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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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
결코 내 짐마저 지고 갈 수 없다
길을 떠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짐은 멀리 던져버려도
어느새 다른 사람의 짐이
내가 짊어지고 가는 짊의 절반 이상이다
풀잎이 이슬을 무거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내 짐이 아침이슬이길 간절히 바랐으나
이슬에도 햇살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
이제 짐을 내려놓고 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지고 온 짐덩이 속에
내 짐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비틀거리며 기어이 짊어지고 온
다른 사람의 짐만 남아 있다
-36쪽

충분한 불행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37쪽

벽돌

위로 쌓아올려지기보다 밑에 내려깔리기를 원한다
지상보다 먼 하늘을 향해 계속 쌓아올려져야 한다면
언제나 너의 발밑에 내려깔려
누구든 단단히 받쳐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어느날 너와 함께 하늘 높이 쌓아올려졌다 하더라도
지상을 가르는 장벽이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산성이나 산성의 망루가 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 동네 공중목욕탕 굴뚝이나 되길 바란다
때로는 성당의 종탑이 되어 푸른 종소리를 들으며
단단해지기보다 부드러워지길 바란다
쌓아올린 것은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이므로
돌이 되기보다 흙이 되길 바란다
-69쪽




지금부터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겠다
남은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희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절망에는 늪이 없다
늪에는 절망이 없다
만일 절망에 늪이 있다면
희망에도 늪이 있다
희망의 늪에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가득 빠져 있다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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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1-03-29 0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관심이 갑니다~ ㅋㅋ
시가 너무 좋아요^^

마노아 2011-03-29 11:19   좋아요 0 | URL
시가 좋지요? 시인은 다른 유전자를 갖고 사는 것 같아요.^^

섬사이 2011-03-30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호승 시인의 새 시집이 나온 걸 모르고 있었어요.
대학생 때 <서울의 예수>를 읽고 가슴이 먹먹해지고 나서
정호승 시인의 시집은 빼놓지 않고 샀는데 말이에요.
마노아님 덕분에 놓칠 뻔한 책을 잡았네요.
고마워요.

마노아 2011-03-30 11:42   좋아요 0 | URL
헤헷, 도움되어서 기뻐요.^^
작년인가 4대강 찬성이었나? 암튼 어느 사건으로 대단히 실망한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시는 좋았어요.^^;;;

꿈꾸는섬 2011-03-30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마노아님이 좋았다고하니 저도 덩달아 좋아요.^^

마노아 2011-03-31 01:16   좋아요 0 | URL
봄에는 시를 읽어야 해요. 정화되는 기분이랄까요. 꿈꾸는섬님 덕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