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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운다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시리즈가 여섯 권 있다. 내가 구입한 순서대로 읽었는데, 하필 세번째로 읽은 게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이었다. '하필'이라고 말한 것은 이 책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아직 읽지 못한 세권이 혹시 덜 만족스러울까 하는 기우 때문이다. 작년 12월 23일에 읽었으니 한달 여 만에 리뷰를 쓴다. 한해의 끄트머리에 읽었는데 작년 한 해 동안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좋았다. 역시 애거사 크리스티! 대가의 내공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앞서 읽은 시리즈의 두권도 그랬지만 이 작가의 인간을 향한 깊은 성찰에 크게 놀랐다. 단지 오래 살았다고 해서 갖춰지는 것이 아닌 인간을 향한 오랜 관찰과 애정이 그런 혜안을 낳은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옮긴이가 정리한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오빠가 죽자 로라는 부모의 사랑을 받을 거라는 은밀한 기대에 들뜨지만 갓 태어난 동생에게 또다시 부모의 사랑을 뺏긴다. 로라가 하느님에게 동생을 천국으로 데려가달라고 기도하던 날 밤에 집에 화재가 나고, 로라는 위험에 처한 동생 셜리를 구하면서 죄책감과 강한 사랑을 느낀다. 이후 로라의 삶은 오직 셜리에 대한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채워지고, 이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애거사 크리스티는 사랑을 주고받는 것의 본질을 탐구한다. -312쪽
작품 초반 죽은 큰아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살아남은 아이를 향한 아쉬움(?)이 참으로 사실적으로 다가와 몹시 섬뜩했다. 엄마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오빠의 사랑을 이제는 독차지할 줄 알았는데, 그건 곧 이어 태어난 동생의 몫이라는 걸 알게 된 로라가 동생이 그만 죽었으면 하는 바람은 또 얼마나 현실적으로 다가왔던가. 그랬기에 화재가 나던 날 벼락같이 찾아온 사랑의 감정으로 동생을 살려낸 로라의 헌신은 몹시 소설적이었고 영화적이었는데, 그게 또 이해가 갔다. 그럴 수 있겠다는 리얼리티를 작가는 결코 놓치지 않는다.
내가 구해냈으니 내것이라는 생각을, 어린 로라가 했다. 이웃에 사는 늙은 역사학자 존은 이런 로라가 걱정이 되어 꼭 필요한 조언들을 해주지만 로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훗날 셜리가 로라의 충고를 흘려들은 것처럼 말이다.
부모님마저 사고로 돌아가시고 셜리와 로라, 두 자매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식구가 되었다. 로라는 셜리의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먼 셜리는 언니의 충고나 조언에 도리어 불행함을 느낀다.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은 것도 아니고 약혼 기간을 조금 가지고 결혼을 하라는 것마저도 거부하는 성급한 남자의 구애에 셜리는 넘어갔다. 그 인간은 겉만 번지르하고 책임감은 눈곱만큼도 없으며 가족이든 아내든 남의 피 빨아서 기생할 스타일이라고, 독자인 내가 귀에 대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제 팔자 자기가 꼬는 데 막을 방법이 있겠는가.
독자는 막을 수 없었지만, 언니인 로라는 셜리가 계속해서 불행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아니, 막으려고 하였다. 그것이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이 책의 원제인 '짐'이 된 것이다. '사랑을 배운다'라는 한글 제목도 나쁘지 않다. '짐'이 소재라고 한다면 '사랑을 배운다'는 주제랄까. '짐'이 더 마음에 와닿기는 하지만, 제목으로서는 다소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로라로 시작되었던 이야기는 중간부분에서 온통 셜리와 셜리가 만난 세 명의 남자 이야기로 채우고, 마지막은 다시 로라가 닫는다. 세번째 남자 루엘린이 자신의 가책을, 죄의식을, 그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든 해내려고 애쓰는 로라에게 당신은 보상할 수 없다고 소리쳤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결국엔 그것이 나를 위한 변명임을, 회피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많은 것들. 반성하고, 변명하고, 자책도 해보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사실들이 있다. 그저 인정하고,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 인간은.
"당신은 계속 살아가야 해요, 로라. 과거를 잊지 말고 마음에 담아둬요. 과거를 묻어버리지 말고 그것이 있어야 할 당신 기억 속에 간직해요. 당신은 벌이 아니라 행복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래요, 행복! 이제는 주는 것을 멈추고 받는 법을 배워요. 신은 오묘하게 우리를 다루십니다. 전 그분이 당신에게 행복과 사랑을 선물하려 한다고 확신해요. 겸손하게 받아들여요.” -307쪽
어쩌면 당신은 '벌'을 받을 때 더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그런 당신이 '행복'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이 주시는 벌일 수도 있다. 그 앞에 저항하는 것은 죄를 청하는 겸손한 모습이 아니라 도리어 갚을 수 없는 것을 갚으려 드는 오만함일 수도...
그토록 오랜 시간 어깨를 눌렀던 짐 하나를 덜어내자, 꼭 그만큼의 사랑의 무게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원제 '짐'은 얼마나 오묘한가. 그리고 그걸 '사랑을 배운다'로 의역한 것은 얼마나 절묘한가.
옮긴이는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노작가는 우리가 행복을 당연시하고 불행을 엄청난 시련으로 느끼지만 사실 불행 또한 삶의 한 축일 뿐이며, 타인의 불행을 떠안을 수 없으니 우리는 그저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313쪽
독자 역시 크게 공감한다. 묵묵히 그 길을 걸아가라. 당신의 몫을 감당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