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 - Incendi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가 시작되면서 라디오 헤드의 You and Whose Army가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중동의 어느 지역, 한 소년이 머리를 삭발당하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아래서부터 위로 이동을 했는데 소년의 오른발 뒤꿈치에는 세개의 점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소년의 눈은 카메라를 뚫을 듯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습니다. 그 눈에는 저항과 분노가 가득합니다. 소년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일까요. 소년은 왜, 그토록 슬프고 고통스런 눈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 시간을 점프합니다. 한 공증인이 유언장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쌍둥이 남매에게 남긴 글입니다. 그런데 이 유언이 아주 황당합니다. 

“내 시신은 세상을 등질 수 있도록 엎어놓아라. 약속을 어긴 자는 비문이 필요없다. 잔느, 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전하거라. 시몽은 형을 찾아 편지를 주도록 해라. 편지가 모두 전달되면 너희에게도 편지를 줄게. 침묵이 깨지고 약속이 지켜지면 비석을 세우고 내 이름을 새겨도 된다. 햇빛 아래에.”

남매는 아버지가 전쟁 와중에 돌아가셨다고 알고 자랐습니다. 게다가 뜬금 없는 형의 존재라니요. 어머니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지요. 평소 말씀이 없으셨고, 아마 자식들에게도 다소 차갑게 군다 느껴지는 인상이었을 겁니다. 누나 잔느는 어머니의 마지막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만 동생 시몽은 회피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거라고, 공증인의 비서로서는 좋은 동료였을지라도 자신들의 어머니로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거칠게 말해버립니다.  

 

잔느는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습니다. 뚜렷하게 답이 나오는 문제만 풀어왔을 테지만, 그런 잔느의 직관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어머니는 수영장에서 갑자기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놓으시고 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엄마의 촛점 잃은 눈을 마주했던 잔느의 마음 속에는 석연치 않은 부채감이 자리합니다. 마침내 잔느는 따라오지 않는 동생을 두고 혼자서 엄마의 흔적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은 캐나다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지만 원래 어머니는 중동 출신이었지요. 영화는 현명하게도 특정 나라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원작 연극에선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했고, 영화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내고 있지만 사용되는 지명은 모두 가상의 곳입니다. 가상의 나라, 가상의 장소를 배경으로 풀어나가지만 영화의 모든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실의 우리를 반영합니다.  

엄마가 다녔던 대학을 찾아가 보았지만 이미 35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엄마의 흔적을 찾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요. 그러다가 사진 한 장이 단서가 됩니다. 사진이 찍힌 장소가 남부의 감옥이라는 것을 누군가 알아본 것입니다. 감옥이라니, 내 어머니가 감옥에 수용될 만한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잔느는 알지 못합니다. 영화는 엄마의 과거를 되밟아 가는 잔느의 여정과 고향을 떠난 어머니 나왈의 행보를 겹쳐서 보여줍니다.  

나왈은 중동에서 태어났지만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회교도 난민이었고요. 두 사람은 몰래 마을을 떠나려고 했지만 형제들에게 들켜버렸고, 그 자리에서 사랑했던 연인은 총살을 당합니다. 할머니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나왈 역시 그 자리에서 명예 살인 되었을 테지요. 당시 나왈은 임신 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나왈에게 하나의 약속을 받아냅니다. 아이를 무사히 낳고 삼촌이 계신 곳으로 도망가서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라고요. 할머니는 갓 태어난 아이의 발 뒤꿈치에 점 세 개를 문신으로 새겨넣습니다. 당장은 고아원에 보내지만 훗날 아이를 알아볼 수 있게 해주려는 의도였지요. 맞습니다. 영화의 시작에서 나왔던 바로 그 소년입니다. 그 아이의 신산스러웠을 삶의 여정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지요. 

 

잔느는 어머니의 고향에서 어머니가 불명예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합니다. 그녀들의 마을에 수치를 안겨주었다는 것이지요. 4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명예는 찾아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은 인류가 서로 다른 종교 문제로 수천 년이나 싸워온 지난한 역사를 그대로 대변해 줍니다. 이제 잔느는 어머니가 수감되었던 감옥으로 향합니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어느 할머니의 제 엄마의 삶도 모르면서 아빠를 찾느냐는 일갈을 가슴에 새긴 채로 말입니다. 

나왈은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며 신문을 만들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내전이 터져서 학교는 습격을 당했고, 날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한 아들을 찾기 위해 아들을 맡겼던 고아원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른 고아원으로 옮겨졌고, 그녀가 도착하기 하루 전에 폭격을 받아 그곳엔 폐허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곳으로 옮겨져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놓치지 않던 나왈은 회교도들이 탄 버스를 얻어타다가 기독교 민병대들의 습격을 받습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을 향해 일제히 쏘아대는 총신에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사람을 죽이지만, 신이 원했던 참 사랑과는 지극히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왈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내세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버스 안의 생존자는 단 세 명. 한 회교도 여인과 그녀의 딸이 또 있었지요. 그 여인까지 살릴 수 없었던 나왈은 여인의 딸이 자신의 딸이라며 안고 나오지만, 아이가 엄마를 쫓아 달려가는 바람에 결국 모두 죽고 맙니다. 이 비극적인 참사 앞에서 그녀는 테러리스트로 거듭납니다. 한때 글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그녀는 이제 저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줄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왈은 기독교 민병대의 지도자 집에 가정교사로 부임했고, 기회를 노려 그 자를 쏘아 죽입니다. 그렇게, 남부의 악명높은 감옥에 수감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무려 15년이나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렸다는 게 각별했지요. 그녀의 의지를 꺾기 위해서, 그녀의 노래를 그치게 하기 위해서 더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고, 그래도 그녀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잔느가 마주친 어머니의 진실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고, 어머니의 고통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는 먹먹한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된 잔느는 동생 시몬을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족처럼 생각해왔던 공증인도 그 자리에 동행합니다. 이들은 점점 더 어머니가 침묵해 왔던 진실에 다가갑니다. 진실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버거웠고, 점점 드러나는 아버지와 형의 존재도 그들의 가슴을 압박합니다.  

1+1=2라는 것이 수학적 진실이었는데, 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합리적인 결론이었는데, 1+1이 2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남매는 부둥켜안고 오열합니다. 수영장에서 미친 듯이 헤엄을 치며 힘을 빼보지만 그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함께 있던 그때처럼 남매는 물 속에서도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눈물을 삭입니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삶을,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과 마주한 그들도 어머니처럼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남매는 어머니의 유언을 지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찾아내었고, 또 그들의 형제를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편지들을 전달합니다. 이제 어머니가 자신들에게 남긴 편지를 열어볼 차례지요.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전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진실의 위력은 지나치게 무서웠기 때문에 아이들이 받을 상처를 보듬어주기 위한 시간을 주었던 것입니다. 공포였을 시작을 사랑이라고 바꿔준 어머니,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기 위해서 약속을 지켰던 어머니... 어머니는 그렇게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자신의 삶을 평화와 위로로 바꾸어 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약속을 지켜낸 어머니는 당당히 햇볕 아래에 비석을 세우고 그 이름을 새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그 비석을 알아볼 수 있게, 누구라도 찾아와서 당신을 만날 수 있게......

영화의 충격적인 소재와 흐름은 관객을 몇 번이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듭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올해 최고의 영화는 '인 어 베러 월드'였지만, 벌써 그 기록을 갈아치우게 됐습니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은 노미네이트로 그쳤지만, 적어도 제게는 이 영화가 준 전율이 더 절절했습니다. 이 정도의 메시지라면 청소년들도 충분히 소화하고 새길만 하건만, 18세 이상 관람가는 적잖이 불만을 줍니다. 영화의 의의가 전쟁과 폭력보다 평화와 사랑에 있다는 것을 우리의 청소년들도 분명히 인식할 텐데 말입니다.  

라디오헤드를 비롯해서 영화 전반에 걸쳐 흐르는 음악들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음악이 부각될 때는 대사 없이 카메라를 멀리서 잡아주는데, 화면속으로 진하게 빨아들이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열연을 보여준 나왈 역의 루브나 아자발의 연기가 훌륭했고, 잔느는 엄마와 비교적 닮은 배우를 기용해서 더 몰입감을 주기도 했지요. 영화의 원제는 'incendies'로 불어로 '불에 그을린'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강렬하고 과격한 사건을 의미한다고 감독은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의 현대판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의 내용과 제목은 몹시 잘 어울립니다. 이탈리아에선 '노래하는 여인'으로, 스칸디나비아 개봉명은 <나왈의 비밀>이라고 하니, '그을린 사랑'이라고 명명한 한국판 제목은 꽤 시적입니다. 무분별한 영어 제목을 한글로 옮기는 행태에 평소 불만이 많았는데, 이런 식의 제목은 언제든 환영이지요.  

큰 비극을 겪고도 그것을 복수가 아닌 사랑과 희망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섣불리 말하기도 힘들지요. 그렇지만, 그런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영화는 130분에 걸쳐서 오감을 다 자극하며 대변해줍니다. 태양 볕이 뜨거운 여름날의 연속이지만, 그보다 더 강렬하고 숭고한 열기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개봉관이 많지 않으니 좀 더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영화 '그을린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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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7-22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꼭 보겠어요, 불끈! 어디서 하죠? 두리번 두리번 (" )( ")

마노아 2011-07-22 16:06   좋아요 0 | URL
일단 무비꼴라쥬에서 합니다. 그밖에 시네큐브까지만 알고 저도 몰라요.^^;;;;
어쨌든 꼭 보는 겁니다.^^

웽스북스 2011-07-2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찜해놨어요! 시네큐브~

마노아 2011-07-22 16:06   좋아요 0 | URL
오, 통했습니다! 시네큐브면 훌륭하죠!

다락방 2011-07-2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예매되어 있지요. 움화화핫

마노아 2011-07-22 16:0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와락 울고 나오겠어요.(>_<)

레와 2011-07-22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요일 부산에서 봅니다! ^^

마노아 2011-07-22 16:07   좋아요 0 | URL
좋은 영화는 두루두루 봐야 해요. 쏘우 굿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