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풍산개 - Poongs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 남자가 있다. 휴전선을 넘나들며 영상편지와 유품 등을 배달하는 사내. 평양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해서 차디찬 강물을 맨 몸으로 건너고, 진흙으로 위장전술을 펴 감시병의 눈을 피하고, 마지막엔 철책을 장대로 뛰어넘어 3시간에 배달을 완료하는 남자다. 통 말을 하지 않는 사내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그가 진정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누구도 아는 바가 없다. 그는 다만 돈을 받고 물건을 배달하고, 가끔은 사람도 배달할 뿐이다.
문제가 된 것은 그가 유품으로 알고 배달한 물건이 북에서 유출시킨 문화재 밀수품이었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잡힌 밀수업자들은 수사 과정에서 풍산으로 통하는 배달부의 존재를 알렸고, 국정원에서는 그를 시험해 볼 기회를 만든다. 때마침 북한에서 망명한 (아마도 고위 공직자였을) 중년 사내가 평양에 두고 온 애인 인옥을 애타게 찾고 있었고, 배달부는 인옥을 평양에서부터 데리고 오는 임무를 맡게 된다.
고작 3시간에 불과했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자의 실수로 사이렌이 울렸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물속에 숨었다가 여자는 실신하기까지 했다. 인공호흡으로 겨우 살아난 여자는 마지막 철책 앞에서 긴장감을 잃고 장난을 쳤다가 사내의 노여움을 사기까지 했다. 혼자서 장대를 타고 철책을 넘는 사내. 여자, 하마터면 버려질 뻔했다.(영화의 진행이 있으니 설마 그럴 리야 없지만...)
평양에서 서울까지 여자는 목숨을 걸고 건너왔지만 남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수많은 감시의 눈길들, 내내 돌아가는 촬영 카메라, 게다가 망명한 뒤부터 내내 암살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옛 애인은 이제 의부증을 보이듯 인옥을 괴롭힌다.
한편 배달을 완료하고 돈을 받아야 했지만 국정원 요원들은 뒷통수를 쳤고, 수갑 풀고 도망친 풍산은 미수금을 받기 위해 인옥과 망명남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에게 고마움과 연민을 느끼는 인옥, 그런 인옥을 참을 수 없는 망명남의 배신으로 풍산은 국정원 요원들에게 사로잡힌다.
영화에서 풍산은 남측에도, 그리고 북측에도 연이어 잡히고 고문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마다 제일 먼저 묻는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네 소속이, 네 정체성이, 네 마음이 어느 쪽에 있냐고 연신 묻는다. 그들은 확언이 필요했다. 듣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가 해내고 있던 그 위험한 일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순수한 메신저라고 결코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필요할 때 이용하는 것이고, 내가 이용하지 못하면 제거하는 것 뿐이다. 그것은 남이든 북이든 똑같았다.
영화는 중반까지 어느 정도 멜로 라인을 잡아 주었다. 불과 3시간이었지만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정도 들었을 것이고, 또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면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모습을 본 사람이니 인옥의 입장에서 흔들리는 것도 당연하다. 풍산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현재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 모른다면 모를까, 자신이 데리고 온 사람의 인생이 자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연민과 책임을 아니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소소한 부분들에서 웃게 해준다. 어린 아이를 운반할 때는 가벼워서 거뜬히 장대로 넘었지만, 성인 여자는 다르다. 몇 번이나 안아 보면서 무게를 가늠하는 이 무뚝뚝한 표정의 사내를 보면서 관객은 한숨이 나왔다. 저렇게 중요한 순간에 걸핏하면 잘 달리지 못하고 넘어지는 여자라고 한심하다 손가락질을 하지만, 저런 위급한 순간에 번쩍 들어올릴 만큼 가볍지 못하면 총알받이가 되겠구나 싶어서 말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120분 내내 남자 주인공은 대사가 없다. 그는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소리는 내도 말은 하지 않는다. 감독의 의도는 그가 말을 하면 남측 사람인지 북측 사람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것 뿐 아니더라도 영화의 의미상 그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배우는 연기하기 답답했겠지만, 목소리 없이도 그는 몸으로 하는 연기를 묵묵히 수행해 나갔다.(운동도 많이 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 서로에게 서로밖에 없던 젊은 남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말이 아니라 몸짓이었을 것이다. 말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아서 서로에게 전달하는 것. 그 짧은 시간에 그것 말고 또 무엇을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을까.
남자는 곧잘 담배를 피웠다. 답답해지거나 휴식이 필요할 때 그는 담배를 물었다. 그의 이름이 되어준 풍산개 담배.
담배를 얼마나 깊고 진하게 피우던지 전혀 담배를 피지 않는 나도 맛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연기를 잘 했다는 얘기일 테지.
아마도 실제로 남쪽에 잠입해 있는 간첩들이 꽤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에도 그럴 테고...
그럴 경우, 남쪽에 있는 공작원들이 더 정신적으로 유혹을 느끼지 싶다. 견물생심!
영화에서도 그랬다. 다이아 목걸이와 반지 앞에서 그들이 보인 행태라니...
영화는 중반을 넘어서면서 극단적인 비극과 해학을 겸해버린다. 그 심각한 상황에서 보여주는 냉소와 블랙 유머는 지구 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를 잘 대변해 준다.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든 버릴 수 있는 자들. 그게 한 핏줄을 이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1대1로 대면할 용기도 없고, 일촉즉발의 수류탄 위로 내 몸을 던져 부하를 살릴 마음도 없고, 함께 살기 위해 동시에 무기를 버리는 모습도 가질 수 없다. 입으로는 무슨 약속을 못하며, 무슨 다짐인들 못할까.
반드시 필요한 통일, 당위성으로는 어떤 걸로도 뒤지지 않는 통일인데, 그 당연한 통일이 말로는 얼마나 낭만적이던가.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무섭고 서글프다. 과연 우리는 통일된 조국에서 살아갈 자격은 있는 것인지 의문까지 느껴진다. 진정 통일된 땅에서 살아야 할 이산가족들은 아무 결정권도 없는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저 위의 사람들에게서 진정 어린 통일의 자세가 있는 것인지 재차 묻고 싶어진다.
김기덕 감독이 각본을 쓰고 제작을 맡았고, 그의 제자 전재홍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전 출연진이 노 개런티로 참여했다는데, 영화는 상업영화로도 성공할 만큼 매우 훌륭했다. 다만, 감정의 조각들이 아프게 박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김기덕 감독이 언제 관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 적이 있던가. 너무 날카롭고 직설적이어서 늘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인정하게 되는 그만의 매력은 분명히 있다.
덧)배우 윤계상은 아이돌 가수 출신이어서 좋은 연기를 펼쳐도 본전을 못 찾곤 했는데, 이제 그에게선 완연히 배우의 향기가 난다. 노래하던 그가 이젠 전혀 아쉽지 않다. 김규리는 이제 바뀐 이름 '김규리'도 어느새 익숙해져 간다. 습관이 놀랍다.
인상 깊었던 마지막 씬은 테르미도르의 유제니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더 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