리를 동정하고, 또는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트루먼 카포티가 이 소설을 연재할 당시에 페리를 사랑하는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었다고 한다.

책 말미에 역자가 써놓은 해설 글을 보니, 영화 "카포티"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고 한다.
"페리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집에서 자란 것 같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앞문으로 그는 뒷문으로 나간 것 같았지..."
정말로 페리에게 연민을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페리를 또다른 자기자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처럼 애정에 넘치는 캐릭터를 만들수 있는 걸까.
해설 글을 보고나니, 영화 "카포티"도 무척 보고싶어졌다.

조금 지루할지도 모르겠다는 예상을 깨고, 무척 재밌고 가슴에 와닿는 소설이었다.
보고나니, 잔인함이나 분노보다도, 길가에 버려진 개를 보는 듯한 쓸쓸한 연민이 마음속에 아른거린다.
소설이 한장 한장 넘어갈수록, 계단을 한계단씩 내려가는 것 같은 우울함이 침잠하는 소설이다.


모두 알고 나서 타인으로부터 받을 것이 증오밖에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이 소설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지만,
사실 이렇게 따져서는 범죄 자체에 대한 생각이 흐려지기 때문에 냉정하게 바라보자면, 좀 위험한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그래도, 죄는 죄이니까 감정적으로만 용납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같은 종류의 일가족 학살극중에서 르포르타쥬 논픽션 엠마뉘엘 카레르의 "적"이나
픽션이지만, 르포르타쥬이며 비슷한 소재의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와 함께 비교해서 읽어보아도 괜찮을 듯 싶다.
아, 물론, 이책이 제일 재밌긴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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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4-0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에 진단명 사이코패스를 보심 되겠습니다^^

Apple 2006-04-0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스인가요?^^;;큭...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두책 다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폭스 이블 블랙 캣(Black Cat) 5
미네트 월터스 지음, 권성환 옮김 / 영림카디널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이 세상에 딱 정확히 한가지 사실만이 진실인 경우는 얼마나 될까.
사람을 30명을 죽인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치자.
과연 그 연쇄살인이 온전히 연쇄살인범만의 잘못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수 있을까.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던가, 자식의 인생을 좌지우지 할수 있을 정도로 삐뚤어진 교육만을 해온
부모가 배후에 있을수도 있으며, 또는 인생전체를 핍박만 받아오면서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한쪽에서는 모피코트를 자랑스럽게 입고다니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이런 행위를 동물애호가들이 피켓을 들고 항의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즐기기 위해 보통의 상식과는 어긋나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또다른 한쪽에서는 살기위해 자연그대로의 모습으로 동물을 살상하고 섭취한다.
이 사실들중 어느 것이 정확히 올바른 일이라고 판단할수 있을까.
감히 인간이라는 보잘것 없는 존재가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보편적인 정의가 있어야하고,
그것이 완벽히 바르지는 않겠지만, 모두가 그런대로 만족하고 살기위해서는 "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결과만으로 판단되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머지 심성의 저 안쪽부터 파괴되어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만으로 죄를 묻는다.
그것이 완전히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설사 그 연쇄살인범에게 동정이 가는 구석이 있더라도
죄는 죄로 심판을 받아야하는 것이 세상이다.


이 책 "폭스 이블"은 누군가의 죽음, 또는 누군가의 고통에는 단 한사람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폭스 이블이라는 수상쩍은 이름의 잔인무도하고 교활한 범죄자가 나오기는 하지만,
단지 온전히 그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 작은 마을안의 사람들은 서로를 헐뜯고 뒷수작 피우기 여념이 없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자신의 지위향상을 위해, 또는 시덥지도 않은 불필요한 관심때문에,
타인을 헐뜯어 모욕하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거기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미움과 질투의 시선은 "폭스 이블"이라는 사람으로 대변되어 범죄로 구현되었을뿐,
모두가 선량한 인간은 아니다.
모두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모두가 또다른 타인에게 상처를 입는다.
이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서로의 명예와 자존심에 흠집을 내기위해 존재하는 듯이,
물고 뜯고 미워한다.

살면서 누구나 당치도 않은 소문을 직접 목격을 하게되는 경우가 생긴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두고 의심을 받는가 하면,
또다른 한편으로는 당치도 않은 소문을 누군가에게 전해듣고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내가 들어온 모든 사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진실인지 아닌지를 규명하기 위해서 발벗고 나서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남의 소문따위에 시간을 투자하기는 귀찮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의 피해로 돌아온다면 그때서야 움직이는 것이 인간,

자기만 알고, 자기가 가장 중요한게 결국 인간이라는 교활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인 것이다.

얼마전, 동생과 밥을 먹으면서 TV를 틀어놓았는데,
머리가 아주 긴 세자매의 이야기를 보면서 동생이 왜 저렇게 길게 머리를 기르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지하철에 머리가 껴서 다쳐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서,
"너는 왜 모르는 사람한테 악담을 하냐?"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
그제서야 동생도 얘기가 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조용해졌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세상에는 왜이리 쓸데없는 미움으로 가득차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어차피 남의 얘기이고,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나처럼 관심을 끄고 살수가 있다.
굳이 나와 상관도 없는 사람을 두고 악담을 하거나 헛소문을 퍼트리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타인을 헐뜯고 우월감을 느끼려는 간사한 마음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또다른 방식의 폐배감이고, 열등감이다.
나는 올바르게 살아가는 인간이고, 내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꼭 악이나 잘못이 아니라도 바보이고 비상식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남을 밟고 일어서는 것만이 자신을 돋보이게 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불쌍한 인간이란 말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끝도 없이 서로를 헐뜯는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소문이 한 인간을 망가뜨려가는 과정, 무엇이 진실인지를 놓고 저 먼시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책의 구술방식은
무척 훌륭하지만, 다소 권선징악의 기운이 풍기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인데, 나만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권선징악으로 결말이 나는 소설이나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긴, 나도 소설속의 못되처먹은 아줌마 둘이 죽도록 얄밉긴 했지만 말이다.)
뒤로 갈수록 다소 힘이 딸리는 것이 보여서 밀도가 떨어지고,
뭔가 끝내주는 반전을 기다린 것도 아니지만 결말은 조금 허술하다 싶을 정도로 시시해서,
그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두꺼운 책임에도 쉽고 재밌게 읽을수 있었던 책이다.
읽기 편하게 깔끔한 번역과 섬세한 편집도 무척 마음에 든다.


p.s 여주인공 격이라고 볼수 있는 낸시의 캐릭터는 별로 매력적이지가 않다.
여군으로 나오는 낸시는 얼핏 좀 오버된 관념의 패미니스트를 연상시키는데,
사실 개인적으로 패미니스트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런 타입의 여자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p.s 2. 책을 읽으면서 정말 감탄했던 점은 작가의 욕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다.-_-;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된소리발음의 욕뿐만 아니라, 보통의 사용하는 단어들만으로도 충분히
타인에게 모욕적인 감정이 들수 있게끔 만드는 신랄하고 베베꼬인 대사처리는 정말로 훌륭하다!
번역가 역시 이런 험담이나 욕을 무척 잘 와닿게 해석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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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 랑데부 동서 미스터리 북스 54
코넬 울릿치 지음, 김종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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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영화속의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다.
결코 걷히지 않을 안개에 휩쌓인채 서로에게 손을 뻗어보지만,
두 손은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휘휘 저으며 안타까운 거리감을 유지한채 서로의 말소리 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조용히 어둠이 한겹씩 깔리기 시작하고 안타까움은 공포로 바뀌고 공포는 분노로,
그리고 결국은 슬픔으로 바뀌어버린다.
코넬 울리치의 문장력은 이런 안타깝고 쓸쓸한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언제나 사랑, 하지만 언제나 닿지 못하고 베일에 가리워진 채 두려워하고 있는 고독한 정취.
코넬 울리치가 어째서 "윌리엄 아이리쉬"라는 가명과 "코넬 울리치"라는 본명을 함께 사용했는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모르고 읽더라도 두 이름이 전혀 다른 작가라고 하더라도,
이 독특한 서정성을 잊기는 아마도 힘들지 않을까.
 
어쩌면 이렇게도 지독히 슬픈 소설이 있을까 계속 생각해보았다.
초반 20페이지부터 나를 울고싶게 만들고, 수도 없이 가슴아프게 만들어놓은 이 소설-
사랑의 아픔과 인생의 분노가 담겨있는 너무나도 좋은 소설이었다.
비행기에서 떨어진 병이 한순간 어느 여자를 죽여버리는 환상적인 트릭과,
그로인해 그의 연인이 미쳐버린 냉혹한 살인마가 되어가는 인간적인 심리를,
도회적인 분위기와 신파의 정서를 섞어놓으며,
이 소설은, 때로는 가슴 찢어지게 슬프기도, 때로는 통쾌하기도,
때로는 맨몸으로 얼음덩어리에 부딪히는 듯한 냉정한 고독을 건네준다.
 
너무나도 사랑했다.
조니 마는 연인 도로시를 너무나도 오랫동안 지극히도 사랑했다.
모든 풍경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세상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그녀 뿐.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8살적부터 사랑한 이 여자와의 결혼을 준비했다.
그리고 세상은 냉정히도 그를 버린다.
가진 건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이 지극히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을,
세상은 기가 막힌 우연으로 단 하나 남은 행복을 가져가 버렸다.

그는 그녀를 기다린다. 영원히 그러기라도 할 것처럼-
똑같은 장소, 똑같은 시간에 언제든지 그녀가 돌아오면 받아줄수 있도록..
누군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평생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조니 마는 살인마가 되어버린다.
아마도 그녀가 죽은 순간 그 역시 죽었겠지.
전혀 다른 사람, 냉혹하고 비열한 살인마가 되어서,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시작한다.
사랑하는 자를 빼앗기는 슬픔을, 세상이 안겨다주는 불합리한 불행에 대한 분노를,
그의 연인을 살해했을 무고한 사람들에게 안겨다주기 시작한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참을수 없이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만약 그 분노가 사람을 향한 것이라면 어쩌면 치유할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미치도록 화가 나 있을 때, 어딘가에 미치도록 살의를 느끼고 싶었을 때,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연히 알수 없을때,
그런때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 들지 않고, 상처가 되거나 또다른 분노를 낳는다.

이 처연하고 슬픈 살인마를 보면서, 그가 복수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사람이 아닌 세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진 것이 단하나가 있어도 빼앗아가는 냉정한 세상.
 
조니 마의 가진 것없는 자의 분노는 마지막 다섯번째 랑데뷰의 맹인 여주인공 마틴의 생각과는 다르다.
마틴은 맹인에,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못한 여자이다.
아름답지만, 자신의 얼굴을 볼수가 없다.
보이지 않지만, 귀로 들리며 손으로 만져지는 세상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진심으로 절실하게 사랑받고 있다.
그것이 불륜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은 진실하고 깊고 지극하다.
아마도 그래서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불공평한지도 모르겠다.
누구는 장애인에 한 남자의 정부인데도 행복하고,
누구는 절절히 사랑하던 연인을 빼앗기고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냥 죽어가버리니까 말이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있다.
어떤 사랑은 순수하고, 어떤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어떤 사랑은 음탕하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할수 있을까.
그 순간 미친듯이 행복했더라면, 그것은 부정할 바 없는 사랑이 아니었을런지...
가끔씩 나는 지나친 연인들을 되돌이켜보고, 내가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찾아볼 때가 있다.
그리고 가끔씩은 그들 중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을 내릴 때도 있다.
어쩌면 조니 마의 사랑처럼 변질되지 않고 영원히 반짝일수 있는 사랑을,
세상에 아마도 그런 사랑이 내게는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란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그들을 그 순간만은 사랑했는데도 말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에 변하기도 하고, 서서히 변해가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쓸쓸하고 가슴아픈 결과를 초래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그런 변화조차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을 보면서 몇번을 울었는지 모르겠다.
처연하고 고독하고 슬픈 감수성은 기분을 늪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이 소설을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하고 후회가 된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가끔씩 들쳐보면서 이 가슴아픈 쾌락을 즐기고 싶다.
하나하나 간단하게도 가슴을 파고들어서 생채기를 내버리는 문장력은 정말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누구나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코넬 울리치, 윌리엄 아이리쉬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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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와의 결혼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3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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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제인에어와 로체스터씨와 히스클리프에게 꽤 오래도록 사랑에 빠져있었던 적이 있었다.
다 자라고 나서 본 그 책들의 자세한 인물 묘사는 참 실망적이었다.
예쁜 구석 하나도 없는 제인에어와 머리가 큰 다부진 체격의 로체스터씨,
거의 소도둑놈에 가까운 인상의 히스클리프.
어린 시절부터 호리호리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좋아하는 내가 어째서 이런 예쁜 구석없는 인물들을 좋아했을까 떠올려보면,
아마도 그들의 비밀과 고독으로 일그러진 상처받은 내면에 홀딱 반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 나는 언제나 그런 캐릭터를 사랑한다.
지독히도 외롭고, 고민에 휩쌓여 있으며, 음울한-
그래서 내버려 둘수 없이 한번쯤 다정하게 말을 걸어 얘기해 보고 싶은 사람들 말이다.
 
 
어느날 갑자기,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이 불현듯이 떠올라서,
윌리엄 아이리쉬의 다른 소설들을 두권 주문했다.
그중 하나인 이 책 "죽은 자와의 결혼"의 두 주인공 패트리스와 빌을 바라보면서,
나는 똑같은 호감을 느꼈다.
연약하고 보잘것 없고 언제나 불안에 휩쌓인 여주인공 패트리스,
패트리스에게 과감히 다가서는, 사랑해서는 안되지만 너무나 다정해서 사랑할수 밖에 없는 남자 빌.
그들의 로맨스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애절하면서도, 동시에 우울하고 슬프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갓 스무살된 헬렌은 가진것 없고 비참한 신세의 여자이다.
운나쁘게도 상종해서는 안될 남자를 만난 댓가로 혹처럼 붙어있는 뱃속의 아기.
그녀가 가진 돈은 단 5달라.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 친절한 신혼부부를 만났는데, 이 만남은 그녀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를 준다.
기차가 사고가 나고, 두 신혼 부부는 죽었으며, 그 와중에 헬렌은 아이를 낳아버렸고,
신혼부부중 여자가 손을 씻으라 잠시 건네준 다이아 반지를 끼고 있다가
사고 후에 병실에서 깨어났을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여자 패트리스, 반지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던 패트리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헬렌은 패트리스의 인생을 살게 되고, 도시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의 며느리가 되어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끝없이 양심이 그녀의 이성을 질책해오지만,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다.
누가 이 여자를 비난하랴.
 
부유한 생활. 너무도 친절한 사람들. 다정한 시동생 빌.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는 아기.
행복의 정점에 서서 패트리스가 늘 고뇌를 하고있는 이유는
그녀의 이런 거짓말이 언제 들킬지 몰라서이다.
그녀는 늘 불행했던 때보다, 행복이 깨어져 불행해지는 것이 더 슬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매일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한 패트리스의 심리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책을 읽는 내내 불안함과 초조함에 휩쌓이게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은 똑같을까?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믿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믿지 않음에도 사랑하곤 한다.
모순이지만, 인간의 마음 중 어느 것이 정확히 언행일치하는 적이 있던가.
심지어는 경멸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는데 말이다.
소설의 결말은 무척 쓸쓸하고 가슴이 아파서 보고난 후에 한참동안 마음이 괴로웠다.
낮에 먹은 점심이 채해서 목에 걸려 저녁까지 괴로운 것처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지도 모르지만,
패트리스와 빌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은채 살면 좋으련만, 이 착한 주인공들의 양심은 너무나 깨끗하고 여려서,
아마도 평생 그 불신과 자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겠지.
언젠가 그가 떠날지도,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
사랑하지만, 그렇단다.
 
이책은 추리소설임과 동시에, 로맨스 소설이다.
윌리엄 아이리쉬의 우울하게 침잠해가는 애수어린 로맨스는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미칠듯이 불안해서 순간 순간 산산히 부수어져 버리는 마음, 손에 잡히지않는 우울한 사랑,
행복 역시 불안과 신경쇄약으로 흩어져가는 고독한 풍경-
나는 정말로 이런 것이 너무나 좋다.
윌리엄 아이리쉬마저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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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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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읽고 났을때는 무척 화가 났었다.
어째서 이런 결말을 내야했는지, 좀 오버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너무 화가 나서 역겨울 지경이었다.
더 역겨웠던 사실은 내가 이 소설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일류대기업의 잘나가는 여사원이 살해되면서 시작된다.
일류 여고를 졸업하고, 일류대를 나와 끝까지 승진할수 있는 전망 좋은 직업을 가진 이 여자는
낮에는 능력있는 캐리어우먼으로, 밤에는 밤거리를 전전하며 남자를 찾는 창녀로 살아간다.
그리고 창녀쪽의 여자로써 어느날 갑자기 살해된다.
소설은 이 여자 가즈에의 죽음을 시작으로 오래전의 이야기부터 관련된 사람들의 심리와 사건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있다.

이 소설이 잔인한 이유는, 살인사건 때문이 아니다.
작가는 추악하고 그로테스크하기 그지 없는 현실의 내면을,
그리고 여자의 내면을 메스로 갈기 갈기 찢어 보여준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에 형태가 있어서 꺼내볼수 있다면
그 결과물은 이렇게 역겹고 추하지 않을까.
 
 
유리코라는 소녀가 있다.
스웨덴인 아버지에 일본인 어머니, 둘다 잘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누구나 돌아보게 만들만큼 눈이 부신 아름다운 괴물 유리코라는 혼혈아를 낳았다.
유리코. 타고난 요부이나 창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고나서부터 섹스를 좋아하는 님포마니아.
그녀가 살아가야하는 이유는 오직 그 뿐이다.
그녀는 남자가 없이는 살수 없는 선천적인 창녀.
하지만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남자가 아닌, 섹스이기 때문.
언제나 먼곳을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을 잡으려고 하는 남자들은 그녀를 어떻게든 가져보려고 하고,
일찍이 이런 시선에 너무나 익숙한 유리코는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번다.
그렇게 중학교때부터 시작된 매춘은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애초부터 그렇게 살도록 태어난 존재이다.
 
유리코의 언니, 소설의 진행자 "나"는(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똑같은 혼혈아이면서도 유리코와는 정 반대이다.
유리코에 비해서 늘 모자라는 외모덕에 평생을 유리코와 비교되면서 살아온 여자.
언제나 누구에게나 이름보다는 "유리코의 언니"로 기억되는 여자.
덕분에 동생인 유리코를 죽도록 싫어하고, 실제로 유리코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매정하고 냉정한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애써 키워왔던 것은 "악의".
남의 싫어하고 깍아내리면서 온통 적개심으로 가득차, 세상의 무엇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
기회가 닿는대로 타인에게 시비를 걸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타고난 염세주의자.
 
그리고 미쓰루가 있다.
"나"가 동경했던, 아니, 누구나 동경했을지 모를 머리좋고, 게다가 성격도 좋은 우등생.
"나"가 살아남기 위해 악의를 선택했다면, 미쓰루는 "두뇌"를 선택했다.
철처히 계급중심의 사회인 Q학원 중학생 시절 왕따를 경험하고 나서
그녀는 전략적으로 아이들에게 노트를 기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잔인무도한 Q학원에서 그녀가 살아남을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머리가 좋아서도, 성격이 좋아서도, 얼굴이 그런대로 예뻐서도 아닌,
단지 "이득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소설이 있어야하는 이유, 대기업의 캐리어우먼이자 창녀인 이중생활을 해온 가즈에가 있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악바리가 된 여자.
남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라가서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든 1등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
계급사회에 철저하게 동화된 채, 무엇이든 1등에 올라가고 싶은 여자.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미련하고 우매한 노력가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내가 보기엔, 가즈에에게는 자존심도, 자기애도 없다.
아니, 예전에는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즈애는 원래 가져야할 자존심은 사라지고,
살아남기 위해 택했던 악바리 근성밖에 남지 않은 괴물이 되어간다.
 
연봉을 1천만엔이나 받는 여직원이 왜 창녀가 되었을까?
가즈에는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따라갈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흡수해버리는 유리코의 미를 동경해왔고,
능력있어서 들어간 회사인데도 타고난 외모가 못생긴 가즈에는
남자들의 눈에는 메력적인 여자로 비춰지지 않는다.
적당히 무시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남자의 관심을 받기위해 존재하는 여자의 아름다움이,
단지 한 때 젊은 시절 잠시 지나가는 소모품이라는 것을 가즈에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기고 싶은 것이다.
섹스에서조차 1등이 되어보고 싶은 것이다.
머리만 좋고 못생겼다고 뒤에서 수근대는 여직원들에게,
여직원을 외모로 평가하는 남직원들에게,

나는 너희가 절대로 할수 없는 짓을 밤에는 하고 있다라고 마음속으로 비웃으면서,
이 외모중심의 사회에서 이런 나라도 남자의 관심을 받고 있다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이기고 싶어서 어쩔줄을 모르는 여자.
나는 이런 미련하고 극단적인 악바리가 정말로 싫다.
그래도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기의지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자존심덩어리로 보이는 가즈에 만큼은 자기의지가 없어보인다.
그녀는 어쩌면 남들이 하는 것을 모두다 하고싶어하는 욕망의 동물이 아닐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스토킹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타인의 성적과 비결을 따라가려는 비열한 1등 마니아.
누구나에게 무엇이든 잘하는 자기자신을 자랑하고 싶었던 과시욕 마니아.
결국 가즈에가 그토록 망가져버린 것은 더이상 등수가 필요없는 세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일 아닐까.
 
언제나 1등 하려고 전전긍긍했지만, 세상에 나와보니 등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기보다 잘난 여자가 먼저 나서 커피를 돌리고 여유있게 웃을때,
가즈에는 우습게 보면서도 의아해한다.
그녀에게 있는 또다른 세상, 평범한 남자친구와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는 일상,
가즈에가 동경했던 것은 1등이 아니라, 이런 여유가 아니었을까.
가질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가즈에는
결국 남다른 재능-끊임없이 미련한 노력을 계속하는-을 이용해서 결국은
엉뚱한 쪽으로 자기자신을 붕괘시켜 버린다.

 
 
 
소설은 일단은 화자인 "나"에 의해서 진행되지만,
네 여자의 견해를 모두 들어보고나서,
창녀인 유리코의 살인사건 1년후에 일어난 밤에는 창녀로 변신하는 엘리트 여사원의 살인 사건을
다각도에서 풀이해나간다.
만약 단 한사람의 의견에 의해서 소설이 진행되었더라면, 좀더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다각도의 시선은 이 소설에 나오는 어떤 등장인물에도 호감을 가질수 없게 만든다.
모두 삐뚤어지고, 조금의 여유도 없으며, 추악하기 이를데 없는 괴물처럼 보인다.
결국 이 얘기는 네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네 괴물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유도했던 대로이다.
기리노 나쓰오는 작가의 말에서 다 읽고 난 독자의 마음에 "괴물"이 떠올랐다면 성공적이라고 말하는데,
그 점에서는 아주 충분히 성공적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듯이, 다각도로 바라본 사건들은 모두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진실이면서 진실이 아니다.
 
악평을 늘어놓는 것같아보이지만, 사실은 이글은 악평이 아니다.
인간의 추악한 점만 모아놓는다면, 분명 이런 소설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무척 속이 좋지 않았고, 두려웠고, 화가 났다.
여자로써 이 지독히 잔인한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이 무엇인지, 
결국은 이 소설도 말해주지는 못한다.
단지 암울한 결론 "여자이니까, 여자라서"-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고 추악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정답도 없는 것을 내가 혼자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사실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로,
무척 현실성있게 다가오는 점이 아주 많은 소설이다.
그래서 더더욱 잔인무도하다.
이런게 세상이라면, 이런 세상에 노출될 바에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찌르고 분석한다.
 
하지만 이게 현실인 걸.
외모중심의 세상에 태어나 외모중심으로 평가받고, 늙으면 그 외모도 필요없어진다.
젊은 시절 누구에게나 여신이었던 유리코가 후에 늙어버린 창녀가 되었을 때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왕따에 둔하고 미련한 노력가였던 가즈에가 결국 창녀가 되었을때,
그녀의 죽음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다.
그녀의 죽음이 안타깝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녀가 성공한 캐리어우먼과 창녀 두가지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어째서 인간은 이런 그로테스크한 세상을 만들어버렸을까.
어째서 여자는 늘 외모중심도, 능력중심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아갈수 밖에 없을까.
그리고 어째서 여자는 여자를 좀더 사랑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소설속의 네 여주인공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싸우거나, 비웃거나, 서로를 질투하고, 악의를 가득 채운채 어떻게든 모욕을 주려 작정한 사람들같다.
서로의 마음속은 서로 알바 아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택한 시선에 따라서 그들은 서로를 증오한다.
유리코는 냉정한 언니를 증오하고, "나"는 유리코를 멍청하다고 증오하고,
가즈에는 "나"를 폐배자라고 욕하며, "나"는 가즈에는 멍청한 왕따라고 비웃는다.
이 소설속의 서로에게 조금의 동정심이나마 갖지 못하는 네 여자주인공들을 보면서,
내가 혹시 타인의 마음속에는 저렇게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어쩌면 내 속에도 이 네 여자가 모두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여자이면서도 질투하고, 적의를 느끼고, 왠만하면 실패했으면 좋겠고,  비웃으며, 놀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 일그러지고 삐뚤어진 면은 우리모두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섭다. 속을 완전히 알수 없기에 더 무섭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세상은 무섭고 추악하다.
 
어디엔가 분명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기껏 공부해서 들어간 회사에서 커피심부름이나 하는 여직원들,
회식 자리에서조차 상품으로 평가받는 여직원들,
평생 세상에 대한 악의를 품고 살아가는 여자들,
악바리로 살아남으려고 애쓰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서서히 자기내면을 자기손으로 엉망진창으로 붕괘해 나가는 여자들...
그래봤자, 모두 탈피 할수 없었던 여자라는 껍데기안의 여자라는 괴물.
씁쓸하고 역겹고 두렵다.
사실 재밌게 보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볼수 있었는지,
나 역시 그들의 마음 아픈 심리보다 그로테스크한 겉모양에 심취한 속물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니
무척 부끄러워졌다.
 
 
매우 거북한 소설이다.
아프게 찔러오고, 화가나게 만들고, 눈물이 나게 만든 다음, 역겹게 만든다.
좀 황당한 결말을 뺀다면, 분명 멋진 소설임에는 분명하지만,
두번 읽을 용기는 나지 않는다.
너무 그로테스크해서, 너무 역겹고 지독해서-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어떤 공포소설보다도 무서운 현실의 이야기라서-
그래서 이 이상은 다시 쳐다보지 않고 영원히 봉인해버릴테다.
그리고 기리노 나츠오의 다른 소설을 읽는 것도 당분간 보류해두어야 겠다.
기리노 나츠오의 독은 너무 치명적이고 지독해서 당분간은 감당하기 힘들것 같다.
 
 
p.s 누구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 소설안의 등장인물들중에서,
유일하게 사랑받았던 사람은 주인공의 외할아버지가 아닐까.
외할아버지를 거의 만나지 않았던 유리코조차, 외할아버지에게 알수 없는 애정을 느끼고,
주인공 역시 외할아버지와의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어쩌면 이렇게 느긋하고도 약간은 바보같이 살아야 사랑받을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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