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 결코 내 짐마저 지고 갈 수 없다 길을 떠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짐은 멀리 던져버려도 어느새 다른 사람의 짐이 내가 짊어지고 가는 짊의 절반 이상이다 풀잎이 이슬을 무거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내 짐이 아침이슬이길 간절히 바랐으나 이슬에도 햇살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 이제 짐을 내려놓고 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지고 온 짐덩이 속에 내 짐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비틀거리며 기어이 짊어지고 온 다른 사람의 짐만 남아 있다 -36쪽
충분한 불행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37쪽
벽돌
위로 쌓아올려지기보다 밑에 내려깔리기를 원한다 지상보다 먼 하늘을 향해 계속 쌓아올려져야 한다면 언제나 너의 발밑에 내려깔려 누구든 단단히 받쳐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어느날 너와 함께 하늘 높이 쌓아올려졌다 하더라도 지상을 가르는 장벽이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산성이나 산성의 망루가 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 동네 공중목욕탕 굴뚝이나 되길 바란다 때로는 성당의 종탑이 되어 푸른 종소리를 들으며 단단해지기보다 부드러워지길 바란다 쌓아올린 것은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이므로 돌이 되기보다 흙이 되길 바란다 -69쪽
늪
지금부터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겠다 남은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희망의 늪에 빠졌다고 말하겠다 절망에는 늪이 없다 늪에는 절망이 없다 만일 절망에 늪이 있다면 희망에도 늪이 있다 희망의 늪에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가득 빠져 있다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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