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 정조실록 - 높은 이상과 빼어난 자질, 그러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나가면서 정조를 어떻게 그려낼지 몹시 궁금했었다. 드라마로도 소설로도 많이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은 임금이었고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 무성한 소문과 추측과 억측, 상상이 덧붙여졌으니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영조편을 읽으면서 그런 기대를 버려야 했다. 이 책의 제목이 '조선왕조실록'인 것처럼 저자는 실록에 충실히 기반을 둘 뿐, 독자의 기대를 맞추려 하지 않는다. 그랬기에 보다 극적일 것 같았던 정조시대의 이야기는 제법 건조하고 딱딱하게 진행된다. 심지어 그 유명한 정약용과 박지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저자는 설명했다. 실록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수원 화성 축성에 활용된 거중기조차도 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한다. 문체반정의 정조이니 열하일기가 나오지 않는 건 크게 의아하지 않는데 거중기도 나오지 않아서 다소 놀랐다. 독자들의 이런 궁금증을 미리 알아챈 저자의 선 문답이 재치 있다. 정치사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거니 너무 섭섭해할 필요는 없겠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사랑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지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멍에도 온 몸으로 진 상태였다. 즉위 초기 그가 외척을 숙청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그야말로 준비되어 있었달까. 할아버지 영조가 권력을 조금만 더 일찍 내려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계속 남는다. 저자도 지적한 부분인데 15세면 성인 취급하던 시절이었으니 5년만 양보해서 스무 살에 재위에 올랐더라도 충분히 좋았을 법 싶었다. 역사에 '만약'은 무의미하다지만 정조가 쉰도 채 되지 않은 채 어린 세자를 두고 죽은 것을 생각하면 역시 아쉽다.  

그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치밀한 임금이었고 문무를 겸비한 학자 군주였다. 게으름이란 걸 몰랐고, 완벽주의자였다. 그런 성향을 아랫 사람들에게까지 요구했을 터이니 같이 일하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었겠지만, 놀고 먹는 군주와 비교할 수는 없는 일. 일도 많이 했고 가슴에 맺힌 것도 많고 휴식이란 통 몰랐으니 몸이 쉬 병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책 속 그림도 점점 불어가고 머리도 하얗게 세어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편애하는 임금으로서 안타까웠다.  

 

사진은 정조반차도로 정조가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 행궁까지 가는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기록화다. 청계천변 산책로 벽면에 도자 벽화로 재현된 것을 찍은 사진인데 날이 따뜻해지면 이 그림 보러 청계천 나들이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파와 벽파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윗 그림과 같은 도식으로 잡혀 있고는 했는데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 무척 애를 쓴 모습이었다. 어휘 자체는 아래 그림처럼 '시류에 영합하는'과 '편벽한 무리'란 의미로 쓰였다. 저자는 노론 안에서의 시파와 벽파가 중요했던 거라고 강조한다. 그밖의 당에서는 시파든 벽파든 영향력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순왕후에 대한 시각 조정도 애를 썼다. 정조 죽음의 배후 인물로 사극에서 곧잘 지목되곤 하는 정순왕후인데 저자는 정치적 동지였고 꽤 큰 존재감을 보였던 인물로 그렸다. 어김 없이 이어지는 코믹 퍼레이드. 

 

미친 존재감의 정순왕후다.^^ 정조 시대 때 미국은 독립을 했다. 오등은 자에 아 미국이 독립국임과~ 아, 웃겨 죽을 뻔했다. 서울 놈만 대접받는 더러운 세상도 마찬가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빵빵 터지는 유머감각이었지만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선 다소 약했다. 정조라는 인물이 좀 개그와 안 어울리기는 하다.   

저자 후기에서 홍인한의 세 가지를 알 필요 없다는 발언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나로서는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홍인한이 그런 발언을 했던 심상 자체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고 여기지만, 그런 말 자체는 다른 때에도 보여지는 말이었다는 것이 말이다. 가끔은 저자의 해석이 내게 100% 납득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 흥분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그의 목소리를 신뢰한다.  

실로 출중한 능력을 선보였고, 그 이상으로 노력했던 대단한 군주였던 정조. 그를 싫어했을 것 같은 신하들도 그의 자질과 노력을 부인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왕의 묘지문 일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종 생각이 자꾸 났다. 학문을 좋아하고 학문을 많이 연마한 임금으로 서로 어깨를 견줄만 하지만, 그 성과와 평가에 대해서는 차이가 많이 진다. 정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세종이 정말 큰 인물이었구나...란 생각 말이다. 저자도 그랬나 보다.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 남은 이야기는 4권으로 마무리될 터인데 다음 편은 어떤 구성으로 갈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순조와 헌종과 철종은 세 권으로 나오긴 그렇지 않나? 고종을 또 한 권으로 표현하긴 부족할 것도 같고... 아무튼 독자는 기다릴 뿐이다.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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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3-2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실록까지 샀는데 제대로 읽은 건 없다는... 다행히 우리 애들이라도 읽었으니 됐지요.^^
언제든 1권부터 차례로 읽어야 되는데~~~~~

마노아 2011-03-29 21:4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댁에서는 가격대비 독서 효과가 갑절의 갑절이에요. 여러 사람이 읽으니 참 좋아요.
순오기님은 완간된 다음에 몰아서 읽으셔도 좋겠어요.^^

꿈꾸는섬 2011-03-2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완간되면 몰아서 읽어야겠어요.^^

마노아 2011-03-29 23:29   좋아요 0 | URL
현준이와 현수도 자라서 즐겨볼 책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