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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ㅣ 데이비드 맥컬레이 건축 이야기 2
데이비드 맥컬레이 글 그림, 장석봉 옮김 / 한길사 / 2003년 11월
절판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성은 가상의 성이지만, 영주 케빈의 성은 1277년에서 1305년 사이 웨일스 정복 사업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 지은 몇몇 성들의 구조, 건설 과정, 외관에 근거한 것이다. 애버위번 타운 역시 가상의 공간이지만 이 역시 웨일스에 지어진 성에 딸린 타운들에 근거한 것이다.
잉글랜드에서 성장기를 보낸 작가의 경험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1283년 3월 27일,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케빈 르 스트레인지를 웨일스 북서부에 있는 애버위번의 영주로 봉했다. 웨일스 정복을 꿈꾸는 에드워드 왕은 케빈처럼 사비를 털어서라도 성을 짓고 싶어하는 귀족으로 하여금 전략적 요충지에 성과 타운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케빈은 실력이 뛰어난 기술자인 제임스를 총감독으로 고용했다. 제임스와 그가 데리고 온 감독들은 성을 짓기에 최적의 장소를 골라냈다. 석회암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높은 절벽은 최적의 입지였다.
성의 설계도와 바깥쪽 문루의 단면도다.
이렇게 보면 무척 작게 느껴지지만 실물은 무척 클 것이다.
설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총감독 제임스는 일꾼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공사가 한창일 때는 무려 삼천 명의 일꾼이 동원되었다.
그 중에는 채석공, 석공, 미장공, 목수, 대장장이, 배관공, 갱부, 잡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 분야는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부감독들이, 부감독들은 모두 총감독인 제임스가 감독했다.
연장들이다.
왼쪽에는 채석공과 석수, 갱부, 석공과 대장장이, 목수들이 사용하는 연장들이고,
오른쪽은 각종 무기들이다.
동양과는 휘어진 모습이 다른 활이 눈에 띈다.
석궁용 화살을 쏘려면 가로로 공간이 더 넓어야 하기 때문에 아래 그림과 같은 구조가 필요하다.
벽이 함락되면 수비병들은 각 구역에 있는 다리를 치웠다.
다리가 없으면 적군은 벽 안쪽 면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계단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적군이 성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와 위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온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오른쪽 그림은 위에서 설명한 궁수대다. 활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뒤쪽으로 갈수록 넓게 되어 있다.
중요한 곳, 바로 화장실이다.
막벽에 위치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사람들은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했다.
저래 보여도 오물 구덩이를 정기적으로 청소한다고 한다.
우리네 전통 재래식 화장실을 떠올리게 한다.
책은 성과 타운의 공사 과정을, 각각의 공간이 담당하는 기능을 설명한다.
이어서 이 성의 진정한 목적인 방어의 기회까지 보여준다.
1295년 4월에 귀네드 출신의 제후 대퓌드 휘하의 웨일스 병사 수백 명이 타운을 둘러싼 것이다.
6월 말에는 타운 벽 바깥에 있는 건물들 대부분이 파괴되고 경작지도 피해를 많이 입었지만 양쪽 모두 후퇴하지 않았다.
반란군 진압을 위해 잉글랜드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제후 대퓌드는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성은 튼튼했고 공격을 막아내었다. 결국 대퓌드는 후퇴 명령을 내려야 했다.
성은 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 내었지만 에드워드 왕은 웨일스인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밖 주민의 수가 늘어갔고 그 바람에 애버위번은 타운 안의 타운이 되어버렸다.
웨일스의 정복은 잉글랜드인과 웨일스인들이 애버위번과 같은 타운들처럼 자유롭게 출입문을 통과할 수 있게 되고 각자의 건물을 짓고 각자의 풍습을 지켜 줄 때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왕의 승리는 그가 죽고 난 이백 년이 지나서야 진정으로 달성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되었을 무렵에 튼튼하고 아름답던 성은 망가진 채로 방치되어 버린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시간이 흘렀고 역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지막의 시커먼 실루엣의 그림은 성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며 역사의 깊이를 보여준다. 장중한 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