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고종석의 발자국을 먼저 읽고서 보다 앞에 쓴 히스토리아를 찾아 읽게 되었다.  

하루에 하나의 일들을 기술했으니 매일매일 한 장씩 읽게다는 각오였지만 애초에 1월 1일부터 읽기 시작한 게 아니니 잘 안 됐다. (난 원래 중간부터 읽지 않는지라...) 

아무래도 여러 차례 쓰고 난 뒤니 발자국 쪽이 좀 더 문장이 정제되어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히스토리아의 문장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고종석의 문장은 깔끔하다. 진중권 느낌의 냉소는 아니지만 적당히 차가운 미소가 흐른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은 서늘하면서 아주 약간의 한풀이를 해준다. 이런 한풀이도 못한다면 그 억울함들을 어찌 할까. 

1월 22일 김상옥
한국의 자칭 ‘주류’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명예심이다. 그들은 친일을 외치던 그 입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애국을 외치면서도 아무런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만큼 둔감하거나 교활했다. – 34쪽  

4월 22일 지구의 날
지구는 태양계에서 고등생물이 서식하는 유일한 행성이다. 그래서 ‘하나뿐인 지구를 사랑합시다’라는 구호는 상투적인 만큼이나 절실하다. – 126쪽  

4월 26일 게르니카 폭격
1936년 7월 프랑코가 이끄는 모로코 주둔군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세계 양심의 시험장이었다. 이 내전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좌파와 우파를, 우파와 우파를, 좌파와 좌파를 분열시켰다. 예컨대 프랑스의 우파는 대개 프랑코의 반란을 지지했지만, 클로델이나 베르나노스 같은 가톨릭 작가는 파시즘과 스페인 교회를 비판하고 나섰다. 당초에 프랑코의 반란에 호의적이었던 모리악도 결국 공화파 지지로 돌아섰다. 좌파 내부에서도 스탈린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분열했다. 승리를 파시스트에게 돌아갔다. 양심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 130쪽  

5월 14일 조명하
그들이 자기 희생적 실천으로 노현한 그 열망이 없었다면, 우리의 해방은 훨씬 더 늦춰졌을 것이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일제에 대한 소극적 순응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른 이들이 있었다. 역사를 잊은 이에게 역사는 반드시 복수한다. 박정희 기념관이 세워져서는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다. – 148쪽  

6월 14일 스토 부인
노예 제도는 사람이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평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 노예 제도는 외국인 노동자나 혼혈인들을 멸시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고, 여성들을 깔보는 남성들의 마음속에 있고, 장애인들을 백안시하는 비장애인들의 마음속에 있다. 그것은 차이의 권리를 권리의 차이로 바꿔치기하는 우리들의 교활함 속에 있다. – 179쪽  

8월 27일 부전조약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속언은 군국주의자들의 금과옥조였지만, 전쟁 준비는 늘 전쟁으로 마무리됐다. – 256쪽  

9월 3일 호치민
호치민은 공식적으로는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지도자였지만, 그의 이름은 외세에 맞서 싸우는 남북 베트남 민중 전체의 단합을 상징했다. 남북을 통틀어 그런 지도자를 가져보지 못한 우리로서는 부러워할 만한 점이다. – 263쪽  

9월 11일 아옌데
아옌데가 몸을 피했다면 목숨을 보전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피신을 권했다. 그러나 이 ‘노동자들의 대통령’은 조국의 민주주의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했다. – 271쪽  

11월 2일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은 참혹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녀가 형편없는 여자였다는 사실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명성황후 민씨의 죽음은 그보다 훨씬 더 참혹했지만, 그것이 민씨를 좋게 볼 이유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325쪽  

11월 10일 창씨개명
장준하는 생전에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셋 있는데, 첫째는 오카모토 미노루, 둘째는 다카키 마사오, 셋째는 박정희”라고 말한 바 있다. 세 사람은 동일인이다. – 333쪽  

12월 6일 파농
그와 더 닮은 사람은 체 게바라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질병은 진료실에서가 아니라 사회 변혁의 과정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359쪽  

12월 14일 워싱턴
워싱턴은 1796년 3선 대통령으로 추대됐지만 민주주의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고사했다. – 367쪽

지금도 집에서는 하루에 한 장씩 넘기는 미니 달력을 쓰고 있지만, 정확도가 다소 떨어지고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었기 때문에 흥미 이상을 주지는 않는다. 매일매일 그렇게는 못하지만 '발자국'과 '히스토리아'를 동시에 넘겨가며 그날그날 있었던 역사의 자취를 가끔 밟아본다. 그때 그 일이 이 계절에 있었구나, 이 날은 여러 사람이 죽거나 태어났고, 역사적인 일들이 있었구나... 하며 한 번씩 되새김하게 된다.  

'발자국'에는 사진이 없는데, '히스토리아'에는 아주 작은 사이즈라도 사진을 실었다. 그 덕분에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이렇게 미남일 줄이야!하며 놀라기도 했다. 영화 '왕중왕'에서 예수님 역을 연기했던 제프리 헌터 느낌이었다.(앗, 찾아보니 이 배우 죽은 지 한참 지났네!) 

그렇지만 옥의 티가 있었으니, 바로 오타다. 

113쪽에는 4월 9일인데 4월 8일이라고 소제목부터 오타가 났다. 

338쪽 케플러 편에서는 두번째 줄에서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다. '한길에서급사했다'로 적혀 있다. 

351쪽 마젤란 해협 편에서 1921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1521년으로 고쳐야 한다. 

368쪽의 아이히만 사형 선고 밑에서 세 번째 줄의 '그러나'는 앞뒤 문맥상 어색한 접속사다. 

369쪽의 보스턴 차 사건에서는 1975년이라고 적었는데 1775년으로 고쳐야 한다. 

376쪽의 쳇 베이커 편에서 중간 즈음에 '쿨 재즈를 주도하며 베이커과 멀리건의'>>베이커와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11-05-1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 읽으셨군요. ^^ 후기작은 초기작보다는 못한 것 같아요. 이 책은 물론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요새는 뭐하시는지 모르겠네.

마노아 2011-05-10 12:15   좋아요 0 | URL
초기작이 더 좋단 말이지요? 문장이 깔끔해서 관심이 가요.
초기작도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요새는 아프님 서재에서 칼럼으로 만나게 되네요.
칼럼 말고 또 뭘 하시는지...ㅎㅎㅎ

양철나무꾼 2011-05-1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을 참 좋아해서 그의 책들을 꽤 읽었는데...이 책은 아직이예요.
이 분의 <여자들>을 읽고...황인숙이 참 부러웠었는데 말이죠.
아니다, 황인숙 같은 사람을 친구로 둔 고종석이 부러웠나 보다~^^

마노아 2011-05-11 20:49   좋아요 0 | URL
여자들을 읽어야겠다고 보관함에 넣어놨는데 책장을 올려보니 저 그 책 갖고 있는 거 있죠...ㅜ.ㅜ
하마터면 두 권 살 뻔했어요....(>_<)

순오기 2011-05-1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는 '마음산책' 편집자가 봐야 다음 쇄 찍을때 고치겠군요~~~ ^^

마노아 2011-05-11 20:49   좋아요 0 | URL
오타 지적은 매번 리뷰에만 했는데 출판사에다가 줄기차게 메일을 보내볼까봐요.ㅎㅎㅎ

2011-05-11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2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1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1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