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다락방의 책장에서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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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겨울에 이사간 집에 다락방이 있었다. 좁은 집이었고, 언니들도 독방이 없는 터 내방은 당연히 없었는데, 잡동사니가 가득한 다락방을 내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열심히 치우고 정리하고 닦고서 가만히 누워 보았다. 햇볕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고, 뭔가 따뜻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햇볕에 데워진 먼지 냄새였다. 아무튼! 나만의 그 공간에 집에 있던 문학전집도 몇 권 갖다 놓고 책도 좀 읽었더랬다. 나만의 조용한 시간이었고 독립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빨간 머리 앤이 살던 그 집이 떠오르는 낭만적인 구석도 있었지만, 계절적으로 다락방은 너무 추웠다. 결국 몇 번 못 올라가고 그곳엔 다시 먼지가 쌓였다. 대신 난 식구들이 모두 TV를 보는 방 한구석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등돌리고 읽다가 눈물 한방울 또르르 흘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끄럽고 복잡한 공간에서 어떻게 집중이 됐던 걸까 의아할 지경이지만, 그때는 그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때의 오랜 기억이 다시 떠오른 건 이 책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이유경 작가님의 블로그 닉네임은 '다락방'이다. '다락방의 꽃들'에서 가져온 이름이라고 했는데, 이 이름을 들으니 또 어릴적 기억을 마구 건드린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한동네 살던 친구와 같이 등하교를 했는데, 친구는 자기 언니의 소설을 몰래 몇 구절 읽고 학교 가는 길에 나에게 들려주고는 했다. 그때 들었던 몇몇 책 중에 하나가 바로 '다락방의 꽃들'이었는데, 친구와 나는 다락방에 갇힌 아이들이 가엾다고 참으로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친구는 자기 언니의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고 나도 그 뒷이야기는 알지 못한다. (심지어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제인 에어'와 마구 섞여 있기까지 했다!) 그렇게 '다락방'이라는 이름은 구석지기도 하고 비밀스럽기도 하고 또 조금씩은 서글픈 이름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락방은 내게 유쾌하고 밝고 명랑한 느낌으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다 이 책의 저자 때문이다. 


처음 다락방님을 온라인이 아닌 곳에서 만난 때는 내가 심적으로 가장 힘들 때였는데, 그녀의 해피 바이러스는 금세 나를 감염시켜서 얼굴 근육이 마비되도록 웃다가 헤어진 기억이 난다. 그녀의 말과 몸짓, 표정과 심지어 식성마저도 나는 즐겁기만 하다. 그 즐거움과 못지 않은 따뜻함이 이 책에 옮겨져 있다. 내가 누리고 있던 그 행복한 기운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게 된 것은 인류애적 관점에서 보자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다소 아쉽다. 차별화된 기쁨이 공개된 것만 같아서. 


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아주 큰 즐거움이다.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만남이 생기면 서로에게 줄 책을 준비하게 되었다. 내가 즐겁게 읽은 책을 상대방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그런 판타지는 생각보다 충족되기가 어려웠다. 상대방이 이미 읽었거나 갖고 있을 수 있고, 내게 참 좋았던 그 책이 그에게는 별로일 수도 있다. 그녀는 아주 솔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별로인 책을 선물 받았다고 해서 좋았다고 포장하는 법은 없다. 그래서 사실 나는 이제 어떤 책을 갖고 싶냐고 미리 물어본다. 혹은 책이 아닌 다른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한다. 책에 있어서라면 이미 자기만의 세계관이 충분히 잡혀 있고, 호불호도 분명한 그녀이기 때문에 낭만은 좀 떨어지지만 그편이 더 나은 선택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다락방님의 독서는 내게 좋은 선택지가 되어버렸다. 간혹 내게 익숙하지 않고 낯선 책이 책장에 꽂혀 있을 때 검색을 해보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다락방님의 페이퍼가 등장하고 만다. 그것은 그녀의 글을 읽고 호기심이 동해서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렇다! 그녀의 글들은 늘 책구매 지름신을 부르고 만다. 유리지갑을 더 위태롭게 만들지만 결코 싫지 않은, 게다가 설레기까지 하는 소비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목록은 이 책을 읽는 동안 더 늘어나고 말았다. 


가을 선거에서 시장과 맞붙게 될 호적수가 지난주에 앤젤리나 V.리코에서 앤젤리나 V.아리코로 개명했다. 알파벳 순으로 기호 1번을 배정받기 위한 실수였다. 하지만 어제 로코 D.카로차 시장이 로코 D.아아아아카로차(aaaaCarozza)로 이름을 바꿨다. 

(...)

"시장님의 새 이름을 방송에서 어떻게 발음해야 합니까?"

"카로차입니다. 에이 네 개는 묵음입니다." (56-57쪽)


'악당들의 섬'이라는 책을 다루면서 저자가 소개한 유머감각이다. 난 이 글을 블로그에서 작년에 처음 보았는데, 직장에서 읽다가 너무 크게 웃는 바람에 동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이 대목을 읽어주었는데, 그들은 전혀 웃지도 않고 그게 뭐가 웃기냐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 a 네개가 묵음이라는데 안 웃기다니! 그들은 내가 문과생이고 자신들은 이과 출신이어서 그런 것 같다고 정리했다. 비록 그들 때문에 다소 흥이 떨어지긴 했지만 이 부분은 이 책을 통해 다시 읽어도 여전히 빵 터지게 웃기다. 다락방님은 책의 줄거리를 세세하게 설명하는 법이 없고,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주는 일도 많지 않지만 이렇게 적은 부분만으로도 관심을 끌게 하고 크게 웃거나 크게 울컥하게 만든다. 


많은 이야기들이 소설에서 시작하지만 삼천포로 빠지면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로 통하는데 이게 또 엄청난 반전 매력이 있다. '그 숲에는 남자로 가득했네'라는 책을 읽으면서는 도시를 사랑하는 전형적인 도시녀인 다락방님이 숲에서 벌목꾼들을 위한 요리사가 되고 싶은 열망까지 갖게 한다.


완벽한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그러니까 나는 이종격투기 선수인 바다 하리를 닮은 벌목꾼과 사랑에 빠지는 거다. 어쩔 수 없이. 그래서 그와 나는 딸 둘 아들 둘을 낳는 거다. 숲은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놀이터. 나와 바다 하리가 낳은 아이 넷은 60명 벌목꾼들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나는 주방 보조를 하면서 부주방장이 되고,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점점 더 뚱뚱해진다. 그러나 바다 하리는 뚱뚱해서 뒤뚱뒤뚱 걷는 나를 여전히 사랑해주고 여전히 튼튼하게 나무를 벤다. 아, 정말 아름답고 완벽한 이야기가 아닌가. -183쪽


삼천포는 보여줬고, 반전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라. 그녀의 상상력은 늘 상상 그 이상이었으니까!


재밌었던 책, 좋았던 책,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그런 책 이야기만 쏟은 것이 아니다. 때로 다락방님은 소설적 재능도 마구 펼쳐 보였다. 이 책의 제 4장은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 실린 글들이 유난히 좋다. 특히 블로그에 썼을 때부터 나를 반하게 만든 '순례자의 책'과 '순수의 시대'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독자마저도 달콤하고 짜릿한 쾌감을 갖게 한다. 이것이 상상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책의 제목이 '독서공감'인데, 독서에서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강하게 공감하는 것이 작가 자신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섭고 아프기까지 했다. 캐서린을 따라 겁이 났지만, 스튜어트 덕분에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문을 여러 차례 점검하며 숫자를 셀 때 나도 같이 세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빨리 읽어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걸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감시당하는 느낌을 받을 때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자신의 집이 미묘하게 바뀐 걸 느낄 때, 나는 거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곳으로부터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러려면 빨리 읽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론 결국 그녀가 어떻게 되는지, 그러니까 강박증을 이겨내는지, 출소한 전 연인과 맞서 싸우는지, 이 모든 과정들을 지켜보고 싶었다. -80쪽

 

그녀의 몰입도는 굉장해서 소설 속 인물과 이미 물아일체가 되어 있고, 그 사건과 그 감정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녀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특별한 공감을 끌어낸다. 그러니 독서공감이 '사람'을 읽게 만든다. 사람이 있고, 삶이 있고,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이 책 속에, 그리고 이 책을 읽어 나가는 독자에게도.


12월이 되었고, 2013년이 한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집어든 이 책은 유난히 손이 시려운 나에게 따뜻한 입김이 되어주었다. 긴긴 겨울밤이 다가올 것이고, 이맘 때면 나를 괴롭혔던 문제들이 다시금 고개를 들 테지만, 그럴 때 위로해줄 좋은 책도 여전히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새삼 알려주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더 풍성하고 더 재밌고, 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아직도 블로그에 많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이다. 그것이 큰 위로가 된다. 기왕에 공개된 차별화된 기쁨이 더더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때는 그녀의 소설적 재능도, 시트콤 작가 같은 유머 감각도 더 크게 펼쳐보였으면 좋겠다. 세상과 사물에 대해 예리한 관찰력을 가졌고, 필력도 훌륭하며 무엇보다도 성실하기까지 한 작가님에 대한 기대가 크다. 다락방님의 오감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 씨앗이 어떻게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을지 즐겁게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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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3-12-09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이런...
전 리뷰 안 쓸랍니다. 아니..
못쓰겠네요. 이렇게 애정이 담뿍 담긴 마노아님의 리뷰를 읽고나니
못쓰겠네요...

그런데 웃긴건 다락방님 글 읽을때는 다락방님 목소리가
마노아님 글 읽을때는 마노아님 목소리가 들리는거 같아요. 하하핫 ^0^

마노아 2013-12-09 09:35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밑줄긋기 궁금해요. 어떤 부분에 밑줄 그으셨어요?
우히히힛, 제 목소리가 들렸나요? 냐핫, 그것도 좋은걸요.
우리 조만간 만나서 독서공감 이야기 더해요. 유훗!!!

그렇게혜윰 2013-12-09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해피바이러스~~와, 정말 궁금하네요^^

마노아 2013-12-09 23:54   좋아요 0 | URL
만나면 더 큰 바이러스에 덜컥! 감염이 되지만, 글만 보고도 충분히 감염될 수 있어요. 게다가 백신도 없다지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