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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했다. 작가 천명관에 대해서 들은 말이다. 몇 쪽 읽어보지도 않고 그말을 수긍했다. 책장이 파라라락 넘어간다. 좀처럼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도 빨리 읽는다고 착각할 정도로 책장이 넘어갔다. 재미있었다. 심각한 이야기가 나와도 재미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머 감각이 대단했다. 이 놀라운 말빨! 그러니까 대세는 유머일까? 박민규도 떠오르고 성석제도 떠올랐다. 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무겁기만 한 책은 재미 없을 것 같다. 부담스러울 수 있다. 심각한 이야기를 진중하게 던질 때에도 가끔은 웃어줄 곳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런 쉼표를 만들 줄 아는 작가들이 인기를 얻는 것 같다.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작가분들께 고마움을 느낀다. 쉬어갈 짬을 만들어 주어서......
작품의 화자는 둘째 아들 인모다. 십이 년 전에 만든 영화가 대박으로 망하면서 빚더미에 올랐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했으며, 아내와는 이혼했고 보증금 다 까먹고 월세마저도 밀려서 사면초가에 몰렸던 그를 구원해낸 것은 엄마의 전화 한통이었다. 닭죽 해놓았으니 먹으러 오라고 한 그 말은 인모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렇게 엄마 집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인모는 눌러앉아버렸다. 이미 그 집에는 앞서 엄마한테 얹혀 살고 있는 쉰두 살의 큰형 한모가 있었지만, 마흔 여덟의 인모도 물러날 데가 없었다. 둘이 합해서 둘로 나눠도 벌써 평균 나이 오십이다. 거기에 칠순이 넘은 엄마가 계시고, 마흔 다섯의 막내 여동생 미연이 열여섯 딸을 데리고 집에 들어앉았다. 두번째 결혼마저도 깨뜨릴 위기 순간에 말이다.
그러니 이미 '고령화 가족'이라는 제목은 설명되었다. 평균 나이 49세. 십년 전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보상금으로 마련한 낡은 빌라 24평 집에 이렇게 다섯 식구가 북적이며 살게 되었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할퀴며 버럭버럭 성도 내지만, 그런 자식들을 엄마는 매일 같이 고기를 먹이며 거둬주셨다. 뿐인가? 엄마는 오히려 자식들이 모두 들어와 살고부터 얼굴에서 더 빛이 났다. 자식들을 챙겨주는 데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마치 결기라도 보이듯 매 끼니마다 고기를 삶고 굽는 엄마만이 이 집에서 유일하게 웃는 낯이다.
이 집에서 가장 많이 배웠고, 또 가장 공부도 잘했다던 영화감독 출신 인모는 그런 엄마가 수상했다. 혹시 잘 먹이다가 마지막에는 고기에 청산가리를 넣고 다 함께 죽자는 의미는 아닐까 의심마저 하면서. 그런 상상이 될만큼 지금 그들의 처지는 기구하고 황량하고 짜증이 났던 것이다. 인생 다 망쳤다고 여기는 인모만 기구했던 게 아니었다. 큰형 한모는 전과 5범이다. 그 중에는 강간미수까지 있으니 죄질이 아주 불량하다. 120kg이나 나가는 거구의 이 사내를 인모는 미워했다. 한심해서 미워했고 미안해서 미워했다. 그가 뭐가 미안해서 미워하게 되었는 지에 대해서는 작품 후반부에 가서야 나온다. 그리고 그 대목은 이 책에서 가장 울컥했던 부분 중 하나였다. 그래, 우리는 이런 감정들로 살아가지. 그렇게 나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변명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지만 사실은 그 죄책감으로 더 스스로를 갉아먹고는 하지. 그게 우리 모습이었어......
여동생은 두번의 이혼도 모자라 세번째 남편감을 데리고 왔다. 할머니로부터 삼촌들에 엄마까지, 하나같이 콩가루인 이 집안에서 가출을 결행하는 미연의 딸 민경. 그 과정에서 폭발해버린 미연의 절규가 또 한번 독자의 마음을 울렸다.
아마 다들 눈치 채고 있었을 거야. 근데 왜들 모른 척했어? 그때 누군가 따귀라도 갈기면서 욕이라도 하지 그랬어. 아니면 머리라도 깎아서 집에 들어앉히든가. 그런데 나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씨발, 무슨 가족이 그래? -132쪽
그러니까 나는 이 대목에서 기시감을 느꼈던 것이다. 비단 우리집뿐 아니라 내가 아는 누군가의 집에서도 보았던 어떤 모습을 확인한 것이다. 그 순간 어찌나 얼굴이 홧홧하던지... 여기서만 그랬던 게 아니다. 앞서 말했던 미안한 마음을 미움으로 바꿔버렸던 인모에게서, 원죄를 끌어안고 속죄하듯 살았던 이들 삼남매의 엄마에게서 한줌씩은 우리 가족의 모습을, 내가 가졌던 마음의 짐을 확인했던 것이다. 바로 이 콩가루 집안 이야기에서.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행복을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것은 그저 위선에 가득 찬 역할극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래서 실은 그것이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선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판타지일까?
집에 들어와 함께 살기 전까지 나는 가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힘이 쭉 빠지게 만드는, 평생 달고 사는 오래된 지병 같은 거였다. 평생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두리만을 떠돌며 낭떠러지를 걷듯 살아온 천애의 삶, 아무리 똥줄 타게 뛰어다녀봤자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무능과 무지, 숱한 수모와 상처, 불명예와 오명의 역사...... 도대체 내가 어떻게 가족에 대해 자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141쪽
그랬다. 인모는 이 가족에 대해서 자부심과 애정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다. 부끄럽고 화딱지가 났다. 그런데, 그 인모가 이 집에서는 가장 우대받으며 산 인생이었다. 본인은 몰랐지만, 알았어도 인정하지 않고, 알려들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가장 많은 배려를 받고 자랐기 때문에 가장 이기적이었던 것이 인모 자신이었다. 인모는 그것을 모든 것을 다 잃고, 가족 외에는 가진 게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에야 깨달았다. 나이 오십이 다 되어서야.
어찌 보면 이 책은 나이 오십줄의 중년 남자의 '성장 소설'일지도 모른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기만적이었던 이 사내는 반세기 가까이 살고나서야 자신이 가족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고, 엄마가 무엇에 희열을 느끼는지 당연히 몰랐다. 형 한모가 자신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알지 못했고, 동생 미연이 무엇에 가장 서러워하는지 알지 못했다. 조카딸은, 사실 얼굴도 몰랐고 이름은 당연히 몰랐다. 그랬던 그가 변해갔다. 엄마의 인생을, 엄마의 사랑을 이해해 가기 시작했고, 형에게 빚을 갚고 싶어했고, 여동생과 조카에게도 신세를 갚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껏 추켜세웠던 알량한 자존심도 포기했다. 내려놓을 무언가를 가졌을 때에야 그는 제 안에 가진 게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비워내고 나서야 채워지는 제 마음의 그릇을!
그리고 사랑을 믿지 않고, 따라서 사랑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그가, 뒤늦게야 사랑의 충만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 은총의 세례를 입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줄 알게 된다.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고, 신으로부터 추방당한 것만 같던 그의 인생에 여명이 들기 시작했다. 그 출발점은 바로 그의 콩가루 가족에서부터였다. 거기가 시작이었다.
작품을 재밌게 읽었다. 다음 날 영화를 보기로 약속을 잡아 놓았기 때문에 다 읽고서 자고 싶었다. 다행히 연휴의 시작이었고, 새벽 3시까지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중간에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빠져들었다. 많이 웃었고 꽤 뭉클했으며 마음에 묵직한 것들도 여럿 새겨넣었다. 좋은 작품이다.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원작이 훨씬 좋다. 영화는, 그냥 마음을 비우고 봐야 한다. 연기 잘하는 배우들만 데려다 놓는다고 좋은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니까...;;;;
여기서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헤밍웨이가 아기였을 때, 완벽한 문장으로 처음 한 말은 ‘나는 버팔로 빌을 몰라요’였다고 한다.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처음 한 말은 ‘개가 불쌍해’였다고 알려져 있다. 역시 비범한 작가들은 뭔가 달라도 처음부터 다른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완벽한 문장으로 처음 한 말은 뭐였을까? 그것을 말해줄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그것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맘마. -287쪽
덧글) 오타 발견했다.
257쪽
언덕을 높고 가팔랐다. >>> 언덕은 높고 가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