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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여기, 철수의 자세한 규격 설명서가 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20대 남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1년째 취업을 못하고 놀고 있는 철수는 점점 하자가 있는 상품으로 분류되어 가고 있다. 주량이 술 한 잔에 불과한 철수, 조금이라도 당황하면 금세 온몸이 붉어지는 철수, 그래서 갖은 오해에 시달리지만 제대로 된 변명 한 번 하지 못하는 우리의 철수, 사는 게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다.
철수의 부모님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부모님 그 자체였다. 내 아이의 손이 피아노에 재능있어 보인다기에 학원에 들여보내고,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라 잠시 안 하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고, 취업을 못하는 게 아니라 고르느라 잠시 주춤한 것 뿐이라고 애써 설명하는 그런 부모님들이었다. 서로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 조합이 그다지 환상적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을까?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하자 피아노 선생님께 손등을 자로 맞았던 때부터, 철수는 당황해 버리면 손등에 오선지가 드러나고 열이 발생한다. 급기가 그 열은 온몸으로 퍼지고, 버스 안에서는 치한으로 몰리기에 충분한 수준으로 돌변한다. 아이가 그렇게 30년 가까이를 살았는데, 부모님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철수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사용설명서를 작성해서 그것을 보여드렸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다. 가족 안에서 철수는 소통하지 못한다.
연애 전선은 무난했을까? 그럴 리가! 남들보다 꽤 진도가 느렸던 철수는 여자 친구들로부터 원성을 받는 일이 잦았고, 그조차도 결국 제품의 하자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첫 키스에 도달하고, 모텔 방에 입성까지 하고서도 철수의 장벽은 낮아지지 않는다. 몸에 오르는 열이 문제였다. 열을 내리고자 소주를 온 몸에 발랐더니 맨 정신으론 안 될 것 같았니? 소리나 들어야 했고, 해열제를 먹다가 들켰을 때는 더 당황스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약 먹고도 이 정도 뿐이니?라니...
이런 사례가 줄줄이 이어진다. 취업 전선에서, 연애 전선에서, 그리고 가족 모드에서... 사촌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온 친척들의 비교의 장에서 최고 하자품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 그저 예의 없는 사촌으로 남을 것을 후회해봤자 이미 늦은 일이다. '철수'라는 가장 무난한 이름을 지녔지만, 무난하게 사는 일이 어디 쉽단 말인가? 남들만큼 공부해서 대학 가고, 졸업해서 취업하고, 적당한 때에 결혼해서 또 아이 낳아 기르는 그 사이클을 따르는 일, 내가 살아보니 정말 어렵던데, 철수에게 동병상련의 위로의 눈길이라도 보내줘야 하는 건지 한참 헷갈린다.
'오늘의 작가상'이라는 멋진 상도 받은 작품이건만, 이 작품에 쏟아지는 별점들은 혹독하기 짝이 없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다 알수는 없지만, 일견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읽는 내내 너무 답답했던 것이다. 철수가 가여운 건 사실인데, 대한민국의 현실이 20대에게 포부를 주기보다 좌절부터 안겨주는 일이 많다는 것을, 오죽하면 영혼이라도 팔아서 취직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겠냐며 나 역시 침을 튀기며 철수를 위한 변명을 잔뜩 늘어놓고 싶지만 그게 되지 않는다. 철수, 왜 이렇게 답답하니!
사람이 위를 바라보며 살기엔 너무 기가 죽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자니 또 의욕이 안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철수의 제품 사용 환경이 남들보다 나쁘지는 않다. 양친 다 살아 계시고, 보아하니 경제적으로도 표나게 부족하지도 않다. 몸에 어디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연애모드 사례를 들여다 보면 그 와중에 연애 경력도 꽤 된다. 정말 치열하게 먹고 사는 일에 목숨 걸어야 하는 20대는 연애도 사치라는 것을 철수가 알고나 있는지... 면접 모드를 들여다 보면 소박한 아르바이트 한 건이라도 해보았는지 의문이다. 최소한의 사회 생활을 해보았더라면, 이 정도록 막막하지는 않을 것 같다.

철수 스스로도 본인이 오죽 답답하겠는가. 그러니 제품사용설명서를 계속 언급할 것이다. 그런데, 모두들 그렇게 산다. 나는 사실 이래요! 내 진심은 이렇고, 나란 사람의 가치는 보이는 것보다 더 뛰어나요!라고 말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철수의 그 길고도 긴, 온갖 주의사항이 남발되는 제품 사용설명서를 대체 누구라고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147쪽의 질문은 너무 늦게 튀어나왔지만 이제라도 나와서 다행인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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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 설명서가 완성되어 갈수록 철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읽고서도 엄마와 아버지, 누나가 철수를 선택했을까. 그녀들이나 친구들, 또 면접관들은 어땠을까. 이걸 읽고도 철수를 사용할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사용 설명서가 없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철수를 선택하고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철수는, 과연 철수는, 철수를 선택했을까. -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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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 대해서 자학을 하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서른을 앞두고 있는 나이라면, 시작은 네 잘못이 아니었을지라도 이제는 본인의 책임이 되어버린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인생, 곧 너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열이 오르는 너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그 무수한 여자 친구들, 한 번이라도 잡아 보았던가. 잡고 싶을 만큼, 잡지 않고는 못 버틸 만큼 사랑했던 적은 있던가. 늘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할 것 같아서 적당히 사람을 만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어볼 일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너와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그녀를 만난 것은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랄까. 너를 이해해줄, 그리고 너로부터 이해받을 사람의 가졌을 위안이 다행이었다. 그래, 그 속도를 유지하는 거야. 지금까지는 네 속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속도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아차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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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는 조금 더 자 두려고 눈을 감다가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22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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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사용설명서 타령에 독자도 지쳐갈 무렵, 다행히도 철수도 깨닫고 만다. 자신이 작성해 온 그 긴 설명서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사람이 본인임을 말이다. 비록 그것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이긴 했지만, 그랬기에 철수의 인생은 좀 더 달라질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철수에게 하고 싶은 당부의 대부분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임도 외면하지 않겠다. 철수를 응원하는 게 곧 나 자신을 응원하는 것임을 나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오른쪽이 껍데기 표지인데, 벗기면 왼쪽으로 나온다. 얇은 책이어서 굳이 양장본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표지도 안쪽 붉은색이 더 마음에 든다. 소심한 철수와 비교되는 악동의 표정이 혹 철수의 바람일까?
162쪽에 철수는 하루에 약 2560칼로리 정도를 필요로 한다고 썼는데 '킬로 칼로리'로 고쳐야겠다. 철수 굶어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