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겨울이다. 문밖의 밤은 차고, 눈발마저 흩날린다. 산다는 게 얼마간은 고통스럽고, 다소간은 눈물겹다. 무서운 줄 모르고 놀린 누군가의 세 치 혀는 죄 없는 영혼의 문풍지를 온밤 내 떨게 하고, 상처의 심연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몸과 마음엔 아수라들만 겹겹이 쌓인다. 하필이면 이런 날, 백석의「수라」같은 시가 눈에 띌 게 뭔가.

 

 

  차디찬 밤, 아무 생각 없었던 시인은 거미새끼 한 마리를 문밖으로 쓸어내 버린다. (얼마나 다행인가. 밟거나 쳐서 죽인 게 아니니!) 곧이어 큰거미를 같은 장소에서 발견한다. 고만 짠해진 시인은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큰거미를 밖으로 버린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알에서 갓 깬 새끼거미가 그 자리에 또 아물거린다. 끝내 가슴이 메고 서러운 시인은 어린 새끼를 고이 종이에 받아 내어준다. 가족이 있는 찬 문밖으로. 따뜻하고 외로울 바엔, 바람 차더라도 함께 하는 게 낫겠네. 거긴들 수라의 세계를 벗어날까만.

 

 

  수라(修羅)는 아수라의 준말로 인도신화에 나오는 여덟 신(神)중 하나이다. 원래 착한 신이었지만 하늘과 싸우면서 나쁜 신이 되었다. 얼굴 셋에 팔이 여섯인 흉측하고 거대한 신인데, 증오심이 가득해‘싸움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른 신에게 공격당해 아수라들의 시체가 즐비한 데서‘아수라장’이란 말이 나왔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흐트러진 현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인은 일제강점기 때 민초들의 삶을 수라에 빗대 노래했겠다. 찬바람 속, 거미가족의 상봉을 통해‘함께 하기’의 애상을 보여준다. 등 따뜻해도 서럽고 외로우니 수라이고, 어깨 기댈 수 있어도 발 시리고 손 차니 그 또한 수라로다. 하지만 바람 치운 밤거리로 내몰릴지라도, 이해받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두렵지 않다. 서러운 1930년대를 건너온 우리 민초가 그랬듯이, 시인의 눈물겨운 겨울이 그랬듯이, 상처 입은 누군가의 이 겨울도 함께 한다면 아수라쯤이야 거뜬히 걷어낼 수 있지 않겠나.

 

 

 

수라(修羅)

                                                                  백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

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

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49쪽, 시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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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6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자와 겐지 시인의 시집은 제목부터가 <봄과 수라>지요. 이분의 삶을 다룬 만화영화 <겐지의 봄>을 보면 엔딩에 흘러나오는 말이 인상적이에요. (아마 이 시인의 싯구이겠죠.)

분노의 씁쓸함 그리고 푸르름
사월의 대기층의 빛, 저 아래를
침 뱉고 이를 갈며 오가는
나는 한 마리의 수라인 것이다

다크아이즈 2012-12-06 22:56   좋아요 0 | URL
섬님, 겐지의 봄, 도서관에 가서 디브이디 검색해봐야겠어요.
<분노의 씁쓸함, 침 뱉고 이를 갈며 오가는 나는 한 마리의 수라>
오늘 제 심정이 그래요. 분노의 수라에서 정화된 천사로 거듭 나고 싶사와요.
누구나 한 마리 수라인 순간이 있겠지요. 감사해요, 섬님...

프레이야 2012-12-06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찜해두고 나중에 다시 촘촘히 읽을래요.
이렇게나 좋은 페이퍼와 시를요.^^
내 몸과 마음에도 수라가 덤비지 않기를... 다독이며...
소중한 하루, 행복한 하루 보내요^^

다크아이즈 2012-12-06 22:59   좋아요 0 | URL
수라 역시 스스로가 만든 귀신이니,
수라장에 빠지더라도 어서 빨리 빠져 나오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오늘 저 무슨 일로 분노했지만 그 분노 역시 저를 향한 거였다는 걸 성찰하는 하루예요.
언제나 고마운 프레님...

페크pek0501 2012-12-06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해서 아수라장이란 말이 생겼군요.
저는 길에서 도둑고양이를 보면 가엾더라고요.
친정의 지하실에서 새끼를 낳은 고양이가 있었는데,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그 다음날에 새끼들을 데리고 이사했대요. 해칠까 봐 그랬나 봐요.
엄마와 나는, 이 추운 날에 새끼들을 데리고 어딜 갔나, 하고 걱정했지요.
백석 시인의 시를 오랜만에 읽으니 좋네요. ^^

다크아이즈 2012-12-06 23:04   좋아요 0 | URL
페크님, 그래요, 도둑고양이가 있지요.우리 아파트 쓰레기장 옆 자동차 밑에 숨어 있는 녀석들... 어린 새끼가 있음 한 번 키워볼까 싶은데 새끼는 뵈지 않고 살찐 녀석들만 어슬렁어슬렁. 엄두가 안 났어요.

백석은 천재 시인인 건 맞나봐요. 시대어 해석이 필요해서 귀찮아서 꼼꼼히 안 보게 되는데 이 시는 쉽고 짠하네요. 모 도서관 소식지 앞장에 백석 해설 지문을 써야 해서 살피게 됐다는..

라로 2012-12-07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중에 읽을래요. 지금은 읽어도 잘 읽지 못할테고 댓글을 달고 싶어도 잘 달기 어려울것 같아서요,,
뭐 나중에 다시 읽어서도 좋은, 멋진 댓글을 달 거란 보장은 없지만요,,ㅋㅋㅋ

여긴 눈이 내려요,,거긴요??

다크아이즈 2012-12-08 17:17   좋아요 0 | URL
나비님 어제 여기도 눈이 내렸어요. 기숙사에 있는 아들 데리러 가는데
평소 두 배 시간이 걸렸어요. 남푠이 운전했는데 엉금엉금 기어가는데도 미끄러져서 한 번 가드레일을 스치더군요. ㅋ
그래도 첫눈이다, 하고 즐감했네요.
님의 <레 미제라블>은 언제 끝날까요? 몇 권짜린지도 궁금해지는...

뮤지컬(오페란가?)도 온다는데 볼 만 하겠지요?

라로 2012-12-15 14:17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제목만 보고 '아수라백작'이 생각났더래요,ㅎㅎㅎㅎ
어릴때 봤던 만화인물인데 혹시 팜님도 아시나요????
암튼 저는 이 글을 [레 미제라블]을 읽고 읽었는데 필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팜님. 그 얘긴 언제 우리가 인연이 되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해 드려도 될까요??^^

다크아이즈 2012-12-16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아수라와 레 미제라블, 어떤 필연일지 저도 기대가 되는데요.
나비님과의 인연이 그렇게 필연이 되는 건가요. ㅋ
봄바람 부는 날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 보아요.
기다릴게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