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플라워 - 삶의 가장자리에 서 있으면, 특별한 것들을 볼 수 있어
스티븐 크보스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일기를 쓰듯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가 있다. 나의 사적인 공간이지만 어느 정도는 공개된 곳이고, 그래서 쓰고 나서 후회하거나 얼굴이 붉어질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런 글쓰기가 필요했던 것은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내 짐을 덜어내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찰리가 그랬다.

 

찰리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편지를 쓴다. 우연히 편지의 수신인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이해도 잘해준다는 말을 듣고는 송신인 주소도 남기지 않은 채 일방적인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제 막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된 찰리는 두려움이 컸다. 친한 친구가 지난 봄에 자살을 했고, 지속적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찰리에게는 숨겨진 이야기가 많았다. 그 이야기들은 일년에 걸쳐 편지글을 통해 소개된다. 무척이나 아프고, 또 동시에 무척이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찰리의 두 친구도 소개해야겠다. 남매인 샘과 패트릭은 올해 졸업반이다. 셋은 우연히 친구가 되었고 찰리는 샘에게 푹 빠져버렸다. 그렇지만 샘은 사귀는 남자가 있었고 찰리는 그저 샘이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그야말로 제목처럼 '월 플라워'다. 월 플라워란 파티에서 파트너가 없어서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는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인다. 각별히 감수성도 뛰어나고 문학적 재능도 출중한 찰리이지만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는 잘 섞이지 못했었다.

 

그랬던 찰리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여러 추억들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샘과 패트릭 덕분이었다. 그러나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심연 깊이 자리한 트라우마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뛰쳐나와 찰리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 사랑 많은 가족들 사이에서 자란 공부 잘하는 막내 아들 찰리. 그런 찰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걱정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아이의 큰 상처 하나가 드러나고 나서도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 하나가 계속 마음에 걸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등장하는 진짜 이유를 만날 때까지 초조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 책에는 섹스, 약물중독, 흡연, 동성애, 근친애까지... 찰리의 주변 아이들도 벅차게 겪는 성장통이 무척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또 다른 아이가 자살을 하지나 않을까, 무슨 사고를 치는 것은 아닐까 역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 소재 때문에 이 책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지만, 이미 현실이 그러할진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책은 적극적으로 미국의 90년대 청소년들을 드러내고 그들이 성장통을 진하게 겪으며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나하나의 인물들이 어찌나 애틋하고 절절하게 만들던지......

 

할아버지는 울고 계셨어.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울고 계셨어. 나만이 알아차릴 수 있었지. 엄마가 어렸을 때, 성적표를 한 손에 들고 다시는 이런 점수를 받아오면 안 된다며 엄마를 때리셨던 할아버지를 생각했어. 할아버지는 형과 누나 그리고 나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고 싶었던 거야. 방앗간에서 일하는 사람은 당신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싶었던 거지. 그런 생각이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어. 그리고 자식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대학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도 잘 모르겠어. 딸들과 마음을 나누며 지내는 대신 자기보다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더 훌륭한 일인 건지도 잘 모르겠어. 아무 판단도 할 수 없어. 그래서 난 가만히 앉아 할아버지를 바라봤어. -101쪽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그 가족들에게 정서적으로는 결핍을 주셨던 외할아버지. 그리고 지금은 유색 인종을 차별하는 발언을 하는 꼬장꼬장한 노인이 되어 계신 이 할아버지가 낯설지가 않다. 우리 나라에서 걸핏하면 가스통 들고 나와 목청 돋우는 자칭 보수인 극우파 할아버지들 말이다. 그분들의 헌신과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왜곡된 방향으로 기운 그 마음들이 안쓰럽고 불편하다. 찰리의 가족들은 다행히 이 할아버지를 가족 내에서 수습(?)하지만 우리야 어디 그렇던가...

 

찰리에게 책을 선물해 주며 방과후 학습을 시켰던 빌 선생님도 참 근사했다. 선생님은 찰리에게 지금 필요한 책들을 소개해 주었고, 그 책을 읽은 다음에는 에세이를 써 보게 하셨다. 아이는 책을 두번씩 읽는 습관이 있는데, 어떨 때는 울고 싶지 않아서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고, 자고 일어나서 또 읽는 일마저도 벌어졌다. 천 년 동안 잠들고 싶은 때가 있다고 말하는 이 열다섯 소년에게 마찬가지로 폭풍 성장통을 겪고 있는 소설 속 인물들을 소개해주며 스폰지가 아니라 필터가 되라고 조언해주는 좋은 선생님. 아이에게 '특별함'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는 고마우신 분이다. 찰리에게 고마운 인물들은 이 밖에도 많이 등장한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서로의 시크릿 산타가 되어 상대 모르게 선물을 전해줄 때 패트릭이라는 친구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누가 보아도 선물을 보낸 이가 찰리라는 걸 알 수 있는데도 몰랐다는 표정을 지어주는 이 아이. 자신이 사랑하는 동성애 친구가 자신의 사진을 의심 받지 않고 지닐 수 있게 잡지에 사진을 싣는 배려를 할 줄 아는 아이다. 매번 샘과 패트릭은 찰리에게 산타 같은 존재였다. 데이트 상대에게 큰 실수를 저지른 찰리에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고, 제대로 사과하는 법을 알려준 남매였다. 글 쓰는 찰리에게 타자기를 선물하며 꼭 쓰고 싶은 글을 쓰라고도 했다. 먼저 졸업하는 아이들이 떠나고 난 뒤의 찰리가 겪을 심적 부담을 독자도 같이 걱정해야 했다.

 

그러나 어떤 상처는 꺼내야만 치유가 가능하기도 했다. 아무리 꼭꼭 숨겨놓아도 어떤 계기가 생기면 반드시 수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찰리가 그랬다. 이 아이가 겪은 상처는 단순한 기억 봉인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가여운 이 아이가 곁에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다. 자주 눈물을 터트리는 이 아이의 옆에서 등을 토닥여 주고 싶다. 그리고 괜찮다고, 더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네 탓이 아니라는 것도 꼭 전해줄 것이다. 그게 진실이니까.

 

우리와 무척 다른 문화 차이를 읽는 것도 재밌었다. 외국어 영화라서 자막으로 영화를 처음 보았다는 구절에서도 움찔했고, 데이트 상대가 생기자 콘돔 사용을 강조하는 아버지의 조언도 인상 깊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다섯, 열여섯 학생과 아버지의 상황이라면.... 음....;;;;

 

“네가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또 누군가에게 기댈 어깨가 돼준다는 건 훌륭한 일이야. 하지만 기댈 어깨가 필요한 게 아니라 어깨를 둘러줄 팔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할 건데? 구석에 가만히 앉아 너의 인생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앞세우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그렇게 해선 안 된다구. 너도 어떤 행동을 해야 해.” -315쪽

 

“난 누군가의 짝사랑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만약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아닌 진정한 내 모습을 사랑해주길 원해. 또 그가 마음 속으로만 사랑하기를 바라지 않아. 그걸 내게 보여주고 그래서 내가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원하거든. 그가 나와 함께 하고 싶어하는 일이 어떤 것이든 모두 다 할 수 있기를 원해. 그리고 만약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게 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거야.” -317쪽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온 찰리에게 샘이 지적해 준 부분은 나에게도 무척 뜨끔한 부분이었다. 소개된 책 '마천루'를 언급하면서 나온 “난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지만 너를 위해 살지 않을 거야.”도 같은 맥락에서 마음에 남는다. 주체적으로 사는 인생,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하고, 내가 책임지는 내 인생을 그려본다. 이미 오래 전부터 했어야 할 일들이다.

 

이 책은 친구에게 선물 받았다. 126쪽을 읽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126쪽이 궁금했지만 먼저 들춰보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으니까. 천천히 읽으면서 궁금했던 부분을 만났다.

 

조지 베일리는 마을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어. 그 덕분에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그가 마을을 구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마을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던 거야. 모험에 가득 찬 삶을 살고 싶었지만 마을의 발전을 위해 꿈을 포기하고 남았던 거야. 하지만 그 결과가 비참하게 나타났을 때, 그는 자살하기로 결심했어. 그런데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만약 그가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게 되었을 지를 보여줬어. 그 마을 전체가 겪었을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준 거야. 또 그의 아내가 어떻게 ‘나이 많은 하녀’로 살아가는지도 보여줬어. -126쪽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내 생각이 났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난 사흘은 개인적인 이유로 좀 힘든 시간을 보내었는데, 그 시간들을 보상해 준 느낌, 상처난 마음을 어루만져 준 기분이었다. 찰리에게 샘과 패트릭이 그런 존재가 되어준 것처럼 내게도 멋진 친구가 있었다. 새삼스럽게 고맙고 또 고맙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코드도 반갑다.

 

:

앵무새 죽이기 - 하퍼 리
천국의 이쪽 - F.스콧 피츠제럴드
피터 팬 - 제임스 매튜 베리
위대한 개츠비 - F.스콧 피츠제럴드
단독강화 - 존 놀스
호밀밭의 파수꾼 - J.D.샐린저
길 위에서 - 잭 케루악
네이키드 런치 - 윌리엄 S. 버로우즈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햄릿 -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방인 - 알베르 카뮈
마천루 - 아인 랜드
카스트로 스트리트의 시장 - 랜디 쉴츠

영화 :

록키 호러 픽쳐 쇼 - 짐 샤만
졸업 - 마이크 니콜스
해럴드와 모드 - 할 애쉬비
개 같은 내 인생 - 라세 할스트롬
죽은 시인의 사회 - 피터 위어
믿을 수 없는 진실 - 할 하틀리
아름다운 인생 - 프랭크 캐프라
레즈 - 워렌 비티
더 프로듀서 - 멜 브룩스
매쉬 - 로버트 알트만

음악 :
Asleep - 더 스미스
Vapour Trail - 라이드
Scarborough Fair - 사이먼 앤 가펑클
A Whiter Shade of Pale - 프로콜 할럼
Dear Prudence - 비틀즈
Gypsy - 수잔 베가
Nights in White Stain - 무디 블루스
Daydream - 스매싱 펌킨스
Dusk - 제네시스
MLK - U2
Blackbird - 비틀즈
Landslide - 플리트우드 맥
Smells Like Teen Sprits - 너바나
Another Brick in the Wall Pt.II - 핑크 플로이드
Something - 비틀즈

 

다음 주면 개봉하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는 엠마 왓슨, 로건 레먼, 에즈라 밀러가 주연으로 등장한다. 배우의 이미지로도 이미 싱크로율이 200%다. 영상으로 만나는 이 작품에서는 저 위의 저 노래들이 배경음악으로 적절히 등장할 테지. 음악과 영상과 연기가 모두 기대된다. 책을 통해서 만난 감동과 전율을 다시 한번 스크린 위에서 조우하고 싶다. 오랜만에 만난 먹먹한 성장소설이다. 아름답고 아프다.

 

덧글) 수정되었으면 하는 부분이다.

267

18번 홀으로 이어지는 >>> 홀로

283

점심을 먹을 동안 줄곧 재즈를 들었지. >>> 먹는

308

잠도 자지 않았고 패트릭과 샘이 부모님과 함께 특별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지난밤에 그들을 만나지 못해서 오늘은 전혀 달랐어. >>> 뭔 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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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년 4월에 본 영화들
    from 그대가, 그대를 2013-06-02 21:09 
    접힌 부분 펼치기 ▼ 25. 콰르텟 음악 영화는 늘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보게 된 영화다. 이날 직장에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나름 영화로 치유의 시간을 보내자며 선택했는데, 애석하게도 많이 졸았다. 영화가 졸려서가 아니라 많이 울고 난 뒤라서 피곤해서 꾸벅 졸고 말았다. 앞부분은 거의 졸고 뒷부분만 보았는데, 그 부분만 보고서도 영화는 충분히 좋았다. 과거 사랑의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테너 레지, 분위기 메이커 호
 
 
다락방 2013-04-01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에 308페이지요 두세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뭔말인지 어렴풋이 감이 잡히긴 해요. ㅎㅎㅎㅎㅎ 아, 웃었네요.

리뷰 좋아요, 마노아님. 아침에 지하철에서 스맛폰으로 읽는데, 이 책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저도 315쪽과 317쪽의 샘이 무척 좋았어요. 그런 샘 때문에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노아 2013-04-01 12:12   좋아요 0 | URL
찰리 입장에서 곱씹으며 읽으면 말이 되긴 하는데 자연스럽지가 않잖아요. 저 문장은 아주 불친절해요. ㅎㅎㅎㅎ

아, 되게 잘 쓰고 싶었는데 욕심만 내고 잘 안 됐어요. 원래 북다트로 표시해둔 곳은 굉장히 많았는데 그걸 다 집어넣기가 힘들더라구요. 할 말이 많은데 입에서 정리되어 잘 안 나오는 느낌이지 뭐예요. 샘은 축복이에요. 아, 정말 좋은 친구. 이름도 멋져요. 남자 이름으로 생각했는데 여자 아이라서 그것도 반가운 것 있죠.^^

2013-04-04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4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