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의 랑데부 동서 미스터리 북스 54
코넬 울릿치 지음, 김종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흑백영화속의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다.
결코 걷히지 않을 안개에 휩쌓인채 서로에게 손을 뻗어보지만,
두 손은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휘휘 저으며 안타까운 거리감을 유지한채 서로의 말소리 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조용히 어둠이 한겹씩 깔리기 시작하고 안타까움은 공포로 바뀌고 공포는 분노로,
그리고 결국은 슬픔으로 바뀌어버린다.
코넬 울리치의 문장력은 이런 안타깝고 쓸쓸한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언제나 사랑, 하지만 언제나 닿지 못하고 베일에 가리워진 채 두려워하고 있는 고독한 정취.
코넬 울리치가 어째서 "윌리엄 아이리쉬"라는 가명과 "코넬 울리치"라는 본명을 함께 사용했는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모르고 읽더라도 두 이름이 전혀 다른 작가라고 하더라도,
이 독특한 서정성을 잊기는 아마도 힘들지 않을까.
 
어쩌면 이렇게도 지독히 슬픈 소설이 있을까 계속 생각해보았다.
초반 20페이지부터 나를 울고싶게 만들고, 수도 없이 가슴아프게 만들어놓은 이 소설-
사랑의 아픔과 인생의 분노가 담겨있는 너무나도 좋은 소설이었다.
비행기에서 떨어진 병이 한순간 어느 여자를 죽여버리는 환상적인 트릭과,
그로인해 그의 연인이 미쳐버린 냉혹한 살인마가 되어가는 인간적인 심리를,
도회적인 분위기와 신파의 정서를 섞어놓으며,
이 소설은, 때로는 가슴 찢어지게 슬프기도, 때로는 통쾌하기도,
때로는 맨몸으로 얼음덩어리에 부딪히는 듯한 냉정한 고독을 건네준다.
 
너무나도 사랑했다.
조니 마는 연인 도로시를 너무나도 오랫동안 지극히도 사랑했다.
모든 풍경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세상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그녀 뿐.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8살적부터 사랑한 이 여자와의 결혼을 준비했다.
그리고 세상은 냉정히도 그를 버린다.
가진 건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이 지극히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을,
세상은 기가 막힌 우연으로 단 하나 남은 행복을 가져가 버렸다.

그는 그녀를 기다린다. 영원히 그러기라도 할 것처럼-
똑같은 장소, 똑같은 시간에 언제든지 그녀가 돌아오면 받아줄수 있도록..
누군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평생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조니 마는 살인마가 되어버린다.
아마도 그녀가 죽은 순간 그 역시 죽었겠지.
전혀 다른 사람, 냉혹하고 비열한 살인마가 되어서,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시작한다.
사랑하는 자를 빼앗기는 슬픔을, 세상이 안겨다주는 불합리한 불행에 대한 분노를,
그의 연인을 살해했을 무고한 사람들에게 안겨다주기 시작한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참을수 없이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만약 그 분노가 사람을 향한 것이라면 어쩌면 치유할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 미치도록 화가 나 있을 때, 어딘가에 미치도록 살의를 느끼고 싶었을 때,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연히 알수 없을때,
그런때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 들지 않고, 상처가 되거나 또다른 분노를 낳는다.

이 처연하고 슬픈 살인마를 보면서, 그가 복수하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사람이 아닌 세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진 것이 단하나가 있어도 빼앗아가는 냉정한 세상.
 
조니 마의 가진 것없는 자의 분노는 마지막 다섯번째 랑데뷰의 맹인 여주인공 마틴의 생각과는 다르다.
마틴은 맹인에,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못한 여자이다.
아름답지만, 자신의 얼굴을 볼수가 없다.
보이지 않지만, 귀로 들리며 손으로 만져지는 세상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진심으로 절실하게 사랑받고 있다.
그것이 불륜이라 할지라도, 그 사랑은 진실하고 깊고 지극하다.
아마도 그래서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불공평한지도 모르겠다.
누구는 장애인에 한 남자의 정부인데도 행복하고,
누구는 절절히 사랑하던 연인을 빼앗기고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냥 죽어가버리니까 말이다.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 있다.
어떤 사랑은 순수하고, 어떤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어떤 사랑은 음탕하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할수 있을까.
그 순간 미친듯이 행복했더라면, 그것은 부정할 바 없는 사랑이 아니었을런지...
가끔씩 나는 지나친 연인들을 되돌이켜보고, 내가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찾아볼 때가 있다.
그리고 가끔씩은 그들 중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을 내릴 때도 있다.
어쩌면 조니 마의 사랑처럼 변질되지 않고 영원히 반짝일수 있는 사랑을,
세상에 아마도 그런 사랑이 내게는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바란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그들을 그 순간만은 사랑했는데도 말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에 변하기도 하고, 서서히 변해가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쓸쓸하고 가슴아픈 결과를 초래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그런 변화조차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을 보면서 몇번을 울었는지 모르겠다.
처연하고 고독하고 슬픈 감수성은 기분을 늪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이 소설을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하고 후회가 된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가끔씩 들쳐보면서 이 가슴아픈 쾌락을 즐기고 싶다.
하나하나 간단하게도 가슴을 파고들어서 생채기를 내버리는 문장력은 정말로 최고라고 생각한다.
 
누구나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코넬 울리치, 윌리엄 아이리쉬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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