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모든 순간 1~4 세트 - 전4권 강풀 순정만화
강풀 글 그림 / 재미주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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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풀 만화는 두가지 축을 이룬다. 순정만화-바보-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축을 이루는 '순정'과 아파트-타이밍-이웃사람-어게인을 이루는 미스테리 공포 심리 썰렁물(이라고 읽지만 감동 코드는 순정만화 축과 다를 바 없다.)이 그것이다. '당신의 모든 순간'은 제목으로는 순정만화를 연상시키지만, 소재가 '좀비물'이기 때문에 미스테리 공포 심리 썰렁물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엄연히 순정만화의 맥을 잇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읽어본 결과 의심의 여지가 없다.  

등장인물들을 보자. 

 

25세의 주선과 27세의 고원헌은 연인으로 둘 다 취업준비생이다. 가난한 살림에 몸도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주선은 연애가 사치라고 느끼는 아주 시니컬한 성격의 여자다. 그에 반해 주선에게 일편단심 민들레를 보여주고 있는 원헌은 지극한 낭만파다. 저 별을 보라는 순진한 표정과 대조되는 주선의 짜증섞인 얼굴을 보라. 둘의 사랑은 좀처럼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쉽고 어렵고를 따질 날이 오지 않는다. 세상의 끝, 아니 인간들의 끝이 오기 때문이다. 

이 책이 좀비물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2012년으로 넘어가는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던 날, 원인 모를 좀비가 생성되어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물고, 물린 사람은 연이어 좀비가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좀비가 되기 전 증상은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다가 코피를 쏟는다. 물에 닿으면 살이 부패하고, 좀비들은 빛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밤이 되면 움직이지 못하고 대신 날이 밝을 때까지 밤새 울어댄다. 그런 세상에 놓여진 형제가 있다.  

동생 이정욱은 23세로 다발성 음식 알러지가 있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지 않다.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는 게 꿈인 이 성실한 청년은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혼자 사는 형과 함께 지내게 된다. 비정규직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형은 늘 동생 걱정을 하며 날이 밝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남기며 밤마자 궂은 일을 하러 집을 나선다.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던 그날도 형은 일하러 나갔다. 집을 나서기 전 자꾸만 날이 밝기 전에 오겠다는 말을 되풀이하던 형은 코피를 흘렸다. 그랬다. 형은 곧 좀비가 될 처지였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형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파트 주변은 온통 좀비들 천지다.  

전기도 끊겼고 모든 문명이 멈춘 것 같은 나날이 이어진다. 정부에서는 비정기적으로 배급을 실시하고, 살아남은 가족 중에 좀비가 된 사람은 없는지 확인을 하고 식량을 나눠준다. 좀비가 나온 집에서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숨기려고 하지만 그렇게 보호받고 있는 좀비가 1차 사살 대상이 되어버린 살벌한 세상이다.  

 

작품의 곳곳에선 현실에 대한 서늘한 비유가 등장한다. 도시가스 민영화에 의료보험 민영화라니, 글자만 봐도 심장이 벌렁거린다. 좀비가 곳곳에서 출몰해 집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삶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쌈박질만 하고 있다는 설정은 뭉클한 작품을 읽는 가운데 스트레스를 얹어준다. 세상의 끝이 와도 그러고도 남을 위인들이란 생각 때문이다.  

좀비가 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말들은 그가 인간으로서 마지막에 갖고 있던 간절한 염원이 표현된 것이다. 정욱의 형 강욱이 날이 밝기 전에 돌아올게-란 말을 되풀이 했던 것과, 엄마 손 꼭 잡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아이 좀비의 내뻗은 손도 바로 그때문이다. 

 

좀비가 되었지만 감정이 살아 있다. 뇌가 녹아버리는 치명적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지만, 가장 간절한 염원만은 남아서 그들을 움직인다. 그들이 주택가를 배회하는 것은 그들이 돌아가고 싶었던 집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그들의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을 버티게 하는 가장 따뜻한 기억, 가장 소중했던 기억들이 모두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랬기에 동남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좀비가 된 와중에도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여전히 공구를 두드리는 장면은 더 짠하다. 그들은 일을 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상념이 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의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자국 국민들도 간수하지 못하는 이 비상사태에 아무 백신도 맞지 못하고 보호도 받지 못하는 그들의 처지란 '좀비'라는 설정을 걷어낸 오늘날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쓴다. 할 수 있는 게 제 목숨을 내놓는 것밖에 없을 때에 누군가는 기꺼이 희생을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남겨진 가족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최선을 다한다. 함께 떠나는 여행길에 동참해주는 반려의 모습이 아름답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침몰해 가는 배 안에서 침대 위에서 꼭 끌어안은 노부부가 문득 떠오른다.  

 

몹시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강풀 작가는 중간중간 유머를 잊지 않는다. 똥 얘기 좋아하는 작가답게 적절하게 등장시켰다.^^  

전기가 끊기는 마당에 방송을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애석하게도 주인공들의 집에는 더 이상 읽을 만한 책도 없었다. 생각이 뻗어나간다. 작품 속 같은 환경이 되어버린다면, 적어도 우리집에서는 식량만 있다면 심심해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향후 몇 년 동안은. 물론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독서가 되겠냐마는,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는 마음으로 버틴다면 책읽는 것말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쟁여둔 책들을 보면 늘 죄책감이 들지만, 적어도 이런 날에는 안도의 한숨을 쉬겠거니 핑계라도 대본다.  

 

까칠한 이웃도, 뭔가 수상쩍어보이는 이웃도, 이런 날들에는 존재만으로 위로가 될 것이다. 서로를 향한 소통의 문이 되어준 종이 편지가 뭉클하다. 유리창에 붙인 한마디는 그들의 스산한 삶을 그대로 대변해 준다. 작품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눈가가 뜨거워졌다. 봉준호 감독은 별명이 봉테일이라더만, 강풀 작가 역시 강테일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가디건의 단추 하나까지도, 손질하지 못해서 덥수룩하게 자라는 머리카락과 수염, 잘 먹지 못해 말라가는 얼굴까지 하나하나 자연스럽게 작품의 모든 것들을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 순간만 기억하는 좀비가 내게 남길 말이 있다면, 그 사람의 모든 순간은 곧 내가 되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순간'이라니, 이렇게 아름답고 아프고 절절한 제목이 또 어찌 나올까.  

위의 사진은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 두 컷이다. 벚꽃 떨어지는 저 장면은 '다모'의 매화 씬에 견줄 명장면이고, 배추꽃이 피면 농사 망친거라고 했지만 기어이 피고만 노란 배추 꽃마저도 이 작품에 봄빛 생기를 불어넣는다.  

좀비가 출몰하고, 그런 좀비를 소탕하는 무서운 세상이 되어서도 서로의 온기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 땅에 남아 있다. 비록, 세상에 당신과 나만 남는다고 해서 우리 둘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캐릭터 설정자료집이다. 작품의 맨 뒤에 실려 있는데, 캐릭터 작업하던 도중 어시스트가 부엌 전원을 올린다는 게 두꺼비집을 내린 기막힌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덕분에 작업하던 것 모두 날려서 만화 인생 종칠 뻔한 어시스트의 살 떨린 이야기! 독자는 웃지만 관련자들은 십년 감수한 추억일 것이다.   

주선의 대사 중에 그런 말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이... 참 괜찮은 사람이네요." 참으로 벅찼다. 그 괜찮은 사람이 그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고, 그가 그녀에게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세상이 망하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감사할 일을 찾을 수 있다니,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읽으면서 '로라, 시티'도 같이 떠올랐다. 그만큼 외롭지만, 그보다는 더 희망적인, 그보다 더 슬프고 더 아름다운 이야기다. 나의 마지막 순간, 그리하여 나의 모든 순간이 될 그 날을 상상해본다. 내 전부가 될 누군가를 그려본다. 또 다시 가슴이 벅차진다. 강풀이 뿌린 바이러스다. 다음 작품만이 백신이 될 것이다.

덧글) 강풀 작가는 '임마'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인마'가 바른 표현이다. 다음 작품에선 고쳐졌으면 좋겠다.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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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9-14 0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구매하려고 미루었더니 품절이 되었네요.ㅜㅜ

즐거운 하루 되세요~ ^^

마노아 2011-09-14 10:23   좋아요 0 | URL
세트도서만 품절이고 낱권은 모두 구매 가능해요. 포기하지 마세요.^^
후애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고요~

달사르 2011-09-1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만화, 정말 눈물 뚝뚝 흘리면서 봤었는데..책으로 나왔군요. 좀비가 나온다고 해서 첨엔 무서워서 몇 편 피했었는데 나중에 죄다 읽어보니 정말 순정물이 맞더라구요. 아이 좀비와 형 좀비, 노부부 좀비..아니 다른 모든 사람들의 제각각의 사연이 모두 슬프지만 아름다웠던 거 같애요. 하하. 강풀이 뿌린 바이러스! 공감백배!

마노아 2011-09-14 14:05   좋아요 0 | URL
2권 마지막에서 형좀비가 다시 나타났을 때 폭풍 눈물 흘렸어요. 저마다의 작품에서 항상 감동과 눈물을 주는 강풀 작가에요. 이런 소중한 작가가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지요. 원작의 힘이 너무 세서 2차 영상물로 넘어가면 그만큼의 빛을 못 발휘하는 게 그래서 늘 아쉬워요.^^

2011-09-14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4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9-14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이름이 몹시 마음에 드네요! ㅎㅎ
마노아님 리뷰 읽다가, 제가 이 만화를 어디선가 들어봤다는 걸 기억해냈어요. 강의 시간이었나... 선생님이 이런 인간적인 좀비물은 처음 본다면서 추천해주셨는데 그 때는 그냥 흘려보냈었네요. 저도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_+

ps. 위탄 첫회에서 이승환 참 귀엽던데요 ^^

마노아 2011-09-15 01:35   좋아요 0 | URL
재미를 보장해주는 출판사 이름이에요.^^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좀비물, 저도 정말 놀랐답니다.
위탄 재밌게 보셨나요? 울 공장장님이 나이를 거꾸로 먹어서 날이 갈수록 귀여워져요.^^ㅎㅎㅎ

자하(紫霞) 2011-09-1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에 연재하는 강풀 만화 보시나요?
아~전 만화 그닥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건 정말 두근두근이더군요.^^

마노아 2011-09-16 01:54   좋아요 0 | URL
지금 연재하는 건 제목이 뭐예요? 강풀 만화는 순정만화만 웹툰으로 보고 나머지는 모두 단행본으로 보았거든요. 너무 재밌어서 기다리는 게 힘들어 일부러 책으로 나오면 보고 있어요. 근데 꽤 유혹적이에요.^^

자하(紫霞) 2011-09-16 10:55   좋아요 0 | URL
조명가게 랍니다.
10화까지 나왔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 궁금해서 때되면 찾아보고 있어요.ㅋ
아~근데 마노아님 나날이 이뻐지시는 듯...^^

마노아 2011-09-16 11:50   좋아요 0 | URL
아핫, 조명가게! 다이어터에서 조명가게 언급한 부분이 생각나요.
새 연재물이 조명가게군요. 제목부터 호기심이 충만해요!
저에게 프로필 사진을 제공해 주는 멋진 친구가 있어요. 호호호^^

2011-09-16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6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