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모두 읽고 났을때는 무척 화가 났었다.
어째서 이런 결말을 내야했는지, 좀 오버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너무 화가 나서 역겨울 지경이었다.
더 역겨웠던 사실은 내가 이 소설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일류대기업의 잘나가는 여사원이 살해되면서 시작된다.
일류 여고를 졸업하고, 일류대를 나와 끝까지 승진할수 있는 전망 좋은 직업을 가진 이 여자는
낮에는 능력있는 캐리어우먼으로, 밤에는 밤거리를 전전하며 남자를 찾는 창녀로 살아간다.
그리고 창녀쪽의 여자로써 어느날 갑자기 살해된다.
소설은 이 여자 가즈에의 죽음을 시작으로 오래전의 이야기부터 관련된 사람들의 심리와 사건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있다.

이 소설이 잔인한 이유는, 살인사건 때문이 아니다.
작가는 추악하고 그로테스크하기 그지 없는 현실의 내면을,
그리고 여자의 내면을 메스로 갈기 갈기 찢어 보여준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에 형태가 있어서 꺼내볼수 있다면
그 결과물은 이렇게 역겹고 추하지 않을까.
 
 
유리코라는 소녀가 있다.
스웨덴인 아버지에 일본인 어머니, 둘다 잘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누구나 돌아보게 만들만큼 눈이 부신 아름다운 괴물 유리코라는 혼혈아를 낳았다.
유리코. 타고난 요부이나 창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고나서부터 섹스를 좋아하는 님포마니아.
그녀가 살아가야하는 이유는 오직 그 뿐이다.
그녀는 남자가 없이는 살수 없는 선천적인 창녀.
하지만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남자가 아닌, 섹스이기 때문.
언제나 먼곳을 응시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을 잡으려고 하는 남자들은 그녀를 어떻게든 가져보려고 하고,
일찍이 이런 시선에 너무나 익숙한 유리코는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번다.
그렇게 중학교때부터 시작된 매춘은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애초부터 그렇게 살도록 태어난 존재이다.
 
유리코의 언니, 소설의 진행자 "나"는(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똑같은 혼혈아이면서도 유리코와는 정 반대이다.
유리코에 비해서 늘 모자라는 외모덕에 평생을 유리코와 비교되면서 살아온 여자.
언제나 누구에게나 이름보다는 "유리코의 언니"로 기억되는 여자.
덕분에 동생인 유리코를 죽도록 싫어하고, 실제로 유리코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매정하고 냉정한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
그녀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애써 키워왔던 것은 "악의".
남의 싫어하고 깍아내리면서 온통 적개심으로 가득차, 세상의 무엇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
기회가 닿는대로 타인에게 시비를 걸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타고난 염세주의자.
 
그리고 미쓰루가 있다.
"나"가 동경했던, 아니, 누구나 동경했을지 모를 머리좋고, 게다가 성격도 좋은 우등생.
"나"가 살아남기 위해 악의를 선택했다면, 미쓰루는 "두뇌"를 선택했다.
철처히 계급중심의 사회인 Q학원 중학생 시절 왕따를 경험하고 나서
그녀는 전략적으로 아이들에게 노트를 기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잔인무도한 Q학원에서 그녀가 살아남을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머리가 좋아서도, 성격이 좋아서도, 얼굴이 그런대로 예뻐서도 아닌,
단지 "이득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소설이 있어야하는 이유, 대기업의 캐리어우먼이자 창녀인 이중생활을 해온 가즈에가 있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악바리가 된 여자.
남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라가서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든 1등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자.
계급사회에 철저하게 동화된 채, 무엇이든 1등에 올라가고 싶은 여자.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미련하고 우매한 노력가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내가 보기엔, 가즈에에게는 자존심도, 자기애도 없다.
아니, 예전에는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즈애는 원래 가져야할 자존심은 사라지고,
살아남기 위해 택했던 악바리 근성밖에 남지 않은 괴물이 되어간다.
 
연봉을 1천만엔이나 받는 여직원이 왜 창녀가 되었을까?
가즈에는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자신이 따라갈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흡수해버리는 유리코의 미를 동경해왔고,
능력있어서 들어간 회사인데도 타고난 외모가 못생긴 가즈에는
남자들의 눈에는 메력적인 여자로 비춰지지 않는다.
적당히 무시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남자의 관심을 받기위해 존재하는 여자의 아름다움이,
단지 한 때 젊은 시절 잠시 지나가는 소모품이라는 것을 가즈에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기고 싶은 것이다.
섹스에서조차 1등이 되어보고 싶은 것이다.
머리만 좋고 못생겼다고 뒤에서 수근대는 여직원들에게,
여직원을 외모로 평가하는 남직원들에게,

나는 너희가 절대로 할수 없는 짓을 밤에는 하고 있다라고 마음속으로 비웃으면서,
이 외모중심의 사회에서 이런 나라도 남자의 관심을 받고 있다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이기고 싶어서 어쩔줄을 모르는 여자.
나는 이런 미련하고 극단적인 악바리가 정말로 싫다.
그래도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기의지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자존심덩어리로 보이는 가즈에 만큼은 자기의지가 없어보인다.
그녀는 어쩌면 남들이 하는 것을 모두다 하고싶어하는 욕망의 동물이 아닐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는 스토킹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타인의 성적과 비결을 따라가려는 비열한 1등 마니아.
누구나에게 무엇이든 잘하는 자기자신을 자랑하고 싶었던 과시욕 마니아.
결국 가즈에가 그토록 망가져버린 것은 더이상 등수가 필요없는 세상에 노출되었기 때문일 아닐까.
 
언제나 1등 하려고 전전긍긍했지만, 세상에 나와보니 등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기보다 잘난 여자가 먼저 나서 커피를 돌리고 여유있게 웃을때,
가즈에는 우습게 보면서도 의아해한다.
그녀에게 있는 또다른 세상, 평범한 남자친구와 평범한 데이트를 즐기는 일상,
가즈에가 동경했던 것은 1등이 아니라, 이런 여유가 아니었을까.
가질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가즈에는
결국 남다른 재능-끊임없이 미련한 노력을 계속하는-을 이용해서 결국은
엉뚱한 쪽으로 자기자신을 붕괘시켜 버린다.

 
 
 
소설은 일단은 화자인 "나"에 의해서 진행되지만,
네 여자의 견해를 모두 들어보고나서,
창녀인 유리코의 살인사건 1년후에 일어난 밤에는 창녀로 변신하는 엘리트 여사원의 살인 사건을
다각도에서 풀이해나간다.
만약 단 한사람의 의견에 의해서 소설이 진행되었더라면, 좀더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다각도의 시선은 이 소설에 나오는 어떤 등장인물에도 호감을 가질수 없게 만든다.
모두 삐뚤어지고, 조금의 여유도 없으며, 추악하기 이를데 없는 괴물처럼 보인다.
결국 이 얘기는 네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네 괴물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유도했던 대로이다.
기리노 나쓰오는 작가의 말에서 다 읽고 난 독자의 마음에 "괴물"이 떠올랐다면 성공적이라고 말하는데,
그 점에서는 아주 충분히 성공적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듯이, 다각도로 바라본 사건들은 모두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진실이면서 진실이 아니다.
 
악평을 늘어놓는 것같아보이지만, 사실은 이글은 악평이 아니다.
인간의 추악한 점만 모아놓는다면, 분명 이런 소설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무척 속이 좋지 않았고, 두려웠고, 화가 났다.
여자로써 이 지독히 잔인한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이 무엇인지, 
결국은 이 소설도 말해주지는 못한다.
단지 암울한 결론 "여자이니까, 여자라서"-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고 추악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정답도 없는 것을 내가 혼자 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사실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로,
무척 현실성있게 다가오는 점이 아주 많은 소설이다.
그래서 더더욱 잔인무도하다.
이런게 세상이라면, 이런 세상에 노출될 바에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찌르고 분석한다.
 
하지만 이게 현실인 걸.
외모중심의 세상에 태어나 외모중심으로 평가받고, 늙으면 그 외모도 필요없어진다.
젊은 시절 누구에게나 여신이었던 유리코가 후에 늙어버린 창녀가 되었을 때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왕따에 둔하고 미련한 노력가였던 가즈에가 결국 창녀가 되었을때,
그녀의 죽음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다.
그녀의 죽음이 안타깝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녀가 성공한 캐리어우먼과 창녀 두가지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어째서 인간은 이런 그로테스크한 세상을 만들어버렸을까.
어째서 여자는 늘 외모중심도, 능력중심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아갈수 밖에 없을까.
그리고 어째서 여자는 여자를 좀더 사랑해주지 못하는 것일까.
 
소설속의 네 여주인공들은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싸우거나, 비웃거나, 서로를 질투하고, 악의를 가득 채운채 어떻게든 모욕을 주려 작정한 사람들같다.
서로의 마음속은 서로 알바 아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타인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택한 시선에 따라서 그들은 서로를 증오한다.
유리코는 냉정한 언니를 증오하고, "나"는 유리코를 멍청하다고 증오하고,
가즈에는 "나"를 폐배자라고 욕하며, "나"는 가즈에는 멍청한 왕따라고 비웃는다.
이 소설속의 서로에게 조금의 동정심이나마 갖지 못하는 네 여자주인공들을 보면서,
내가 혹시 타인의 마음속에는 저렇게 비춰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어쩌면 내 속에도 이 네 여자가 모두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여자이면서도 질투하고, 적의를 느끼고, 왠만하면 실패했으면 좋겠고,  비웃으며, 놀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 일그러지고 삐뚤어진 면은 우리모두에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섭다. 속을 완전히 알수 없기에 더 무섭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세상은 무섭고 추악하다.
 
어디엔가 분명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기껏 공부해서 들어간 회사에서 커피심부름이나 하는 여직원들,
회식 자리에서조차 상품으로 평가받는 여직원들,
평생 세상에 대한 악의를 품고 살아가는 여자들,
악바리로 살아남으려고 애쓰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서서히 자기내면을 자기손으로 엉망진창으로 붕괘해 나가는 여자들...
그래봤자, 모두 탈피 할수 없었던 여자라는 껍데기안의 여자라는 괴물.
씁쓸하고 역겹고 두렵다.
사실 재밌게 보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볼수 있었는지,
나 역시 그들의 마음 아픈 심리보다 그로테스크한 겉모양에 심취한 속물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니
무척 부끄러워졌다.
 
 
매우 거북한 소설이다.
아프게 찔러오고, 화가나게 만들고, 눈물이 나게 만든 다음, 역겹게 만든다.
좀 황당한 결말을 뺀다면, 분명 멋진 소설임에는 분명하지만,
두번 읽을 용기는 나지 않는다.
너무 그로테스크해서, 너무 역겹고 지독해서-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어떤 공포소설보다도 무서운 현실의 이야기라서-
그래서 이 이상은 다시 쳐다보지 않고 영원히 봉인해버릴테다.
그리고 기리노 나츠오의 다른 소설을 읽는 것도 당분간 보류해두어야 겠다.
기리노 나츠오의 독은 너무 치명적이고 지독해서 당분간은 감당하기 힘들것 같다.
 
 
p.s 누구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 소설안의 등장인물들중에서,
유일하게 사랑받았던 사람은 주인공의 외할아버지가 아닐까.
외할아버지를 거의 만나지 않았던 유리코조차, 외할아버지에게 알수 없는 애정을 느끼고,
주인공 역시 외할아버지와의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여기고 있으니까.
어쩌면 이렇게 느긋하고도 약간은 바보같이 살아야 사랑받을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