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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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도록 읽었다.  워낙 쉽게 읽혀질 거라고 짐작하지도 못했지만 중간중간 다른 책도 읽어가며 쉬엄쉬엄 읽었다. 


사실 앞부분에서 그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떻게 노동자 생활을 했으며 또 사회주의 사상에 발을 담게 되었는가, 해방 후의 행적과 전쟁 시기 북쪽에서 공부한 이야기, 그리고 남파되어 잡히기까지의 행적은... 많이 지루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정신 번쩍 나게 만들었으니, 이번엔 책을 깨끗하게 보려고 했는데 색지를 엄청 붙여가며 읽어야 했다. 지금까진 그저 비전향 장기수 한 명의 이야기를 읽어왔다고 친다면, 이제부터는 역사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스러지지 않았던 한 혁명가의 이야기를 읽게 된 셈이니까.

추천사에서 윤구병 교수님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대한민국 평균 국민이라면 아마도 불편할 것이라고 했다.  당신도 많이 불편했노라고.  읽기 전부터 불편할 것을 예상했지만, 역시나 책을 읽어가면서 혼란이 밀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왜?  대한민국 평균 교육을 받고 자랐고, 딱 그만큼의 사고관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시대가 바뀌어 북한 사람은 모두 머리에 뿔난 도깨비다!라는 말도 안 되는 비방은 먹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 사람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야!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그들의 실상이, 우리 역사의 감춰진 이면이 제대로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에는 어른들 말씀이 다 옳은 줄 알았고, 교과서에 적혀 있는 게 진리라고 믿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받게 되는 충격과 상처는 내가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고 믿었음에도,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여전히 혼란스럽고 아프고 서러웠다.

허영철은 무려 36년 간이나 감옥에서 신념을 지키며 살았다.  정말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긴 시간이었다.  아니, 거짓으로라도 전향한 척하고 나오면 안 되나?  남겨진 가족은 어떡하고?  그렇게 시간을 죽인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라는 질문이 모두 내 것이었다.  그런데, 책장을 넘겨가면서부터는 그런 질문들이 부끄러워졌다.  그건 일생을 한 목표를 바라보며 곁눈질하지 않고 달려온 혁명가에 대한 모독이었으며 아픈 역사를 짊어지고 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책임 유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화국이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대체 그 공화국이 무엇이길래... 우리에게는 국민들 굶겨 죽이는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정권이기만 했는데, 그 공화국이 대체 어떤 의미였기에 허영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수십 년의 시간을 바치면서까지 신념을 꺾지 않았을까.  단지 그들이 미쳐서, 혹은 꼴통이어서 그랬다고 한다면 차라리 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마음 깊숙이 인정하게 되는 순간부터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린 모두 단체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실을 모르고 사는 것은 우리가 아닐까?  정말 누구의 표현처럼 우린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식민지로 보이지 않게 이동한 것은 아닐까... 이런 망상 아닌 망상들이 머리 속을 헤엄치고 다니는 것이다.

대학에서 교양 수업으로 한국 현대사를 들었었다.  교수님께선 한국전쟁에 대한 수업 중에 한 전쟁을 두고 어떻게 부르는가 명칭이 매우 다르다고 여러 예를 들어주셨다.  그때 북한이 부르는 이름 중에 “이긴 전쟁”이란 표현이 있었다.  사실, 난 그때 웃었다.  일종의 자기 암시라고 여겼던 탓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왔다.  박헌영에 대한 기술이었는데, 남에서는 박헌영에게 전쟁의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서 북이 그를 희생시킨 것이라 말한다고... 허영철은 반문한다.  6.25 전쟁은 우리가 승리한 전쟁인데 어째서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냐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전쟁을 두고 그 원인과 과정, 결과가 모두 다르게 해석되어지고 있는, 비틀거리는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서 난 아찔함을 느꼈다.  그리고 당시 받았던 수업 내용이 얼마나 심각했었던가를 새삼 깨달으며 어쩐지 송구한 기분도 들었다.

허영철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의 차이를 얘기할 때에도 아찔함을 넘어 난 비틀거릴 지경이었다.  그의 말을 잠시 옮겨 보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자본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다르다는 겁니다.  자본주의는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뤘지만, 그 혁명은 거기에서 멈춘 채 권력을 교체하는 것에서 끝났어요.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삼권분립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봉건 군주들, 승려들, 신생 부르주아지들의 야합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혁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도 의회는 신생 부르주아지들이 차지하고, 행정은 봉건 군주 치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사법은 승려의 몫이 되고 말았잖아요.  그게 소위 삼권분립이라는 것의 요체입니다.

민중은 혁명에 동참했지만, 열매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결국 그런 식의 야합으로 정권 교체를 하니까 혁명이 거기서 멈춰 버리는 것이지요.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도 결국에는 상층부만 교체된 것에 불과하니까요.

사회주의 혁명도 권력을 쟁취한 뒤에 이뤄진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의 사회가 완성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의식을 개조하면서 좀 더 높은 사회로 전진해야 하죠.  더 높은 수준의 사회는 있을망정 , 완성된 사회는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참으로 매끄럽고 적확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더 높은 수준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도 같이 이야기한다.  인간의 의식 개조가 가장 중요하다고.  물질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라며... 우리가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로는 잘 실천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잘 보여주지 못하는 그 명제를 얘기한다.  그의 말대로, 미국은 전후 50년 이상 북조선을 압박하며 탄압하고 갖은 모략을 다 동원했지만 그 체제를, 그 사회를 온전히 꺾어내지 못하고 축출하지 못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미국이 힘이 부족해서?  남한이 중재를 잘해서?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안다.  어쩌면 그 대답을 일부러 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북조선의 인민들의 힘이었다.  북이 아무리 독재 사회라지만 인민들의 저항이 거세다면 저렇게 유지될 수가 없는 것을...

우리도 겪어서 알고 있다.  이승만 때에도 그랬고, 박정희, 전두환 때에도 그랬다.  부당한 독재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학생들도 시민들도 끊임없이 항거했다.  북조선이 유지되는 것은 독재가 너무 강력해서도 아니고, 그곳의 국민들이 모두 온순해서도 아니다.  거기엔 당위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남한 땅보다, 우리가 가엾게 여기는 저 북쪽 땅이, 사실은 더 민주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니 소름이 끼친다. 

그는 4.19와 5.18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을 모두 감옥 안에서 맞았다.  그럼에도 그가 겪은 체험은 소위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는 우리의 정보망을 앞선다.  우리는 심각한 언론 통제와 세뇌 교육을 너무 오랫동안 받아온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서글픔을 넘어서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안타까움대로, 그때 자유를 향한 울부짖음과 투쟁이 좀 더 거세어져서 거국적인 움직임이 되었더라면 통일도 결코 꿈이 아니었을 텐데, 민족의 역량을 얘기할 때 늘 우수한 한국인을 자랑하지만, 그렇지 못한 반대 사례도 많음을 새삼 깨달으며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현장에 있어보지 못한 세대로서 함부로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는 출옥하고서 생계 유지를 위해 아파트 경비병으로 일했다.  모두 합해서 7년 4개월의 근무였는데, 해당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을 만큼 성실하게 일했다.  그는 그 까닭을 공산당원이라면 조직을 떠나 있다고 하더라도 도덕적인 책무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모습이 곧 당을 대신할 수 있으므로.  반 생애를 감옥에서 보내며 고된 삶을 이어온 그의 입에선 그토록 당당한 이유가 나오는데, 만약 같은 경우 우리들은 조국 대한민국의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수나 있는가?  국가의 명예가 개인의 행복을 앞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매 순간 부끄럽지 않기 위해 우린 과연 노력해본 적은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의 아내는 그와 함께 산 시간이 도합해서 모두 6개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시간은 그가 잡혀서 가족이 함께 고통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 시간이었으며, 그가 무기징역을 받은 이후로는 좌익사범의 가족으로 결코 평범함이 용인되지 않은 살얼음판 같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당연히 원망이 없을 수 없는데, 그런 아내도 남편을 가리켜 정치적으로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솔직히 꽤 충격을 받았다.  소위 배웠다고 하는,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보다 오히려 더 객관적인 판단과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래도록 통일을 꿈꿔왔다.  그가 남쪽에 내려와 하고자 했던 것도 통일을 위한 초석 다지기였다. (이런 표현을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 수구 기득권은 통일을 가리켜 ‘당위’라고 못 박아 얘기하지만 ‘당면’한 문제는 아니라고 역시 못박아 얘기한다.  그들의 속내엔 사실 통일 안 하고 싶은 이유가 백만 배쯤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 점차 퍼져가고 있다는 것에 민족의 비극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득, 6.15선언 때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가리켜 치매 노인 운운한 모 여인이 떠오른다....;;;;;;)

그는 늙은 몸을 하고서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한다.  지금이야 미군기지 평택이전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지만, 보다 덜 알려져 있던 시기에 이미 반대 집회 등에 참석했던 사람이 허영철이다. 

2005년도에 그는 북한을 4박 5일 동안 방문하고 돌아왔다.  무사히 다녀오긴 했지만 언뜻 생각해도 그 과정이 쉬웠을 리는 없다.  편집자의 말대로 평생을 통일 운동에 헌신한 사람을 못 가게 하는 것이 합법적인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며 갑갑함에 갈증마저 인다.

그는 가난하나 긍지를 잃지 않고 사는 북조선의 현재를 보며 오히려 희망을 읽고 돌아왔다.  오로지 물질적인 척도만 가지고 그들을 적선의 대상으로나 여기며 혹은 이 쌀 받아가서 군수품으로 쓰는 거 아니야? 라며 의심만 하는 우리의 눈이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인터뷰 내용에서 편집자는 묻는다.  “선생님 소원은 통일이지요?”
허영철은 대답한다.  “그럼 여러분은 아니에요?  우리 모두의 소원이 통일이 아니었나요?”
그 반문에, 나는 엉엉 울고 말았다.  왜 우는 지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냥 왈칵 눈물이 치솟았고, 부끄럽고 또 고맙고, 또 한편으론 희망도 보이는 것 같아 복잡한 심정에 목을 놓아 울었다.

문득, 잊고 있던 기억 하나를 두드린다.  99년도에 시립 교향악단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졸린 시간이었다.  그런데 모든 순서가 다 끝나고 앵콜이 들어왔는데, 앵콜 곡도 끝나고 또 한 차례의 앵콜 요청에 지휘자는 깊이 절을 하고는 특정 곡을 연주하도록 했다.  그 곡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고, 그 순간 장내는 박수 소리 온 데 없이 숙연해지고 말았다.  우리는 누구도 앉아 있지 못하고 기립하여 다 함께 그 노래를 불렀다.  그때도 나는 울컥해서 참 많이 울고 돌아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당연한 거였는데, 당연하다는 듯 잊고 살았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내 일 아니라는 듯 태만을 보이고 말았다. 머리로만 알고 심장은 알지 못했던......

이 책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새겨본다.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어디 허영철 뿐이겠는가.  우리 모두 역사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 도도한 흐름을 피해갈 수도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그 역사의 바른 흐름을 위해 애써야 할 사람이 우리들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사람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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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1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너무 궁금해요!

마노아 2006-08-10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심장이 뜨거워지는 책을 만났어요. 적극 추천이에요~

Lauren 2006-08-11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정적인 감상평 잘 읽었습니다.
꼭 읽어보도록 할께요. 감사합니다!

마노아 2006-08-11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auren님, 안녕하세요. 열정적이라니, 부끄러워요~ 님의 감상도 기다릴게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내이름은김삼순 2006-08-24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뽑히셨군요~축하드려요! 방금 보구선 바로 달려왔어요,,ㅎㅎ
긍데 너무 길어서 지금 다 못 읽겠어요,ㅠ 저녁 먹으로 갈 시간이거든요,
다시 와서 꼭 읽고 가겠습니다,,^^

마노아 2006-08-2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헷, 고맙습니다.^^ 저도 물만두님께서 알려주셔서 알았어용^^;; 알라딘 덕에 호강을 한 거죠^^;;;;

해리포터7 2006-08-25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뽑히셨네요..축하드려요!!

마노아 2006-08-25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헷, 고맙습니다^^ 긁적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