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학교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 이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주인공은 어느날 동료교사의 추천으로 비디오를 한편 빌려보았다. 영화에 대한 감상은 그닥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으니, 조연 중의 주연으로 등장한 한 배우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 오년 전 자신이 수염을 길렀을 때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지난 앨범을 찾아가면서까지 확인해본 일이다. 잠이 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던 이 사나이의 지나치게 조용한 일상에 큰 파문이 인 것이다. 


작품 속에서는 비디오를 돌려보는 시절이어서 영화처럼 간단한 구글링으로 상대 배우가 누구인지 금세 알아차리지 못한다. 남자는 아주 집요하고 끈질기게 자신과 똑닮은 배우를 찾아낸다. 해당 영화사의 영화를 대거 빌려서, 마지막에 나오는 자막의 이름을 대조해서 해당 배우가 나오지 않은 작품의 이름은 지워가면서 범위를 좁혀가는 것이다. 


주제사라마구 특징이 문장이 아주 길다. 지칠만큼! 눈 먼 자들의 도시나 눈 뜬 자들의 도시는 그것도 매력이었는데, 이 작품이 그 작품만큼 재미가 없어서인지 아주 힘들었다. 읽다가 말장난에 지쳐서 나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당신도 나와 똑같은 일을 겪을 겁니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이 당신의 얼굴인지 내 얼굴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래도 당신이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흉터를 생각해 봐요, 만약 내가 미쳤다면, 아마 당신도 미쳤을걸요.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글쎄요, 경찰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질까요, 내가 한 일이라고는 다니엘 산타클라라라는 배우와 통화를 하려고 전화를 두 번 건 것뿐인데, 내가 그 배우를 협박한 것도 아니고, 모욕한 것도 아니고, 해를 끼친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정확히 어떤 범죄를 저질렀다는 거죠. 어쨌든 아내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죠, 그거면 충분해요, 이제 전화 끊겠습니다. -246쪽


하여간 이 남자의 고단한 작업이 끝나고,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흉터까지 지닌 이 조연 배우를 만나기까지, 정확하게 이 책의 절반을 소요한다.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이쪽이야 이미 충격을 받았고, 마음의 준비도 했지만, 상대방은 어디 그렇던가. 그러나 나와 똑같은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데, 만나고 나면 그것으로 인해 도리어 일상의 평온이 깨질 거라고 예상이 가능하다고 해도 어떻게 그 궁금증을 포기하겠는가. 나라도 당연히 만난다. 그리고 만나지 않으면 그 불안은 어쩔 것인가? 나와 똑같이 생긴 생명체가 버젓이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도 좀 무섭지 않은가? 클론도 아니고? (클론이면 더 무섭겠지만...)


배우 다니엘 뿐아니라 아내 헬레나도 혼란에 빠져 있다. 남편과 똑같다는 그 사람, 이미 확인한 바로는 목소리도 똑같다. 그런 사람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만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지만 이미 상대방은 그들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는 아침식사를 준비하려고 부엌으로 갔다. 아내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 사람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와 있어. 그녀는 원래 그렇게 단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단호한 것은 아니다. 간결함이라는 재능을 갖고 있을 뿐이다. 짧고 함축적이고 간결한 말 네 마디로 다른 사람 같으면 사십 마디를 말해도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 -258쪽 

그녀가 눈을 떠보니 방 안이 거의 어둠에 가까운 어스름 속에 잠겨 있었다. 남편의 느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집 안에서 다른 숨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집 안으로 들어와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실일 수도 있고, 부엌일 수도 있고, 복도로 통하는 문 뒷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존재가 바로 여기 있었다. 두려움으로 몸을 떨면서 헬레나는 남편을 깨우려고 팔을 뻗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성이 그녀를 제지했다. 여긴 아무도 없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바깥에 누가 있을 리가 없어, 그냥 내가 지레 겁을 먹은 거야, 가끔 꿈이 그 꿈을 꾸고 있는 뇌에서 빠져나오는 경우가 정말 있지, 사람들은 그런 걸 환영, 환상, 예감, 징조, 다른 세상에서 온 경고라고 해, 숨소리를 내며 집안을 돌아다니는 사람, 방금 내 소파에 앉은 사람, 커튼 뒤에 숨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내 머릿속의 환상이야, 나를 향해 곧바로 다가와서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이 남자와 똑같은 손으로 나를 어루만지며 똑같은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 -252쪽


두 사람은 기어이 만났다. 만났고, 경악했다. 심지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온 아폰소마저도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이 놀라운 사태 앞에서도 우스운 기싸움을 벌인다. 바로 민증깐 것이다. 


그래, 태어난 시각이 언제죠. 오후 두 시예요. 안토니오 클라로가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보다 삼십 분 전, 아니 정확히 말해서 십삼시 이십구분에 머리를 내밀었어요, 미안하지만 당신이 태어났을 때 내가 이미 세상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복사본이에요.-302쪽 


일방적으로 '복사본'이라는 호칭으로 불려버렸다. 졸지에 클론으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로 먼저 자신이 원조라고 강요할 만큼, 다니엘 쪽이 더 흔들렸다. 그랬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었고, 그것이 그들의 파멸을 불러왔다. 자신이 원본이라고 우기는 순간, 상대방의 여자 역시 내 여자로 만들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간 전율이 사본이라는 첫 번째 단어가 아니라 복사본이라는 두 번째 단어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의식했다. -331쪽 


이제부터는 작품이 좀 더 흥미로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작들의 아우라만큼 빛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 '그을린 사랑'을 연출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에너미'는 훨씬 흥미롭고 역설적이고 충격적인 작품을 만들어 냈다. 소설로 시큰둥했던 반응을 오오! 하며 등받이에서 몸을 떼게 만들어 냈으니까. 


소설은 정말 나와 똑같이 생긴 유기체로서의 도플갱어를 만들어 냈지만, 영화는 그보다 나의 욕망이 투여된 또 하나의 자아로서의 도플갱어를 표현해 냈다. 전제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결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탄탄한 원작이 있기 때문에 그걸 뛰어넘는 패러디도 나오는 거겠지만, 그래도 내 저울은 영화 쪽으로 더 기울었다. 그래도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봤기 때문에 더 수월하게 다가간 것은 맞다. 영화가 친절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방금 떠오른 이 생각은 마치 오랫동안 지연되다가 샤워기에서 떨어져내린 축복 같았다. 세 여자가 발코니에서 벌거벗고 즐긴 샤워(『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온 장면-옮긴이)가 아니라, 안전이 언제 깨어질지 몰라 불안한 아파트에 혼자 갇혀 있는 이 남자가 누린, 정화의 샤워. 물과 비누를 가지고 연민 어린 손길로 그의 몸을 더러움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의 영혼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샤워. 그는 일종의 향수와도 같은 고요한 마음으로 마리아 다 파즈를 생각했다. -369쪽


이런 식으로 전작의 한 대목을 가져오는 장치는 소설가가 해낼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이 아닐까. 그 작품을 즐겁게 본 독자로서도 반가운 장치다.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도플갱어' 그리고 '동굴'까지 포함해서 주제 사라마구의 '인간 3부작'으로 꼽는다. 흠, 기왕이면 세트를 맞춰서 동굴까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이 스친다. 모두 인간의 내재된 욕망, 욕심, 진심... 이런 것들이 보였다. 동굴에선 무엇을 찾아야 할까? 몹시, 철학적인 느낌이다.


혼돈은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질서일 뿐이다.

-『반대의 책』                                          - 5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08-28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면서 제가 보지 못한 영화 [에너미]를 떠올렸거든요. 혹시 그 영화가 이게 원작인가?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맞네요. 저도 에너미를 보도록 해야겠어요.

마노아 2014-08-29 09:17   좋아요 0 | URL
묵혀둔 책을 영화 보기 전에 보려고 부랴부랴 읽었어요. 근데 그러고 또 한참 지났네요. 감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역으로 책을 보게 된 경우예요.^^

아무개 2014-08-28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8년도인가 그쯤에 눈먼자들의 도시를 친구에게 선물 받았었어요.
뭐 이렇게 재미없고 두꺼운 책을 나더라 읽으라는거냐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십년 넘게 책장에 꽂혀만 있던 책은 얼마전 파지 할머니 손으로 넘어 갔지요. ㅜ..ㅜ

이 책 주었던 친구가 책을 참 많이 읽던 녀석이었어요. 데미안도 고딩때 이놈땜시 읽고 이게 뭔소리야 싶었던 기억이...
그러고 보면 저는 책을 읽지 않아도 많이 읽는 친구들을 항상 좋아했던거 같네요.

마노아 2014-08-29 09:19   좋아요 0 | URL
앞서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는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 읽을 때 꼭 그런 기분이었어요.
뭐 이렇게 재미 없이 두껍기만 할까...ㅎㅎ
책보는 친구가 많은 건 어쩐지 무척 기분 좋은 관계인 걸요. 우리도 독서 클럽 하나 만들어 볼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