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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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그만한 일을 혼자 결단치 못하여 내게 번거롭게 취품하니 대리시킨 보람이 없다” 꾸중했고, 그래서 이런 일을 묻지 않으면 “그런 일을 어이 내게 취품치 않고 스스로 결정하리” 하며 나무랐다.
(...)
심지어 영조는 백성들이 얼어 죽거나 주려 죽거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생겨도 “소조에게 덕이 없어 이러하다”고 꾸중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는 날이 조금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라도 치면 임금이 또 무슨 꾸중이라도 할까 사사건건 두려워하며 떨었다.
-142쪽

영조는 특별히 중요한 일로 질책하지도 않았다. 간병하는 세자의 옷매무새나 행전 친 모양 등을 가지고 꾸짖었다. 어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울부짖으며 정신을 못 차리는 세자에게 영조는 사소한 트집을 잡았다.
-145쪽

궁궐이 피로 물든 시기였다. 영조는 이렇게 좋지 않은 자리에는 꼭 세자를 불렀다. 자기가 일을 끝내고 들어갈 때 세자가 없으면 늦은 시간이라도 꼭 불러 인사를 받았다. 그때 영조가 던진 인사는 고작 “밥 먹었냐”였다. 이는 영조가 그날의 불길한 기운을 씻으려는 행동이었다.
-154쪽

영조는 세자의 외출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161쪽

사도세자는 스물두 살이 되도록 능행 수가를 한 번도 못했다.
영조는 사형죄인을 심문하거나 죽이는 불길한 일에는 자주 세자를 불러 곁에 앉혔지만, 밝고 빛나는 경사에는 부르지 않았다.
-162쪽

평소 영조는 미신적인 조짐이나 금기를 강하게 믿었는데, 그 속에서 세자는 늘 ‘재수 없는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불길한 세자를 거둥에 끼웠더니 아니나 다를까 재변이 생겼다. 이에 세자를 향해 “날씨 이런 것이 다 네 탓이라, 도로 돌아가라”고 크게 화를 냈다는 것이다.
-166쪽

『이재난고』 등에 의하면 영조는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 자식을 죽여놓고는 마치 적국을 평정한 것처럼 승전가를 연주하게 한 것이다. 신하들이 극구 말리는데도 영조는 듣지 않았다. 서울 사람들은 아들을 죽여놓고 역적을 토벌한 것처럼 개선가를 울리며 대로를 행진하는 득의양양한 영조를 보았다.
-227쪽

영조는 정조를 자주 곁에 두었는데, 그러고는 신하들 앞에서 걸핏하면 세자 걱정을 했다. 걱정 끝에는 종묘와 사직을 위해서 나라를 세손에게 맡겨야겠다는 말을 곧잘 했다. 세자가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것도 대리청정으로 국정의 일부를 맡고 있는 판에 손자에게 나라를 넘기겠다는 중대 발언을 한 것이다. 사도세자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268쪽

권력자에게는 친구처럼 친근한 사람은 있어도 친구는 없다. 더욱이 영원한 친구는 없다. 이 점을 명심해야 권력을 오래 누릴 수 있는데 홍국영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홍국영은 1779년 9월, 조정 내의 논란을 뒤로 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정조는 쫓겨나는 홍국영을 봉조하로 만들어주었다. 은퇴한 노대신에게 내리는 명예직을 서른두 살의 젊은 신하에게 내려준 것이다.
-305쪽

유일한 벗 홍국영까지 떠난 조정에서 정조는 이제 아무 간섭도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이 되었다. 철저한 고독만이 그의 벗이었다.
-306쪽

영조는 늘 임금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걸핏하면 전위를 선언했다. 하지만 영조의 전위 선언을 진정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임금이 나라와 백성에 대한 걱정을 표현하는 한 그는 결코 권력을 벗을 수 없다. 권력에서 벗어나려면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믿어야 한다. 후계자를 믿어야 한다. 후계자를 믿으니 이제 물러나겠다고 해야 한다. 세자에게 국정의 일부를 맡긴 대리청정은 권력욕을 버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에 대한 더 강한 집착을 보여준다. 세자까지 직접 자기 권력 아래에 두겠다는 표시다.
-326쪽

죽음이 두려워 평생 죽을 사(死) 자와 돌아갈 귀(歸) 자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던 영조도 죽었다. 권력은 때가 되면 놓아야 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죽을 때를 모르는 것처럼 권력도 놓을 때를 알지 못한다.

절대 권력자는 자기 것을 뺏으려드는 자도 공격하지만, 권력을 뺏을 힘을 가진 자도 미리 싹을 자른다. 권력의 존립을 위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다. 권력의 비정함은 여기서 나온다. 영조는 평소 사도세자에게 냉정하고 엄격했다. 자식을 죽일 정도였으니 더 말이 필요 없다. 영조는 종묘와 사직을 위한다면서 자식에게 죽음을 요구했다. 하지만 본질을 보면 그가 말한 사백 년 종사는 다름 아닌 자신의 권력이다. 권력의 핵심인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은 털끝만 한 것이라도 용서하지 않는다. 자식이라도 봐줄 수 없다.
-327쪽

나누지 않는 권력은 외롭고 위태롭다.
-329쪽

경희궁은 현재 복원했지만 원형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정전인 숭정전은 뜯겨서 조계종에 팔려 현재 동국대학교 내의 법당인 정각원이 되었다.
-391쪽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길 건너편에는 서울대학교 병원이 있다. 이 자리에는 원래 왕실의 정원인 함춘원이 있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다음 그 한쪽 편에 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들어섰다. (...) 경모궁은 개인 사당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데, 어림잡아 볼 때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두 모신 종묘의 절반 크기다. 이는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임금의 생부로서 사도세자처럼 오랫동안 추존되지 못한 사람이 없었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99쪽

정조는 자신이 직접 참배하지 못할 때도 아버지를 뵐 수 있도록 경모궁 망묘루에 자신의 초상을 걸어두었다.
-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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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12-28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죠.근데 일설에는 사도세자가 소론세력을 뒤에 얻고 아버지를 쫒아내려는 친위 쿠테타를 벌이려고 했다는 설이 있지요.실제 실록에도 사도세자가 평안도로 암행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는데 평안도는 조선의 정예부대가 있어 영조도 신경이 날카로와 졌다고 하는군요.

마노아 2012-12-28 21:44   좋아요 0 | URL
뭔가 군사 행동을 보였다는 정황이 분명 보이는데, 그걸 이덕일은 노론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으로 보았고 정병설은 역모라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본인이 세자이고 십수년 째 대리청정을 하고 있고, 연로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연스럽게 왕위를 이어 받는데, 세자가 왜 그런 짓을 할까요? 그러니 양보해서 사도세자가 정말 정신병이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첫째도 둘째도 영조에게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