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겨울이다. 문밖의 밤은 차고, 눈발마저 흩날린다. 산다는 게 얼마간은 고통스럽고, 다소간은 눈물겹다. 무서운 줄 모르고 놀린 누군가의 세 치 혀는 죄 없는 영혼의 문풍지를 온밤 내 떨게 하고, 상처의 심연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몸과 마음엔 아수라들만 겹겹이 쌓인다. 하필이면 이런 날, 백석의「수라」같은 시가 눈에 띌 게 뭔가.

 

 

  차디찬 밤, 아무 생각 없었던 시인은 거미새끼 한 마리를 문밖으로 쓸어내 버린다. (얼마나 다행인가. 밟거나 쳐서 죽인 게 아니니!) 곧이어 큰거미를 같은 장소에서 발견한다. 고만 짠해진 시인은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큰거미를 밖으로 버린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알에서 갓 깬 새끼거미가 그 자리에 또 아물거린다. 끝내 가슴이 메고 서러운 시인은 어린 새끼를 고이 종이에 받아 내어준다. 가족이 있는 찬 문밖으로. 따뜻하고 외로울 바엔, 바람 차더라도 함께 하는 게 낫겠네. 거긴들 수라의 세계를 벗어날까만.

 

 

  수라(修羅)는 아수라의 준말로 인도신화에 나오는 여덟 신(神)중 하나이다. 원래 착한 신이었지만 하늘과 싸우면서 나쁜 신이 되었다. 얼굴 셋에 팔이 여섯인 흉측하고 거대한 신인데, 증오심이 가득해‘싸움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른 신에게 공격당해 아수라들의 시체가 즐비한 데서‘아수라장’이란 말이 나왔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흐트러진 현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인은 일제강점기 때 민초들의 삶을 수라에 빗대 노래했겠다. 찬바람 속, 거미가족의 상봉을 통해‘함께 하기’의 애상을 보여준다. 등 따뜻해도 서럽고 외로우니 수라이고, 어깨 기댈 수 있어도 발 시리고 손 차니 그 또한 수라로다. 하지만 바람 치운 밤거리로 내몰릴지라도, 이해받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두렵지 않다. 서러운 1930년대를 건너온 우리 민초가 그랬듯이, 시인의 눈물겨운 겨울이 그랬듯이, 상처 입은 누군가의 이 겨울도 함께 한다면 아수라쯤이야 거뜬히 걷어낼 수 있지 않겠나.

 

 

 

수라(修羅)

                                                                  백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

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

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49쪽, 시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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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6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자와 겐지 시인의 시집은 제목부터가 <봄과 수라>지요. 이분의 삶을 다룬 만화영화 <겐지의 봄>을 보면 엔딩에 흘러나오는 말이 인상적이에요. (아마 이 시인의 싯구이겠죠.)

분노의 씁쓸함 그리고 푸르름
사월의 대기층의 빛, 저 아래를
침 뱉고 이를 갈며 오가는
나는 한 마리의 수라인 것이다

다크아이즈 2012-12-06 22:56   좋아요 0 | URL
섬님, 겐지의 봄, 도서관에 가서 디브이디 검색해봐야겠어요.
<분노의 씁쓸함, 침 뱉고 이를 갈며 오가는 나는 한 마리의 수라>
오늘 제 심정이 그래요. 분노의 수라에서 정화된 천사로 거듭 나고 싶사와요.
누구나 한 마리 수라인 순간이 있겠지요. 감사해요, 섬님...

프레이야 2012-12-06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찜해두고 나중에 다시 촘촘히 읽을래요.
이렇게나 좋은 페이퍼와 시를요.^^
내 몸과 마음에도 수라가 덤비지 않기를... 다독이며...
소중한 하루, 행복한 하루 보내요^^

다크아이즈 2012-12-06 22:59   좋아요 0 | URL
수라 역시 스스로가 만든 귀신이니,
수라장에 빠지더라도 어서 빨리 빠져 나오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오늘 저 무슨 일로 분노했지만 그 분노 역시 저를 향한 거였다는 걸 성찰하는 하루예요.
언제나 고마운 프레님...

페크pek0501 2012-12-06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해서 아수라장이란 말이 생겼군요.
저는 길에서 도둑고양이를 보면 가엾더라고요.
친정의 지하실에서 새끼를 낳은 고양이가 있었는데,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그 다음날에 새끼들을 데리고 이사했대요. 해칠까 봐 그랬나 봐요.
엄마와 나는, 이 추운 날에 새끼들을 데리고 어딜 갔나, 하고 걱정했지요.
백석 시인의 시를 오랜만에 읽으니 좋네요. ^^

다크아이즈 2012-12-06 23:04   좋아요 0 | URL
페크님, 그래요, 도둑고양이가 있지요.우리 아파트 쓰레기장 옆 자동차 밑에 숨어 있는 녀석들... 어린 새끼가 있음 한 번 키워볼까 싶은데 새끼는 뵈지 않고 살찐 녀석들만 어슬렁어슬렁. 엄두가 안 났어요.

백석은 천재 시인인 건 맞나봐요. 시대어 해석이 필요해서 귀찮아서 꼼꼼히 안 보게 되는데 이 시는 쉽고 짠하네요. 모 도서관 소식지 앞장에 백석 해설 지문을 써야 해서 살피게 됐다는..

라로 2012-12-0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중에 읽을래요. 지금은 읽어도 잘 읽지 못할테고 댓글을 달고 싶어도 잘 달기 어려울것 같아서요,,
뭐 나중에 다시 읽어서도 좋은, 멋진 댓글을 달 거란 보장은 없지만요,,ㅋㅋㅋ

여긴 눈이 내려요,,거긴요??

다크아이즈 2012-12-08 17:17   좋아요 0 | URL
나비님 어제 여기도 눈이 내렸어요. 기숙사에 있는 아들 데리러 가는데
평소 두 배 시간이 걸렸어요. 남푠이 운전했는데 엉금엉금 기어가는데도 미끄러져서 한 번 가드레일을 스치더군요. ㅋ
그래도 첫눈이다, 하고 즐감했네요.
님의 <레 미제라블>은 언제 끝날까요? 몇 권짜린지도 궁금해지는...

뮤지컬(오페란가?)도 온다는데 볼 만 하겠지요?

라로 2012-12-15 14:17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제목만 보고 '아수라백작'이 생각났더래요,ㅎㅎㅎㅎ
어릴때 봤던 만화인물인데 혹시 팜님도 아시나요????
암튼 저는 이 글을 [레 미제라블]을 읽고 읽었는데 필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팜님. 그 얘긴 언제 우리가 인연이 되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해 드려도 될까요??^^

다크아이즈 2012-12-16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아수라와 레 미제라블, 어떤 필연일지 저도 기대가 되는데요.
나비님과의 인연이 그렇게 필연이 되는 건가요. ㅋ
봄바람 부는 날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보아요.
기다릴게요. ㅋ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지 학부모 모임도 잦다. 엄마들끼리 만나 밥 먹으면서 공감하는 시간도 무척 소중하기에 여건이 허락하는 한 참석하는 편이다. 아이가 어렸을 땐 적극성, 정보력, 경제력을 고루 갖춘 엄마들이 쏟아내는 각종 말씀들에 솔깃했다. 그들을 따라할 수도 없으면서 그때는 시샘서린 호기심으로 열심히 귀 기울였다. 아이들이 다 큰 지금은 그런 교육형 열혈 엄마들의 말씀은 숙지고, 생활의 지혜를 나눠주거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엄마들 얘기에 주목하게 된다.

 

 

  오늘 모임에서 한 어머니가 우스갯소리를 한다. 초등학교 이학년 바른생활 문제를 풀어보란다. 이사 온 이웃집에서 떡을 돌렸다. 한 집에서 엄마 대신 아이가 떡을 받았다. 뭐라고 답례를 할까. 아이는 ‘뭐, 이런 걸 다…….’라고 답을 적었다나. 선생님은 당연히 틀린 답으로 처리했다. 정답은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란다. 단답형 똑 떨어지는 답에 익숙한 우리의 교육 현실을 풍자한 것이겠지만 곱씹을수록 씁쓸하기만 하다.

 

 

  수학 문제를 풀어서 틀린 답이 나오면 그건 틀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에서, 원하는 답이 아니라고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답일 뿐 틀린 답은 아니질 않나.

 

 

  핀란드식 교육법이 새삼 떠오른다. 답의 옳고 그름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교육면에서 세계적으로 내로라하게 된 것은 열린 학습 방식 덕택이다. 학생들 저마다 가진 창의력과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준다. 시험에서 정확한 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적으면 된다. 정답을 얻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답은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깨치게 하는 게 우선이다.

 

 

  자발성이 수용되고, 자율성이 보장될 때 그 집단은 진일보할 수 있다. 핀란드의 열린 교육정책을 보면 그들의 밝은 미래가 보인다. 이것이 정답이다 정해 놓고 그 답을 찾으라고 다그치는 대신, 정답은 ‘네 안에 있다’고 선언할 수 있는 날이 우리에게도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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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05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작은아이 학교에서 부산고등학교 교장샘의 강의를 들었는데
역시 감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더군요. 감동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자!! 그런..
공감능력과도 통하는 것이겠죠.^^


다크아이즈 2012-12-06 23:06   좋아요 0 | URL
맞아요, 프레님. 지식교육보다 감성교육이 훨씬 중요해요. 사물을 봐도 느낌이 없고, 대상을 봐도 사유 하나 건져내지 못하는 교육이라면 얼마나 기계적이고 삭막할까요. 공감하고 소통하는 교육보다 나은 건 없는 것 맞지요?

2012-12-05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5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5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6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2-12-0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첫 추천은 제가 했다는 것...ㅋ
공감 가는 글이라서요.

다크아이즈 2012-12-06 23:07   좋아요 0 | URL
귀여븐 페크님, 저도 페크님 글은 무조건 추천부터 하고 본다는...ㅋ
 

 

 

  사람의 진심은 말보다 표정으로 나타난다. 꾸준히 몸과 맘을 닦는다면 좋은 표정을 절로 짓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런가. 내 의지대로 말은 부릴 수 있지만 표정은 쉽게 그리할 수 없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지만 표정으로는 천만 번 살인도 저지를 수 있는 게 사람이다.

 

 

  대선을 앞둔 요즘 정치권,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야권 대선 경쟁자였던 안철수 후보의 사퇴를 두고 양보냐 포기냐의 의견도 분분하다. 아름다운 양보인지, 어쩔 수 없는 포기인지를 두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해석이 엇갈린다. 정치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겐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다. 하지만 앞날까지 내다봐야 하는 정치권 특성으로 볼 때 그 의미는 제법 중요한가 보다.

 

 

 

 

 

 

 

 

 

 

 

 

 

 

 

 

 

 

 

 

 

  아름다운 양보인지, 분노 서린 원망인지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텔레비전에 나와 말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제대로 알려면 목소리가 아니라 표정을 보면 된다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정치인을 예로 들자. 일단 볼륨을 완전히 낮춘다. 그리고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표정으로만 읽는다. 그러면 그 사람이 기쁜지, 화가 나는지, 슬픔에 싸여 있는지, 분노하는지, 양보하는지 다 보인다.

 

 

   정말 그런가 싶어 호기심에 실험을 해봤다. 영화나 인터뷰 화면 아무거나 볼륨을 낮춰보았다. 표정만으로도 화면에 비친 사람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 거의 알 수 있겠다. 확실히 사람은 말보다 표정으로 더 많은 진실을 얘기한다.

 

 

  이런 학습 탓인지 누군가 포커페이스를 하면 움찔하고 긴장부터 한다. 자신을 억제하고 침착하게 사물을 대면하는 사람들일수록 정치권에 몸담으면 유리할 것 같다. 하루에도 열두 번 변덕을 부려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나 같은 다혈질은 감정을 다스리는 법부터 배울 일이다.

 

 

  그나저나 볼륨을 낮추지 않아도 나 같은 하수의 눈에도 안철수의 표정이 읽히니 어쩔 것인가. 그가 완벽한 정치인으로 거듭 나려면 표정 관리부터 연습해야 할 것 같다. 정치권은 절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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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3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3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2-12-03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볼륨을 낮추고 표정을 봐야겠군요~ TV 키러 갑니다.ㅋㅋ

다크아이즈 2012-12-03 22:5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진짜로 그렇게 함 해보시어요. 재밌어요. 표정이 말 이상을 한다는 사실은 심리학자들이 일찍이 밝혀낸 바이기는 해요.

님, 여전히 바쁘게, 잘 계시지요?

페크pek0501 2012-12-04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런 피즈, 바바라 피즈 지음<당신은 이미 읽혔다>라는 신간을 신문에서 봤는데
이 책도 표정으로 알 수 있는 속마음에 대한 것이에요.
아, 표정 관리를 잘 해야겠군요. ^^
이것도 삶의 기술일까요?

다크아이즈 2012-12-05 03:16   좋아요 0 | URL
페크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미 읽혔다> 이런 류의 책 진짜 좋아해요.
너무 좋아해도 안 되는데, 맨워칭(피플워칭) 이후로 이런 행동 패턴 연구서 같은 게 흥미있더군요. 일단 접수합니다.

표정 관리할 수 있음 대박이지요.
하지만 저는 오늘도, 여전히 실패 중인 걸요. 호홋~

오늘 넘 추웠는데 무사히 지내셨는지 궁금하옵니다.^^*
 

 

 

썸네일

 

썸네일 썸네일 **이미지는 네이버에서

 

 

  식당용 화학조미료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착한 식당을 찾아나서는 종방 프로그램에서 그 실체를 알고 적잖이 놀랐다. 이 방송이 전파를 타는 날이면 식욕이 반감된다. 모든 식당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믿고 먹을 만한 식당 만나기 정말 어렵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밥하기 싫어하는 얼치기 주부지만 방송 후 며칠간은 웬만하면 바깥밥을 자제하게 될 것 같다.

 

 

  오늘은 중국집에 관한 진실을 취재해서 보여주었다. 몰래 카메라가 비추는 주방은 경악 그 자체였다. 4인용 짬뽕을 만드는데 얼추 여섯 국자의 화학조미료를 쏟아 붓는다. 업소용 조미료가 시중에 나오는 것보다 싸기 때문에 그것을 쓰는데, 감칠맛을 내는 핵산이 덜 들어 있으니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단다. 요리사의 익숙한 국자가 하얀 조미료 통을 왔다 갔다 할 때 심장이 벌렁거렸다. 안 쓸 수 없다면 덜 쓰는 방법도 있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는 도저히 짬뽕 국물을 떠먹을 수 없겠다.

 

 

  짬뽕의 얼큰한 국물도, 짜장면의 감칠맛 나는 춘장도 그 맛의 비밀 병기는 화학조미료였다. 한 프랜차이즈 중국집에서는 신선도와 제 맛을 위해 손님이 오면 요리를 시작한다고 홍보를 했다. 주방에서 비춘 카메라의 진실은 그게 아니다. 본사에서 내려온 가루 소스를 물에 개서 끓이기만 하면 완벽한 짬뽕 국물로 변신한다. MSG가 듬뿍 첨가된 인공 육수로 거짓 신선도와 맛을 선전한 셈이다.

 

 

  요즘 웬만한 가정에서는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건멸치, 다시마, 표고 등 천연 식자재로 육수를 내면 인공 조미료가 내는 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국물을 얻을 수 있다. 가난한 시절의 입맛을 대신하던 인공조미료를 쓸 이유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식당에서 화학조미료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남는 게 없어서’일 것이다. 식당의 존재 이유가 이윤 추구이니 딜레마이긴 하다. 정해진 가격 안에선 웬만한 고객을 확보하지 않고선 천연 육수를 써서 이윤을 낼 수 없는 구조인 모양이다. 우리 입맛에 익숙한 짜장면을 인공 조미료 없이 만들 수 없다면 덜 쓰는 방법이라도 택해줬으면 좋으련만.

 

 

  천연 식자재만 써도 충분히 중화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사례도 보여준다. 착한 식당으로 선정된 한 중국집 사장의 인터뷰에 눈시울이 뜨겁다. 어떤 식당에서든 오래 일할 수 없었단다. 인공 조미료를 덜 쓰려는 자신을 좋아할 리 없는 업주와의 마찰 때문이었다. 이제 자신만의 가게를 냈다. 천연 식자재로도 짬뽕과 짜장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장의 진심이 시청자에게도 통했나 보다. 소식통에 의하면 방송이 끝난 뒤 그 식당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단다. (모든 첫방송 뒤에는 의례 그렇기는 하다.)

 

 

  상호 만큼이나 양심마저 천연으로 보이는 그 식당, 반짝 경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몰렸으면 좋겠다. 단골이 적어 다소 비쌀 수밖에 없었던 짬뽕 값도 조금 내릴 수 있으면 더 좋겠다. 그리하여 착한 식당의 본보기로 안착할 수 있었으면.

 

 

  그건 그렇고 양심적으로 식당을 하기엔 사회적 여건이 어려운 것인지, 식당업을 둘러싼 여러 환경이 그렇게 부추기는 것인지 여전히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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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03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놀래라ㅜㅜ 짜장 짬뽕이요? ㅜㅜ 아지노모도 갖고와라, 해선 다된 음식에 그걸 더 넣고 드시는 울아빠 생각나요. 요샌 좀 안 그러시는지ᆢ

다크아이즈 2012-12-03 22:26   좋아요 0 | URL
아지노모? 처음 들어보는데요. 혹, 미원, 미풍 뭐 이런 일본 브랜드 명?
옛날 분들 중 화학조미료에 길들여진 분들 계시는데 혹 프레님 아버님도?
그렇담 넘 재밌는 어른이실 것 같아요.
당시로는 감각이 젊다고나 할까요...ㅋ

프레이야 2012-12-04 01:00   좋아요 0 | URL
네 그 아지노모도요ㅎㅎ
아빠는 여든 넘으셨어요. 꽤 건강하세요. 보기에도 그 나이로 전혀 안 보이시구요. 체질이 그러신가 봐요.

순오기 2012-12-0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난 짬뽕을 좋아하는데 화학조미료를 그렇게 많이 넣다니.ㅜㅜ
그래도 다행인 건 1년에 서너번 먹을 정도니까 토닥토닥~ ^^
귀찮아도 집밥을 해 먹읍시다아 ~ 불끈!!

다크아이즈 2012-12-03 22:5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실시간? 저는 어쩌나요? 밥 하기 죽어라고 싫어하는데
한식은 덜 하겠지, 하면서 한식집만 고집하면 될까요? ㅋ

천안 갈 일 있으면 티엔란 한 번 가보려구요. 남매가 운영하는데 인상도 참하드라는...
 

  

 

 

 

 

 

 

 

 

 

 

 

 

 

 

 

 

  친구 잘 둔 덕에 특강할 기회도 많다. 이번 한 달은 온 데 쫓아다니느라  글다운 글 한 줄 못쓰고, 읽어야 할 책은 산더미처럼 밀렸다. 읽고 쓰려 새벽까지 깨어 있느라 크게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만 달고 산다. 이러다가 읽고 써야 할 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잃어버릴까봐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노동의 신성함을 그 누구보다 찬양하는 나 같은 사람은 주어진 일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감사히 여기고 열심히 하는 편이다.

 

 

  시간 없어서 글 못쓴다고 하는 건 백프로 핑계다. 번듯한 직장이 있으면서도 독자에게 만족을 주는 글쟁이들이 제법 있지 않은가. 시간 핑계를 대며 글 제대로 쓸 수 없는 자괴심에 빠져 있는데, 그 맘에 한 가지 더 보태는 일이 생길까 걱정이다. 내 특강 주제는 '소중한 나'이다. 한 마디로 스스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인식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이다. 학업 못지 않게 학생들 정신 건강도 중요하기 때문에 일선 학교에서는 이런 프로그램도 계획했을 것이다. 

 

 

  자아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단계 중 갈등 부분이 있는데, 그 항목 중 하나에 가족과의 갈등도 포함되어 있다. 학생들은 비교적 자신의 심리 상태를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멍석만 잘 깔아주면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내어준 자료지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써낸다. 자신이 가족에게서 들은 상처의 말들을 적나라하게 적어 보는 코너가 있다. 내가 엄마로서 행한 온갖 악행들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해준 뒤 자신들이 겪은 모욕적인 말들을 적어 보라고 하면 수위 높은 말들이 가끔씩 나온다. 흔하진 않지만 솔직함을 넘어 적나라한 가정사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수업 자료는 원한다면 담임선생님께 참고가 되라고 제출한다. 대부분 평범한 가정 일상과 학교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가끔 너무 심하다 싶은 자료지를 작성한 학생들이 있다. 언어폭력을 일삼는 부모가 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부모에 대해 아이들은 불신과 원망의 말로 자신의 심정을 대변한다. 이 경우 담임 선생님은 학부모 상담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학업 성취도와 부모에 대한 인식은 별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성취도가 높다고 방치하다 보면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좀 더 깊은 상담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건, 학생들이 작성한 그 자료가 혹시라도 진실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재미로 쓴 작성지가 오해를 사서 상담의 대상이 된다면 괜히 내 쪽에서 미안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오래 관찰한 담임 선생님이 그것을 판단하지 못할 리 없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소중한 나를 찾겠다고 특강까지 들었는데, 담임 선생님께 부정적인 이미지만 심어주게 됐다면 이 또한 내 책임이 아닌가 하는 소심증이 발동하는 것이다. 작성지 하나가 아이들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겠지만 괜한 걱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래 저래 진정으로 '나의 소중함'을 안다는 건 힘들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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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11-2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팜므님.
아이들을 많이 만나시나봐요... 참 예뻐요, 학생들.
예전에 저는 학생들을 겁을 내곤 했는데 - 마치 어찌 다뤄야할지 모르겠는 도자기처럼 - 이제 조금은 익숙해지니, 이쁜 면들과 아픈 면들이 보여요. 아직 성인이 아니라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이, 두렵게 지내는 아이들을 보면 더욱 속상해집니다. 그래서,

진실이 아닌 자료 한두개 섞여 있더라도
그런 글을 내뱉게 하고 학교에서도 알 수 있게 하시는 일은 정말 좋구나 하고 생각이 들어요.

네, 나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너무 힘들어요, 저만 해도
이렇게 몸살이 나기 전까지 계속 전전긍긍 일을 벌이거든요..... 에긍...
또 뵐게요.

다크아이즈 2012-11-28 01:50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학교에 계시는군요. 님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계신 분들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대부분 이쁜데, 통제 안 되는 아그들은 진짜 대책이 안 서더군요. 몇 십 년 새 학교 환경이 너무 달라져서 신기하게 보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