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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와의 결혼 ㅣ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3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김석환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3월
평점 :
어릴 때 나는 제인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제인에어와 로체스터씨와 히스클리프에게 꽤 오래도록 사랑에 빠져있었던 적이 있었다.
다 자라고 나서 본 그 책들의 자세한 인물 묘사는 참 실망적이었다.
예쁜 구석 하나도 없는 제인에어와 머리가 큰 다부진 체격의 로체스터씨,
거의 소도둑놈에 가까운 인상의 히스클리프.
어린 시절부터 호리호리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좋아하는 내가 어째서 이런 예쁜 구석없는 인물들을 좋아했을까 떠올려보면,
아마도 그들의 비밀과 고독으로 일그러진 상처받은 내면에 홀딱 반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 나는 언제나 그런 캐릭터를 사랑한다.
지독히도 외롭고, 고민에 휩쌓여 있으며, 음울한-
그래서 내버려 둘수 없이 한번쯤 다정하게 말을 걸어 얘기해 보고 싶은 사람들 말이다.
어느날 갑자기,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이 불현듯이 떠올라서,
윌리엄 아이리쉬의 다른 소설들을 두권 주문했다.
그중 하나인 이 책 "죽은 자와의 결혼"의 두 주인공 패트리스와 빌을 바라보면서,
나는 똑같은 호감을 느꼈다.
연약하고 보잘것 없고 언제나 불안에 휩쌓인 여주인공 패트리스,
패트리스에게 과감히 다가서는, 사랑해서는 안되지만 너무나 다정해서 사랑할수 밖에 없는 남자 빌.
그들의 로맨스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애절하면서도, 동시에 우울하고 슬프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갓 스무살된 헬렌은 가진것 없고 비참한 신세의 여자이다.
운나쁘게도 상종해서는 안될 남자를 만난 댓가로 혹처럼 붙어있는 뱃속의 아기.
그녀가 가진 돈은 단 5달라.
기차를 타고 가던 도중, 친절한 신혼부부를 만났는데, 이 만남은 그녀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를 준다.
기차가 사고가 나고, 두 신혼 부부는 죽었으며, 그 와중에 헬렌은 아이를 낳아버렸고,
신혼부부중 여자가 손을 씻으라 잠시 건네준 다이아 반지를 끼고 있다가
사고 후에 병실에서 깨어났을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여자 패트리스, 반지를 맡아달라고 부탁하던 패트리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헬렌은 패트리스의 인생을 살게 되고, 도시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의 며느리가 되어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끝없이 양심이 그녀의 이성을 질책해오지만,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다.
누가 이 여자를 비난하랴.
부유한 생활. 너무도 친절한 사람들. 다정한 시동생 빌.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는 아기.
행복의 정점에 서서 패트리스가 늘 고뇌를 하고있는 이유는
그녀의 이런 거짓말이 언제 들킬지 몰라서이다.
그녀는 늘 불행했던 때보다, 행복이 깨어져 불행해지는 것이 더 슬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매일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한 패트리스의 심리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책을 읽는 내내 불안함과 초조함에 휩쌓이게 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은 똑같을까?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면서도 믿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믿지 않음에도 사랑하곤 한다.
모순이지만, 인간의 마음 중 어느 것이 정확히 언행일치하는 적이 있던가.
심지어는 경멸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는데 말이다.
소설의 결말은 무척 쓸쓸하고 가슴이 아파서 보고난 후에 한참동안 마음이 괴로웠다.
낮에 먹은 점심이 채해서 목에 걸려 저녁까지 괴로운 것처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지도 모르지만,
패트리스와 빌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은채 살면 좋으련만, 이 착한 주인공들의 양심은 너무나 깨끗하고 여려서,
아마도 평생 그 불신과 자책감을 가지고 살아가겠지.
언젠가 그가 떠날지도,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
사랑하지만, 그렇단다.
이책은 추리소설임과 동시에, 로맨스 소설이다.
윌리엄 아이리쉬의 우울하게 침잠해가는 애수어린 로맨스는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미칠듯이 불안해서 순간 순간 산산히 부수어져 버리는 마음, 손에 잡히지않는 우울한 사랑,
행복 역시 불안과 신경쇄약으로 흩어져가는 고독한 풍경-
나는 정말로 이런 것이 너무나 좋다.
윌리엄 아이리쉬마저 사랑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