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널널해진 마당에 마님과 함께 간만에 동네마실을 나섰다.
비디오와 도서대여점을 들려 이것저것 읽을 것과 볼 영화들을 주섬주섬
챙기는 와중에 술냄새를 폴폴 풍기시는 장년의 아저씨 한 분이 가게로
들이 닥치신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직원은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고등학생정도 나이의
어린애들이였고 가게에는 손님들도 적잖아 있었다. 꽤 날씨가 추웠음에도
이 아저씨는 가게의 출입문을 활짝 열고 카운터쪽을 심히 불쾌한 표정으로
노려보기 시작한다. 시선을 감지한 카운터 어린직원들은 잔뜩 주눅이 든
표정으로 지들끼리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잠시 후 한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술냄새를 풍기던 장년의 그 아저씨는 등을
획 돌려 문도 안닫고 가게 밖으로 나가신다. 그러나 가게를 완전히 떠나진
않았다 가게 출입문 밖에서 여전히 열어진 문을 등지고 허리에 손인 호반장
포즈로 역시나 장시간을 서성이고 있었다. 꽤나 추운 날씨였기에 마침 문쪽
에 있었던 나는 문을 닫아버렸고 그와 동시에 몸을 180도 돌린 술취한 장년
아저씨는 거세게 문을 열고 다시 가게안으로 들어와버렸다.
다짜고짜 카운터에 앉은 직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친다.
"한산도 한 갑 줘.!!"
책과 비디오 대여점을 동시에 운영하는 이 가게는 담배도 팔고 있었다.
허나 어린 직원들은 처음 들어보는 담배이름에 당황하며 조용하고 공손하게
"그런 담배는 없는데요"라며 대꾸를 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다음 상황...
손에 5000원짜리를 쥔 채로 카운터의 어린 직원들을 째려보던 이 술 취한
아저씨는 다짜고짜 상욕과 동시에...
"늬들은 장사꾼의 가치가 없어!! 181818"
그러며 새차게 출입문을 열어재끼며 여전히 고성으로 상욕을 해가며 퇴장을
해버렸다. 황당해하는 직원 둘은 금새 귓볼이 새빨게지며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리고 지들끼리 "한산도가..뭐지.??"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카운터에 빌려 볼 DVD타이틀을 올려놓으며 조용하게 오래전에 단종된 국산담배
라고 말해줬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때 봤던 담배. 한 갑에 담배가 500원
이였던 시절에 팔던 담배.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담배를 달라고 요구하며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엄청난 모멸과 실례를 저지르신
그 아저씨의 뒷담화격인 "대체 술을 어디로 X먹은 거지.."라는 혼자말을 중얼
거렸었다.
아주 가끔은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주장하는 "동방예의지국" 혹은 "손위 사람에
대한 예절과 예의"는 분명 지켜야 할 미덕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는 양반들에게까지 공평하게 대해야 할 필요성만큼은 동의하고 싶지
않아진다.
2.
꽤 오래전 아는 선배 하나는 대학생활 방학때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 아르바
이트를 끝내고 귀가길에 버스를 탔다고 한다. 비교적 손님이 적은 한적한
버스였기에 자리를 찾아 앉은 후 자연스럽게 몰려오는 피로감 덕분에
꾸벅꾸벅 졸았다고 한다.
약간은 소란스런 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버스는 손님들로 가득 차버렸고
자신의 자리앞에 서있는 나이가 육순을 갓 넘으셨을 비교적 정정한 할아버지
와 눈이 딱 마주쳤다고 한다.
선배의 표현의 빌리자면 그 할아버지의 눈속에서 일렁거리는 불꽃을 봤다고
한다. 선배는 분명 피곤하고 졸려서 꾸벅거린 거였는데 그 할아버지의 시선에
서 봤을 땐 자리 양보를 회피하기 위한 고도의 페인트모션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을 그렇고 그런 어정쩡한 대치상황이였다고 한다.
순간 짱구를 굴리기 시작한 선배. 자리를 양보할 것인가 아님 그냥 모른 척
할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양보하기로 맘을 정하는 순간 할아버지의
입에선 헛기침과 동시에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한다.
"요즘 젊은 것들은 말이지..싸가지가..없어..."
그것도 선배를 빤히 쳐다보면서...
순간 오기가 발동했단다. 끝까지 자기 자리에서 절대 양보를 안해주고 싶은
약간은 악마적인 마음이 자리를 양보하려했던 천사의 마음을 순식간에 역전
시켜버린 것.
이 할아버지도 대단한게 이젠 얼굴까지 붉게 물들이며 젊은 것들이 레파토리를
여러가지로 파생하며 꽤나 큰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더더군다
나 손님들이 제법 빠져 나가 빈자리가 드문드문 나왔음에도 절대 그 자리에 착
석을 하지 않으며 선배의 좌석 앞에 양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말이
다.
선배는 내릴 때가 되었을 때 상황을 완벽하게 역전하였다고 한다.
버스가 정차한 후 출입문이 열렸을 때 어정쩡하게 일어나면서 일부러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입으로는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로)기사 아저씨 잠깐만요 저 내려요"
라며 힘겹게 버스에서 내린 후 자신의 완전범죄를 마무리하기 위해 정거장에서
100여미터를 왼쪽다리를 질질 끌었다고 한다. (이거 완전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 같군)
내리면서 살짝 돌아 본 버스 안의 풍경은 그 할아버지는 아직 선배의 체온이
뜨끈하게 남은 그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모양새였고
버스 안의 남은 손님들은 전부 그 할아버지를 꽤나 비난하는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장난기 많고 사람 약올리기 좋아하는 선배가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닌데.....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나 역시 결코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은 어르신들을 버스나
지하철에서 마주치곤 한다. 이런 상황에 부딪치면 그때 그 선배의 행동이 자연
스럽게 이해가 되며 모방하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들게 된다.
3.
한 손엔 성조기, 한 손엔 태극기를 들고 특정 정치인의 사무실 앞에 모여앉아
빨갱이 타도를 외치는 초로의 어른신들을 보고 있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타임머신
을 타고 40여년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과 함께 한숨이 나온다.
전쟁을 겪으셨을 그 분들의 시대를 무시하고 인정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세상이
급박스럽게 변하는 현실에서 아직도 그때 그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시는 그 모습
에 연민을 느끼게 된다.
정작 모뙨 놈들은 그런 걸 이용하는 작자들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