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 되풀이해선 안 될 비극, 그림으로 보는 히로시마 이야기
나스 마사모토 지음, 니시무라 시게오 그림, 이용성 옮김 / 사계절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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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고학년 추천용으로 카테고리가 잡혀 있는 그림책이지만 어린이들만을 위한 책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어른이 먼저 보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그런 책이다.  

요즘처럼 우리나라에 방사능에 대한 관심과 공포가 고조된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책꽂이에 있던 이 책이 떠올랐다. 마음이 많이 무거워질 것 같아서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는데 심호흡과 함께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그 순간에 목숨을 잃었던 어린 소년이 영혼이 되어 다시 히로시마 창공을 날며 과거의 시간을 되짚어보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첫번째 그림은 1994년 8월 6일, 그러니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그때로부터 49년이 지난 시점에 찍은 사진을 참고해서 그린 것이다. 해발 580미터 하늘에서 내려다본 광경인데 굳이 그 높이에서 찍은 이유는 당시 투하됐던 원자폭탄이 터진 높이가 580미터이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식민지와 점령 지역을 주황색 선과 면으로 표시했다. 보라색은 영국령, 분홍색은 프랑스령이다. 그밖에 네덜란드 식민지가 되어버린 인도네시아와 미국 밑으로 들어가버린 필리핀도 보인다. 온 세계가 전쟁통이었다. 그러니 세계 대전이라고 부를 만하다.  

전쟁 발발국이었던 이탈리아가 1943년에 항복을 했고, 히틀러의 독일도 1945년 5월에 무릎을 꿇었다. 일본만 남았다. 일본의 광기가 끝을 모르고 치닫고 있었지만, 과연 1945년 8월 6일 그 시점에, 원자폭탄이 아니었다면 전쟁을 끝낼 수가 없었을까? 트루먼과 히로히토는 그렇다고 수긍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보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보여주고 확인할 필요가 더 우선이었을 것이다.  

포츠담 회담을 시작하던 7월 17일 하루 전날, 뉴멕시코 주의 앨러모고도에서 첫 원자폭탄 실험이 있었습니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포츠담에서 이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는 협상에 참가하는 트루먼에게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7월 26일, 이미 두 개의 원자폭탄이 티니안 섬으로 운반되어 있었습니다. 트루먼은 하루 전에 이 폭탄들을 사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미국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힘을 온 세계, 특히 소련에 보여 주기 위해 전쟁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원자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에 들어간 비용과, 앞으로 이어질 연구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나랏돈으로 충당하는 일에 대해 국민들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 21쪽


20세기 초에 과학자들은 자연 방사 현상을 관찰하다가 원자핵이 커다란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불길하게도 핵분열 현상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9개월 전에 발견되었다. 원자폭탄 개발은 독일이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그 성공은 미국과 영국의 몫이 되었다.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는 건 명예이지만, 그 이름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드는 데에 결정적 열할을 했다는 사실과 함께 기록된다면 그 명예는 치욕일 것이다. 많은 이름난 과학자들이 맨해튼 계획에 동원되었고, 원자폭탄 제작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게 중에는 이 무시무시한 무기의 위력과 폐해를 알아차리고 핵무기 규제에 애를 쓴 인물들도 다행히 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와 사흘 뒤 나가사키에 떨어진 패트맨의 단면도다. 앞의 것이 우라늄으로 만들었고 뒤의 것이 플루토늄으로 만들어졌다. 둘 다 만 단위의 무수한 사람이 죽게 만든 원흉이지만 히로시마가 먼저 원폭 피해를 입었고 사상자도 훨씬 더 많았기에 원폭에 대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나가사키보다 히로시마 쪽이 더 강렬하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도 히로시마. 

이 책은 글이 꽤 많다. 당연하다. 그때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주기 위해선 제시하고 설명하고 보탤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8월 6일의 사건 당일의 기록도 시와 분 단위로 자세히 담겨 있다. 맑은 날씨를 기록한 8월 6일에,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 에놀라게이 말고도 폭발을 관찰하고 촬영하기 위한 두 대의 비행기가 더 따라갔다. 자신이 누른 버튼 하나에 수십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게 했다는 사실에 그 조종사는 어떤 마음으로 살까 안쓰러웠다. 그런데 뒤에 기록을 보니 31년 뒤에 폭격기의 기장 폴 티베츠가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에어쇼에 참석한 것을 보았다. 인간이 참으로 무섭고 끔찍하다. 하긴, 1975년에 일왕 히로히토는 “히로시마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원폭 투하는 당시 상황을 볼 때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말을 했으니 더 붙일 말이 없다. 

 

폭탄이 터지고, 눈부신 섬광이 발생했다. 이어서 거센 폭풍이 도시를 집어삼켰고, 몇몇의 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모두 부서졌다. 사람들 또한 무참히 이리저리로 날아가 버렸다. 원폭 시험을 위해서 다른 폭격으로부터 제외되었던 이 도시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히로시마 상공 580m 높이에서 일어난 폭발은 1조4천억 칼로리의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내뿜었습니다. 폭발 당시 폭심의 순간 온도는 섭씨 몇백만 도에 이르렀습니다. 폭발한지 0.1밀리초(1밀리초는 1,000의 1초) 뒤 지름 30m짜리 불덩이가 생겨났습니다. 불덩이의 바깥 온도는 섭씨30만 도에 이르렀습니다. 불덩이의 지름은 순식간에 500m로 커졌습니다. 불길은 10초 동안 눈부시게 타올랐습니다. 불덩이가 내뿜은 열선 때문에 폭심 근방의 온도는 섭씨3천에서 4천 도까지 치솟았습니다. 공중폭발로 생긴 충격파가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이 충격파와 땅에서 반사되어 생긴 충격파가 합쳐졌습니다. 폭심 부근에는 폭풍의 압력이 평방미터 당 30t에 이르렀고, 이런 상태는 약 1분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재래식 폭탄이 폭발할 때 일어나는 폭풍의 압력이 겨우 몇 밀리초 동안 유지된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참으로 엄청난 위력입니다. – 46쪽  

저렇게 어마어마한 것이 터졌으니 사람이 무사할 리 없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후의 방사능 오염이다. 도시에 있던 사람들 뿐아니라 그들을 구하러 온 사람들까지 연이어서 방사능에 노출되고 목숨을 잃었다. 사건 당일 히로시마에 있었던 사람은 대략 35만 명 정도로 추정하지만, 이후 방사능에 오염된 사람은 무려 45만 명이나 되었다. 그들의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심지어 되물림 되고 있다.  

 

플루토늄의 반감기는 무려 24,000년.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누가 지었는지 이름도 기막히게 지었다.  

핵을 무기가 아닌 평화적으로 이용한다면서 지은 원자력 발전소가 전 세계에 대략 530여 개쯤 된다고 한다. 핵무기와 원자력 발전 때문에 방사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어림잡아 350만 명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제 이 숫자는 지난 달을 기점으로 비할 수 없이 많이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원자력 발전소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 아니어도 결코 안심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는 변명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오스트리아의 실례는 무척 감동적이었다.  

1978.11
오스트리아가 원자력 발전소 운영에 대한 국민 투표를 함. 그 결과로 오스트리아는 원자력 발전소 운영을 중단.
1986.9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 나라의 유일한 원자로였던 츠웬텐도프 원자력 발전소를 해체하기로 결정. 이 발전소는 1977년에 완성되었으나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

해마다 8월이면 히로시마에서 '히로시마의 날' 행사를 갖고 추모와 평화를 위한 움직임을 보여왔다. 책에서는 그들의 행보와 달리 일본 정부의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고 무개념적인 핵정책이 소개되고 있지만 8월 6일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히로시마에서는 끊임없이 핵무기를 금지하고 방사능을 경고하는 메시지들을 보내왔다. 시장의 연설들은 얼마나 개념에 차 있던지.... 

1979.8
히로시마의 날 기념 연설에서 히로시마 시장이 “방사능 피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라고 말함
1991.8
히로시마 시장이 히로시마의 날 기념 연설에서 2차대전 기간 중에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저지른 가혹한 범죄들에 대해 일본 전체를 통틀어 처음으로 공식 사과함. 히로시마 시장은 또한 히로시마가 전 세계의 핵실험 피해자와 핵 시설 관련 사고의 피해자들을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강조.
1997.8
히로시마 시장이 일본 정부에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라고 처음으로 요구. 이러한 요구는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일본의 핵 정책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짐.

히로시마에서, 체르노빌에서, 그리고 후쿠시마에서 인류는 명부의 신과도 같은 무서운 물질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 무시무시한 악의 정체를 포기하지 않고 감싸 안는다면, 같이 명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인류가 그토록 멍청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렇게 어리석지만은 않을 거라고 한 줌 기대를 보태본다. 이렇게 평화와 희망의 등을 띄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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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07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비 온대요.
봄비가 반갑지만은 않은 것은 방사능을 잔뜩 머금고 오기 때문이라지요~ㅠ.ㅠ

플루토늄의 반감기, 무시무시한걸요~

마노아 2011-04-07 01:56   좋아요 0 | URL
언니가 제주도에 다녀오자고 했는데 다음에 가자고 했어요. 여기서 거기가 무슨 차이겠냐 싶지만 그래도 두려워요. 비도 두렵습니다. 어휴...ㅜ.ㅜ

루쉰P 2011-04-0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들르는 서재들에 마노아님의 댓글들이 보여서 한 번 놀러와 봤는데 이렇게 좋은 책 리뷰를 보게 돼서 감사하네요.^^ 핵에 대해 알고 싶어도 내 인생에 상관없어라는 굉장히 무서운 방관자적 입장에서 이런 리뷰를 보니 눈이 확 뜨이네요. 사실 지금 당장 내 목줄을 죄지 않으면 그것이 진정한 공포인지를 모르는 것이 제 습성인 것 같아요. 후쿠시마 같은 사태가 제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데 말이죠. 예전에 열심히 읽었던 <인물과 사상> 잡지에서 원폭피해자인 재일동포 분의 사투가 그려진 칼럼이 있었는데 정말 그 누구한테 탓할 수도 없고 오로지 피해만 입고 살아야 했던 그 사진 속의 재일동포의 눈매가 잊혀지지 않더라구요. 좋은 리뷰 정말 감사히 읽고 가요. ^^

마노아 2011-04-07 14:0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루쉰P님! 사람들이 대개 그런 것 같아요. 광우병 때도 그랬고 백두산 폭발 얘기 들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 방사능 비를 걱정하는 지금도 그렇고... 그때그때 세상에 종말이 온 것처럼 마구 걱정을 하다가 또 다른 큰 사건이 터지면 금세 잊거나 덜 급해지곤 하지요. 이렇게 위기감기 고조되었을 때 또 다른 중요한 무언가가 잊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해요.
예전에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책을 구입했어요. 원폭2세 김형률 씨의 평전이었는데 도저히 읽을 자신이 없어서 기증을 했거든요. 읽지 않고 보낸 그 책이 떠오르면서 고인께도 미안하고 여러 피해자들께도 죄송하단 생각이 들어요. 리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루쉰P 2011-04-07 15:54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제 삶을 봐도 그런 것 같아요. 뭔가 고민이 있을 때 세상이 종말 온 것처럼 난리를 치다가 또 다른 큰 고민이 터지면 또 우왕 하면서 전 고민을 잊어버리고 다시 반복...(-.-) 그래도 마노아님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이렇게 파악하고 계시니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흠...오늘도 배우고 가요. 완전 감솨...

마노아 2011-04-07 16:27   좋아요 0 | URL
모두들 비슷하게 사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소수의 분들이 계시고요.
얼라, 그 사이 대표 이미지가 바뀐 건가요? 그림이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