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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울어라 울어라 등 떠미는 소설들이 있다. 공지영 작가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그랬고,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가 그랬다. 대놓고 체루성인 것을 아는데, 알면서도 눈물을 안 흘릴 수 없었고, 그래놓고도 감동까지 받아서 어쩐지 자존심도 좀 상하는? 그런 청개구리 같은 마음을 먹게 하는 소설들이 있다. 이 작품도 그랬다. 무려 조루증을 앓고 있는, 열일곱 나이에 80대 노인의 신체를 갖고 있는 이 소년의 이야기에 어찌 먹먹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원치 않아도 조숙해져버린, 그렇게 아이를, 청년을, 젊음을 강탈 당한 이 아이의 속깊은 마음들에 독자는 마음을 모조리 빼앗겨 버렸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나는 무럭무럭 늙는다.
누군가의 한 시간이 내겐 하루와 같고
다른 이의 한 달이 일년쯤 된다.
이제 나는 아버지보다 늙어버렸다.
아버지는 자기가 여든살이 됐을 때의 얼굴을 내게서 본다.
나는 내가 서른넷이 됐을 때의 얼굴을 아버지에게서 본다.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본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열일곱은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서른넷은 자식을 잃기에 적당한 나이인가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가 묻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나는 큰 소리로 답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묻는다.
더 나은 것이 많은데, 왜 당신이냐고.
나는 수줍어 조그맣게 말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로 태어나, 다시 나를 낳은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요.
아버지가 운다.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 -6쪽
이 책의 프롤로그다. 구구절절 병을 얻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지 않고 이미 저질러진 결과에서 시작한다. 열일곱에 부모가 된 젊디 젊은 부모님의 이야기도 짐작하게 한다. 이 작품, 대박인 걸!
이 책을 언제 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분명 샀는데, 구매 목록에 안 떠서, 그럼 선물 받았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생각나지 않는다. 뭐 아무튼, 내게 이 책이 있었고, 출간 당시 굉장히 평이 좋았던 것도 생각난다.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묵혀 두었다가 읽었겠지만, 영화 개봉은 나를 등 떠밀어 어서 읽어!라고 다그쳤다. 그렇게 펼친 책장은 쉽사리 덮이지 않았다. 굉장히 흡인력이 있었고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불행의 끝을 달리는 소재이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부모님의 이야기에는 웃음기가 많았다. 슬픈 이야기를 펼칠 때조차도.
일단 출산을 결정하고 나자 나머지 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어머니는 그간 마음고생한 것에 복수라도 하듯 마음놓고 산모로서 특권을 누렸다. 어머니는 틈이 날 때마다 온갖 연예인 사진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가야 봐봐, 우성 오빠야. 잘 생겼지? 이건 희선 언니. 어디 보자, 또...... 아버지와 달리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경국지색’이었던 어머니는, 태아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라는 얘기를 그렇게 엉뚱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34쪽
경국지색이 이렇게 팔리는구나! 굉장히 설득력 있는 걸! 기회가 된다면 써먹어 보고 싶은 눈호강이다. 기왕이면 강동원 사진으로~
김애란 작가의 문재를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표현들은 너무 예뻐서 북다트를 정신 없이 꽂다 보니 책등이 까맣게 변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컴컴한 허공을 바라봤다. 창밖에선 서서 잠든 나무들이 짙은 한숨을 토해내고, 마당 앞 키 큰 작물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머리채를 흔들며 산이 꾸는 꿈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36쪽
그러나 그 재능이 너무 넘쳐서, 어떨 때는 캐릭터를 뛰어넘는, 혹은 잘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하기도 한다. 이 대목은 무척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지만, 동시에 너무 소설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 대목이다.
“아빠.”
“엉?”
“지금 슬퍼요?”
“응.”
“나 때문에 그래요?”
“응.”
“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아버지가 멀뚱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뭔가 고민하다 차분하게 답했다.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 알지.”
“그게 뭔데요?”
“미안해하지 않는 거야.”
“왜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아빠?”
“응?”
“전 이미 아이인걸요.”
“그래, 그렇지......” -49쪽
내 기억이 맞다면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이동진이 읽어준 대목이지 싶다. 찾아보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지만.
영화 '잭'에서 로빈 윌리엄스는 노화 속도가 4배였다. 10세가 되었을 때 40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이는 열일곱 나이에 80대, 혹은 그 이상의 늙음을 가져버렸다. 날마다 챙겨먹는 약이 이미 한아름이고, 노화에 따른 장기의 손상을 막을 길이 없다.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눈이었다.
간이 상하고 위가 아픈 건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이 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하느님이 내게 진짜 외로움을 주시려나보다 싶어 숨이 막혔다. 마치 누군가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내게, 수고했으니 이젠 독방으로 가라고 독려하는 것 같았다. -99쪽
정말 저런 기분일 것 같다. 작가는 작품 속 캐릭터와 얼마나 동화가 되어서 내용을 전개해 나가는 것일까. 많은 자료 조사 끝에 탄생하겠지만, 그걸 바탕으로 깔고 심적으로도 충분히 물아일체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이 작품을 쓰는 동안, 아름이와 함께 환호하고, 아름이와 함께 절망하고, 그리고 절박하게 슬퍼하지 않았을까. 이런 작품을 탈고하고 떠나보낼 때는 또 얼마나 쓸쓸할까, 멋대로 그런 상상들이 따라왔다.
아름이의 기구한 사연이 방송을 탔고, 여러 시청자들의 메시지를 받았다. 누군가는 격려를 해줬고, 누군가는 위로를 해줬다. 그런 것들에 초연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충분히 마음 다치고 또 마음 담아두었다는 걸 아름이도 인정해야 했다.
여러 글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해라는 말, 예전에는 나도 참 싫었는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 건네주는 따뜻한 악수가 먹먹했다. 터무니없단 걸 알면서도, 또 번번이 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그리고 왜 그토록 자기가 느낀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는 걸까? 공짜가 없는 이 세상에, 가끔은 교환이 아니라 손해를 바라고, 그러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또 왜 존재하는 걸까. 나는 몇 개의 글을 더 훑어봤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내가 조금은 덜 외로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82쪽
그래서 때로는, 필요악이 될 걸 알면서도 동정이라는 감정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마음의 한 조각이라도 필요하다고......
서하와 메일이 오갈 때, 어쩐지 불안했다. 내가 생각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반전이 불안하게 드러났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신은 또 얼마나 모질 수 있는지 한탄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아름이의 이런 지적이 일견 타당하게 느껴졌다.
“하느님을 원망한 적은 없니?”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럼.”
“사실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뭐를?”
“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불완전한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건 정말 어려운 일 같거든요.”
“.......”
“그래서 아직 기도를 못했어요. 이해하실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런 뒤 나는 겸연쩍은 듯 말을 보탰다.
“하느님은 감기도 안 걸리실 텐데. 그죠?” -170쪽
완전하니까 불완전한 존재도 이해할 것 같지만, 동시에 완전한데 어떻게 불완전함을 이해할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배부른 자가 배고픈 자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좋았던 부분이 참 많았지만 장씨 할아버지와의 이 부분이 유난히 좋았다. 겸허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동의...
“평생 아픈 대신 장수하는 자식과 건강한데 요절하는 자식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면, 할아버지는 무얼 고르시겠어요?”
(...)
“아름아.”
“네?”
“그런 걸 선택할 수 있는 부모는 없어.”
“......”
“넌 입버릇처럼 항상 네가 늙었다고 말하지. 그렇지만 그걸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거, 그게 바로 네 나이야. 질문 자체를 잘못하는 나이. 나는 아무것도 안 고를 거야. 세상에 그럴 수 있는 부모는 없어......” -296쪽
영화 이야기도 조금 해보자. 영화는, 볼만했지만 압도적으로 책 쪽이 훨씬 좋다. 다만 강동원이 나온다는 거~ 영화 말미 계곡에 들어가 있는 강동원을 카메라가 허리 부분부터 천천히 미끄러져 올라가며 비추는 장면이 나온다. 말라서 이렇다 할 복근은 없지만, 아무튼 군살도 없는 배와 가슴팍이 나오고, 이어서 물에 젖은 얼굴이 나오는데! 당연히 여기가 하이라이트인데! 내 옆에 앉은 커플의 남자가, 그 순간 여친의 눈을 확 가려버린 것이다. "보지마!"라고 외치며. 이후는 상상에 맡기겠다. 나같으면 이 오징어가! 하고 주먹이 날아갔을 지도...ㅎㅎㅎ
암튼, 소설을 뛰어넘긴 힘들 거라고 예상했고, 그 예상이 맞았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원작에 없던 장면으로 마음을 끌었던 것은 순전히 김갑수의 힘이었다. 아, 짧고 강렬한 그 연기란! 퇴락한 눈빛 안에도 부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뜨겁고, 또 뜨거웠다.
작품 말미에 나오는 아름이의 소설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완성된, 완벽한 소설이었다. 좋다. 좋다. 참 좋다.
사그라지는 생명으로 써낸, 그랬기에 더 강렬한 생명력으로 빛난, 청춘을 살아내지 못한 아이가 상상하며 그려낸 부모님의 덜 익어서 더 싱그러웠던 사랑 이야기가 진정 눈부셨다.
체루성 작품이면 어떠랴. 기꺼이 울어주겠다. 그게 더 자연스러운 거라면 거부하지 않겠다.
어디선가 까르르 박꽃 같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돌아보니 젊은 레지던트 하나가 간호사들에게 농담을 걸고 있었다. 나는 내 속 단어장에서 ‘추파’라는 낱말을 꺼내 만져보았다. 가을 추, 물결 파. 가을 물결.
‘예쁘구나, 너. 예쁜 단어였구나......’ -195쪽
두근두근 내 인생이 내게 추파를 던졌다. 이 가을에 느끼기에 충분히 좋은 물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