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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의 딸 - 맛있고 심플한 삶, 코즈모폴리탄의 이야기
나카가와 히데코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1월
평점 :
저자의 이력이 무척 흥미롭다. 일본 태생의 귀화 한국인이며 아버지는 프랑스 요리 셰프이고 어머니는 플로리스트이다. 아버지가 서독의 일본대사관 전속 요리장으로 파견되면서 일곱 살에 서독으로 이주해서 3년을 지냈다가 일본으로 귀국했다. 대학을 독일어학과로 진학하면서 교환 유학생으로 '동독'을 택했다. 서독은 이미 경험했던 바, 타고난 호기심과 도전 정신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갔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홀연히 스페인으로 떠났다가 1994년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이 가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요리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심지어 한국궁중음식 연구원에서 3년간 공부한 최초의 일본인 수강생이라니, 놀라운 스펙트럼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력이 성인이 되기 전부터 생에 펼쳐져 있었으니, 이런 사람이 평범하게 사는 것도 어쩐지 사회에 못할 노릇이랄까. 남들이 좀처럼 접하지 못할 다양한 경험들을 해보았으니, 그것을 어디에든 풀어놓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니 저자가 요리 교실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 경험들을 이렇게 책으로 담아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본인이 생각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주변에서 충분히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요리사의 길을 꿈꾸지 않았지만 어릴적부터 자연스럽게 요리하는 아버지를 관찰하며 또 요리에 흥미를 가지는 시간을 보내왔다. 손때 묻은 레시피 노트는 이제 집안의 가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어린 두 아들이 외할아버지와 엄마의 뒤를 이어 요리사의 길을 걸을 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도 훌륭한 보물이 될 것이다. 수기로 쓴 노트이기에 더 값어치 있어 보인다.
아버지는 이미 요리의 장인이고 달인이지만 어릴 적부터 아이에게 그 값어치를 강조하지 않으셨다. 대신 몸소 프로 요리사의 원칙을 지키면서 나태해지지 않는 것으로 아이에게 훌륭한 유산을 물려주셨다. 수프를 내기 전에는 접시를 데워두어야 한다는 지나가는 말들은 강조하지 않아도 아이의 머리속에 잘 각인되고는 한다. 이모는 커피나 차를 내오실 때도 찻잔을 미리 더운 물로 한 번 헹군 뒤 물을 따르셨는데 그 생각이 떠오른다. 한 번도 실천해보지는 않은 것 같지만...;;;
독일에서 귀국한 뒤에 저자는 본격적으로 '셰프의 딸'로서 활동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셰프의 조수' 노릇이랄까. 아버지의 피가 흐른 탓인지, 그렇게 정해진 운명인지, 신기하게도 커다란 도마를 앞에 두고 정신을 집중해서 사과 껍질을 벗기고 은행잎 모양으로 썰 때면 학교에서 있었던 싫은 일, 괴로운 일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전략은 확실히 성공했다. 조수 역할을 통해 요리를 만드는 즐거움, 누군가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기쁨, 요리와 마주하는 신성한 가치까지도 모두 알게 하신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이다.
플로리스트 엄마는 아주 꼼꼼한 분이셨고 오래된 물건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 두시는 분이었다. 저자가 도시락 생각이 나서 우편으로 부탁하자 바로 바다를 건너온 미니 도시락. 어른 숟가락으로 크게 두 번 뜨면 사라질 밥 두덩이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다. 오래되어 옛스럽기는 하지만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고전미가 있다.
식탁에서는 애들을 절대 혼내면 안 된다는 일본 어머니의 한 마디도 인상 깊다. 식사만은 언제나 즐겁게 하도록 노력하라는 이 한 마디는, 밥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우리의 전통 가르침과도 통한다. 물론, 절대로 쉽지 않음을 알지만!
저자의 어머니는 365일 내내 손수 만든 간식이 없는 날이 없게 하셨다고 한다. 세상에! 정성과 노력도 대단하지만, 그런 게 가능한 삶이란 경제적으로 얼마나 풍족한 것일까? 최소한 삼시 세끼 걱정은 절대 없는 삶이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저자의 화려한 이력을 생각할 때 남다를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이쯤에서는 좀 질투가 나려고 한다.
저자는 '엄마의 맛'을 언급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맛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엄마가 곧잘 해주셨던 감자 샌드위치가 떠오른다. 감자를 소금 간 약간 해서 으깬 다음 갖은 야채와 함께 마요네즈로 버무린다. 그리고 식빵에 발라서 먹으면 무척 맛있었다. 그러고 보니 먹어본지 한참이다. 지난 여름에 한 번 해주셨는데 다이어트 중이라 먹지 못했다.ㅜ.ㅜ 크리스마스를 기념 삼아 좀 해달라고 졸라보련다. 6^^
대학 시절 기숙사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가득했는데, 그들이 서로 자국의 요리를 만들어 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무척 흥미다 돋고 부러운 추억들이다. 고등학교 시절 가사 선생님이 졸업생이 일본에서 자국 요리를 대접할 기회가 생겼는데 할 줄 아는 음식이 없어서 김밥을 말았다는 소식에 무척 안타까웠다는 얘기를 하신 게 떠오른다. 지금이야 워낙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으니, 급하면 레시피를 긁어와서 어떻게든 시도는 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이런 날을 대비해서 나만의 필살 요리가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요리를 해보았지 시리즈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가....;;;;;
저자가 동독 유학 시절에 식재료 배급에 깜짝 놀란 사건도 이채로웠다. 일본에서 보내온 카레가루로 모처럼 포식할 기회가 왔는데 한 동양인 유학생이 카레가루를 나눠줄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누군가 했더니 북한에서 왔다고 한다. KAL기 폭파 사건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지라 위화감에 거절하고서 마음이 불편했다고... 동족이라 그런지 괜히 더 짠하다. 그이도 피해자일 텐데 말이다. 먹는 것 가지고... 흑흑...ㅜ.ㅜ
집으로 돌아갈 무렵 짐을 쌀 때 기숙사 친구가 독일의 통일에 대해서 얘기하는 부분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언젠가 동서독이 통일 되면-이라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통일이 당연한 거라고 여기지도 않고, 아예 아웃 오브 안중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참으로 아프고 씁쓸한 일이다.
바르셀로나 시장의 모습이란다. 확실히 남부 유럽이란 생각이 든다. 침 넘어가는 과일들이다.
남편과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도 음식이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에 에피소드가 떠오른다고 하는 셰프의 딸. 내게도 그런 음식이 있던가..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니 떠오르는 게 있다. 오래 전 남자친구가 우리가 맞은 첫번째 크리스마스 때 배고픈데 내내 걷기만 해서 붕어빵이라도 사오라고 했더니 정말 붕어빵을 사와서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먼저 떠오르네. 그 녀석이 며칠 전 통화에서 와이프가 임신 6주라고 했다. 하하하... 역시 씁쓸하다. 끙!
저자가 운영하는 요리 교실의 간판이다. 구르메 레브쿠헨. 저자의 작은 아들이 흰 도자기 접시에 그린 그림이다. '구르메'는 프랑스어로 '미식가, 식도락가'라는 의미다. '레브쿠헨'은 독일어로, 진저브레드 같은 독일의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과자를 뜻한다고... 아아, 진저브레드도 처음 듣는 것을...;;;
아무튼, 저자의 코즈모폴리탄스러운 이력이 들어나는 간판 되시겠다. 귀엽고 정감이 가는데,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보아서는 정체를 알기 어려울 듯하다. 그 비밀스러움이 또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책 속에서 소개된 음식들은 파트가 끝나면 레시피가 뒤쪽으로 실렸다. 여러 요리들이 있었지만 감히 시도해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내 수준은 아직 '작품'을 모방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책을 꽤 오랜 시간 걸려서 읽었다. 바쁜 일이 많이 겹치기도 했지만, 한 번에 주르륵 읽기보다는 조금씩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는 책이기도 했다. 맛있는 메뉴가 많이 등장했지만 눈으로만 맛볼 수가 있어서 때로는 고문이기도 했다. 가장 인상에 남는 음식은 '죽'이다. 아픈 사람에게는 최고의 영양식, 더불어 만드는 사람에게는 꽤 정성을 요구하는 따뜻한 음식 말이다.
요리하는 사람은 정직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리가 맛에 있어 정직한 것처럼 말이다. 여러 나라의 색깔이 들어 있지만 그것들이 서로 등돌리지 않고 하나로 섞여서 제 멋을 내고 있다. 저자의 삶이, 그리고 요리의 맛이 그래 보인다. 과하게 힘주지 않고 오버하지도 않는 담담한 말투는, 비록 번역이라는 중간 과정을 한 차례 거쳤지만 진솔함을 담아내기에 부족하지 않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간에 보다 어울리는 책이기도 하다.
덧글) 오타가 있다.
165쪽 4줄 스페인이 EU 회원국이 되어 값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