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일보에 기고된 글 - 누구나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생가하게 마련이죠.
'旣婚'을 강요하지 말라 / 서리니
“그러면 선배가 이혼 한 번 해봐요. 혼자 사는 것도 괜찮아요. 일단 해보고 후회하라니까요.”
내 말에 기세 당당하던 선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아가씨가 못하는 말이 없네. 이혼을 하라고? 이래서 나이 먹기 전에 시집을 가야된다니까. 꼬들꼬들 말꼬리 잡는 거 보면….”
선배의 느긋함이 황당과 노여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선배는 반쯤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넣고 입을 연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그게 말이 돼? 멀쩡한 남의 가정을 깨라니?”
선배의 흥분에 나는 더 기가 막힌다. 그럼 자기가 나한테 한 말은 뭔가.
“그럼 혼자 사는 길을 택해서 잘사는 사람한테, 그 길이 틀린 길이니 후회하더라도 결혼하라는 말은 괜찮고요? 내 삶도 멀쩡해요. 그런데 깨라면서요? 기혼은 미혼에게 자신들의 삶을 강요해도 되고 미혼은 안 된다는 거, 너무 가난한 발상 아니예요?”
머쓱해진 선배는 철없는 동생을 대하듯 다시 푸근한 ‘곰돌이’ 탈을 써버린다. 드문 일도 아니지만, 그래서 웃음 한 번으로 넘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직도 어쩌다 한번씩은 한풀 접어둔 성질이 파다닥 고개를 든다.
서로가 절친하다고 믿는, 스스로는 나를 아주 아낀다고 믿는 선배가 늦은 시각에 술 한잔을 하자고 청해왔다. 새삼스럽지도 않았고 마침 심심하던 차에 아무 생각없이 들어선 포장마차에서 나는 그가 찍어준 남자 하나를 만났고 금세 분위기를 파악했다. 굳이 내숭을 떨 기력도 없었고 피차 성격도 모르지 않는 것 같길래 나는 눈 인사 대신 악수를 청했고 남자는 부스스한 머리에 운동복 차림의 여자가 내미는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오가던 몇 마디가 기어이 말싸움이 되고 말았다. 평소라면 이 정도의 일에는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는데. 그렇게 순간 발끈했던 건, 나 사는 게 그렇게 불안하고 한심해 보이나 하는, 자격지심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혼자 사는 일에 익숙하다. 아니,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가끔씩 이런 궂은 날씨에 몸이 젖기도 하지만 뭐 어쩌랴. 어느 길을 가던 그 정도의 수고로움이야 없겠는가. 모두 그렇지 않은가. 기혼이든, 미혼이든. 이제 와서야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들은 더 이상 내 생활에 토를 달지 않는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혼자 살기에 적합한 인간형임을 인정하는 눈치다.
콩나물 한 봉지를 살 때도 콩의 원산지를 확인하고 우유나 빵을 살 때도 성분이나 유효기간을 보고 원하는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나는 살고 있다. 그러니 결혼 역시 선택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나는 결혼이 선택의 문제일 수 있는 세대의 앞줄에 설 수 있었음을 감사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특혜임도 인정한다.
나는 다만 지금 결혼이라는 관념문화와 제도문화가 닦아놓은 ‘큰 길’ 말고 또다른 작은 길에 발을 얹었을 뿐이다. 세금 한 번 미룬 적 없고, 정부를 뒤엎겠다는 정치집단도 아니고, 세상을 혹하게 하려는 불온한 세력도 아닌 바에야 굳이 박해당할 이유가 없잖은가.
그런데도 대부분의 기혼의 무리, 아직도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인 그들은, 아직은 소수정예에 불과한 우리들에게 강요에 가까운 회유로 유감을 표시하곤 한다. 나는 가끔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이미’ 했고 나는 ‘아직’ 안한 상태가 아니라 ‘이미 선택이 완결된 상태’임을 인정해줄 수 없는지를.
사실 나도 당신들에게 유감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 공식적인 미소 속에 감춰두거나 술 한잔으로 피곤함을 풀 때, 이를 갈며 안주 삼을 뿐이다. 우리, 서로간에 다소의 유감이 있더라도 그저 그렇게 삭이며 살아보는 게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